[북핵과 협상학-20] 중재 범위·핵심 요구 밝히되, 우리 기준은 배에서 닻 내리듯 정해놔야
  • 오래전이지만 ‘딥 임팩트’ 영화(1995)를 재미있게 본 기억이 있다. 달이 유성과 충돌하며 지구에 다가오며  멸망 위기로 치닫는 영화이다. 내용 중에 돌아 올 수 없는 달 파견 임무를 맡은 롤랜드 박사의 약혼녀가 재앙 혼돈 속에서 구호물품 차를 얻어 타고와 극적으로 만나게 된다. 원래는 돈을 주어도 태워줄 수 없다던 까다로운 구호물품 차였지만 자신의 임신 사실을 알리며, 떠나는 롤랜드 박사를 꼭 만나야 한다고 설득하자 구호차 대원의 마음이 움직였다. 자기 목숨을 내놓고 지구를 떠나는 롤랜드 박사에게 인류는 그렇게나마 보답을 해주었다. 사실 차를 태워달라, 안된다 하는 그 순간도 협상의 한 모습이다. 그 때 옆에서 돈다발로 한 자리를 구하려 했던 사람은 승차를 거부당했다. 그러나 ‘임신과 가족 상봉’ 이런 인류 보편적인 가치는 재앙의 한 가운데서도 통할 수 있었다.

    미북 정상회담이 열흘도 남지 않았다. 북핵 협상도 아직도 실무 아젠다가 안알려지고 있다. 트럼프대통령은 은근히 비용은 한국, 일본 등 주변국에 전가하겠다는 메시지를 흘리고 있다. 반면 미하원의장과 공화당 중진들조차도 북한을 믿을 수 없다며 압박하고 있다. 북한은 북한대로 이번에 잘 안되면 중국을 믿고 자기들 갈 길을 가겠다고 입장이다. 우리나라는 두 나라 협상의 중재자와 촉진자 역할을 자처하고 있으나 자칫 상황이 잘안풀렸을 때는 두 나라 정상 뿐만 아니라 양국의 다양한 이해관계자들로 부터도 원망을 뒤집어 쓸 수 있는 상황이다.

    이럴 때 협상학에서는 ‘앵커링(닻 내리기: Anchoring) 단어를 쓴다. 즉 실제 협상테이블이 바로 눈앞에 놓여진 만큼 우리도 중재 범위와 핵심 요구를 밝히되, 우리의 기준을 배에서 닻을 내리듯 정해놓아야 한다. 국내 야당도 닻을 내리는 지점에 대해 미의회처럼 의견을 밝혀야 한다. 이런저런 입장 변화가 흔들리는 배처럼 보일 수 있어도 닻은 한자리에 고정되어 있다. 만약 미국의 느슨해진 완전하고 검증된 비핵화(FFID)와 북한의 단계별 제재완화라는 닻에 우리만의 닻을 내리지 않는다면 양측의 배 사이에서 표류하는 배 신세가 될 것이다.

    우리의 닻은 북한 비핵화가 핵심이며, 북한 정부에 대한 직접 지원 보다 실제로 열악한 북한 주민의 삶에 대한 지원 그리고 우리나라 이산가족들을 위한 지원을 우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 비핵화 시간표와 함께 분단국 당사자로서 앞서 영화의 인류보편적인 조건들은 한시도 미룰 수 없기 때문이다. 미국과 중국의 다른 정치인들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의제가 될 것이다. 트럼프 역시 그간 미북 협상 사이에 피납 미국인 귀환, 미군유해 송환 등을 얻어낸 실적을 자랑하고 있다. 협상에서 조금씩 얻어내는 전략은 큰 타협을 위해서도 중요한 역할을 한다.

    닻이 없으면 배는 표류한다. 아쉽게도 우리 국민은 북한 비핵화 협상에서 우리의 앵커링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한다. FFID 보다 낮은 단계라도 북한에 유리한 제재완화를 하겠다는건지, 인류애적인 금강산 상설 이산가족 면회소 설치 같은 합의로 북한과 신뢰구축을 우선시 하겠다는건지, 이번만큼은 비핵화가 확실히 담보된 조치가 있어야 북한을 도울 수 있다는 강력한 메시지인지 기준이 되는 닻이 어디인지 알 수 없다. 이는 여야 정치인 모두의 책임이기도 하다.

    협상학에서 상대는 앵커링을 하는데 나는 하지 않을 경우 일방적으로 끌려가겠다는 잘못된 신호를 주는 것이라고 경고한다. 미국과 북한은 앵커링을 이미 해두었다. 우리의 앵커링에는 제도적이고 상설적인 인도주의가 반영되길 바란다. 중장기적으로도 현금 지원보다 더 북한 변화를 이끌어내는 닻이 될 것이다. 

    / 권신일 前허드슨연구소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