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은 인간과 역사의 숙명… 나라 잃고도 상심하지 않은 인물들이 역사엔 존재
  • 인생은 상실의 연속이다. 우리는 급작스럽게 상실이 찾아오면 다양한 반응을 보인다. 수용하고 다시 살아가거나, 절망스런 현실을 비난한다.  

    인간은 비슷하면서도 다른 욕구와 갈망을 갖고 있다. 77억 개의 갈망을 완전히 만족시킬 수 있는 세상은 없다. 때문에 우리는 세상을 불공평하다 느낀다. 그래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인간의 조건이라 말하는 사람도 있다. 

    이룰 수 없는 소망으로 인해 겪는 상실, 그곳에서 세상의 어두운 면이 파생된다. 그렇다고 인간의 갈망을 통제할 수는 없다. 갈망할 자유를 빼앗긴 인생이야말로 가장 큰 상실이다.

    헬조선, 말 그대로 지옥 같은 한국이다. 현재 대한민국 청년들은 자신의 조국을 이렇게 부른다.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삼포세대에 더하여 집과 경력까지 포기한 오포세대, 더 나아가 희망-취미와 인간관계까지 포기한 칠포세대, 그리고 이제는 N가지를 포기한 N포세대이다. 더 이상 포기할 항목을 셀 수 없어 N으로 표기해버린 현실 앞에 청년들은 “헬조선!”을 부르짖는다.

    한국을 뜨자고 말한다. 하지만 외국이라고 다를까. 외국인도 똑같은 인간이다. 국가 구조와 정책이 달라져도 상실은 찾아온다. 어디로 도피하든 그곳이 인간세상이라면 별 수 없다.

    상실이 찾아온다고 죽음을 택할 것인가. 세상에 던져진 삶이라면 살아야 한다. 그렇다면 끝없는 상실의 시대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역사 속에도 상실은 존재했다. 대한민국이 건국되자 한반도가 헬조선으로 변한 게 아니다. 어느 시대나 한계가 있었고, 그로 인한 포기와 상실이 존재했다.  

    1910년 이승만은 동양인 최초로 프린스턴 대학에서 국제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이승만이 박사 학위를 받던 해, 조선은 멸망한다. 이승만은 조국을 상실한 아픔을 “조국을 위해서 공부했는데, 나의 조국은 더 이상 나의 나라가 아니었다”고 토로한다.

    이러한 상실 앞에 이승만은 어떻게 반응했을까. 당시 오백 년 왕조를 상실한 조선의 반응은 비분강개였다. 망한 조국을 두고 자결하는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을 향해 “세 가지 시원한 것”이라는 충격적인 발언을 했다. 

    첫째로 임금이 없어진 것(무군), 둘째로 양반이 없어진 것(무반), 셋째로 상투가 없어져서 속이 시원하다(무발)는 말이었다. 

    이승만이라고 조국의 상실이 허망하고 쓰리지 않았을까. 충분히 괴로웠을 것이다. 그렇다고 삶을 포기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상실을 긍정하기로 선택한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조선의 백성을 향해 차라리 속 시원하다고 외쳤다.

    주목할 점은 이승만이 외친 긍정이 그저 위로하기 위한 허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당시 조선은 신분 사회였다. 군주주의였던 조선시대에 자유민주주의를 추구한 이승만은 신분제의 상실을 긍정했다. 어떻게든 희망을 찾아 외쳤다.

  • ▲ ▲ 독립협회 청년 지도자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고종 폐위를 모의하다 반역죄로 종신형에 처한 24살의 이승만
    ▲ ▲ 독립협회 청년 지도자로서 자유민주주의 국가 건설을 위해 고종 폐위를 모의하다 반역죄로 종신형에 처한 24살의 이승만
    대한민국의 20대 청년으로서 2019년을 살아가는 나는, 현재가 긍정되지 않는다. 보이고 들리는 기사와 각종 이슈를 접하면 비판거리가 목구멍까지 차오른다. 더불어 갈망이 이뤄지지 않는 현실 앞에 가정환경, 사회 구조를 탓하고 싶을 때가 많다. 그렇다고 어쩌겠는가. 비난만 하며 삶을 포기할 수 없다.

    과거에서 현실을 살아갈 지혜를 얻는다고 하던가. 조국을 상실한 슬픔 앞에 긍정을 외쳤던 이승만처럼, 나 또한 대한민국을 향해 긍정을 외쳐보려 한다.

    경기가 계속 침체 중이다. 지금이 IMF시기와 비슷하거나 더한 수순을 밟고 있다고도 말한다. 그럼에도 첫째, 문재인 정부를 달님이라 추대하며 무조건적인 기대와 찬사를 보내던 사람들이 현실을 깨닫고 있는 게 속 시원하다. 난세에 영웅이라도 난 것처럼 이번 정부를 추대하던 소리가 잦아들어 좋다. 인간을 향한 무조건적인 찬양은 경계해야 한다. 특히 정치인을 향한 근거 없는 기대감은 나라를 망치는 지름길이다.

    둘째로 최저임금 상승 등의 후한 복지가 국가발전을 저해한다는 사실을 수용하기 시작한 분위기이다. 최저임금이 상승하면 고용주는 높은 임금을 부담하기가 힘들고, 고로 일자리는 줄어든다. 이 기본적인 경제 이론에 이제라도 귀 기울이게 되어 좋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환상이 깨진 지금, 마지막으로 속이 시원한 것은 많은 이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우파 유튜브가 작년에 많이 개설됐다. 조국의 현실을 비판하면서도 행동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자신의 목소리를 내고 있다. 

    백문이 불여일견이라 했던가! 사람들이 현실을 조금씩 직면하게 된 것 같아 속이 시원하다. 정치인의 능력보다 이미지에 헛된 희망을 품는 국민보다, 현실을 직시하고 국가의 주인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국민을 원한다. 

    20대의 하루하루가 행복하지 않더라도 삶을 긍정할 것이다. 비판해봤자 어쩌겠는가! 고통과 상실이 존재하는 세상에 던져진 인생이다. 놀라운 건 세상에는 기쁨과 즐거움, 가슴 벅찬 행복 또한 가득하다는 사실이다.

    C.S루이스는 “지금의 고통은 그 당시 행복의 일부이다. 결국 거래인 셈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사랑했기에 그것의 상실이 아픈 것이다.      

    조국의 상실 앞에 긍정을 외쳤고, 긍정의 힘으로 자유민주주의 국가 대한민국을 건국한 이승만 대통령을 오늘날 기억해본다. 

    상실은 미래를 긍정할 수 있는 힘이다. 그 힘으로 멸망한 조국을 부활시킨 기적이 우리의 건국사이다. 대한민국의 청년임에 다시금 자부심을 느끼며 오늘을 살아가는 나는, 다시 긍정을 외쳐본다. 

    <필자 소개>
    성채린 (1995년생)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재학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회원
    (사) 대한민국 통일건국회 청년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