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甲濟  / 조갑제닷컴 대표 
     
      1952년 초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日帝 총독부 관료 출신인 任文桓(임문환) 씨를 농림부 장관에 임명하였다. 장관은 차관에는 일본 고등문관 시험 同期인 李泰鎔(이태용)씨를 임명하였다. 任씨는 국회에 인사차 갔다. 국회는 그가 親日派라고 인사를 받아주지 않았다. 국회에서 돌아온 장관을 李 대통령이 불렀다. 任씨는 회고록에서 가까이서 본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老志士(노지사)라기보다는 百獸(백수)를 호령하는 老獅子(노사자)의 인상이었다. 위엄이 몸에 붙은, 鐵(철)의 의지를 가진 達人(달인)이었다. 가까이 가면 나보다 키가 작아 보였는데, 떨어져서 보면 뼈대가 굵어 백발의 몸이 나보다 훨씬 크게 보였다. 악수를 해보니 굵은 손아귀에서 뜨거운 피가 흐르는 듯하였다.>
       대통령이 물었다.
       "君은 오늘 국회에 갔다가 인사를 거절당했다면서?"
       "그렇습니다. 친일파라고 거절당하였습니다."
       "그런 걸 알면서 차관까지 친일파를 임명, 世風(세풍)을 거스르겠다는 건 신중하지 못해. 다른 사람으로 바꾸세요. 李泰鎔은, 姓名(성명)을 보니 우리 집안인 듯한데, 그건 별개 문제요."
       그런 말을 하는 대통령의 표정은 손자를 타이르는 자상한 할아버지 같았다. 자존심이 강한 任 장관도 승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엄격한 얼굴로 돌아온 대통령은 이렇게 덧붙였다.
       "일본 정부는 하와이에 있는 나의 목에 거액의 현상금을 건 적이 있다. 그래서 내가 일본을 싫어한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는 듯해. 그러나 그런 개인문제는 옛날에 잊었어요. 지금 내가 일본과 러시아를 걱정하고 있는 것은, 우리 나라의 장래를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는 그러나, 공산당이기 때문에 어떻든 민주주의에 지게 되어 있어요. 그 정도로 알고 주의만 하면 되어요. 일본은 다릅니다. 미국에 밀착하여 민주주의와 함께 번영할 것입니다. 내가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내려다 본 일본은 산 꼭대기까지 저수지를 만들고, 비탈도 논이었습니다. 밤에 지날 때 내려다 보니 전등불이 끊어지지 않고 산과 평야에 이어졌어. 저렇게 좁은 땅에 저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으니, 오래는 잘 살 수가 없어. 머지 않아 장사나 무엇이든 이름을 빌려 가장 가까운 우리나라로 몰려오게 될 것입니다. 그때야말로 일본을 잘 알고 있는 당신들 親日派가 나라를 지켜야 합니다. 지금은 일단 自重(자중)하시고, 시험대에 오른 君부터 불어오는 바람을 피하는 데 전념하셔야 해요."
       任 장관은 '놀라운 술회였다'고 썼다.
       <그때 근엄하기 짝이 없던 노인의 자세와, 저 멀리 바라보던 노인의 眼光(안광)은 지금도 나의 기억 속에 그대로 살아 있다. 일본인과의 대결에 親日派의 등장을 기대한다는 것은, 日帝시절 그들이 맡았던 곡예사로서의 努苦(노고)를 알아준 부탁이 아닌가? 친일파를 일본의 개(犬)라고 보았다면 일본인이 다시 올 때 그들이 原주인에게 다시 꼬리를 흔들 것이 분명하므로 그런 중요한 일을 맡길 리가 없다.>

       滿軍(만군) 장교 출신 박정희는 정권을 잡자, 日帝 관료-군인 출신들을 요직에 등용, 경제개발과 국가 근대화 사업을 맡긴다. 이들이 일본을 줏대 있게 잘 다루고 일본도 이들을 믿고 한국을 도왔다. 李 대통령의 예언대로 知日派(지일파)로 변신한 親日派 출신들이 한국을 일본에 예속시키지 않고 발전시키는 데 중심이 되었다. 머지 않아 한국의 구매력 기준 1인당 국민소득이 일본을 능가한다고 한다(IMF 예측). 식민지였던 나라가 宗主國(종주국)을 따라잡는 것이다.

       任文桓 씨처럼 식민지 관료 생활을 하면서 日帝와 동포 사이에서 곡예사 역할을 할 수밖에 없었던 이들의 마음고생을 기억함과 동시에 이들이 그때 익힌 기술을 국가 발전에 쓸 수 있도록 도와준 李承晩과 朴正熙의 위대한 안목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다.
       李 대통령이 소련은 공산주의를 하기 때문에 민주주의에 의하여 반드시 망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는 대목도 흥미롭다. 무초 미국 대사는 李 대통령을 이렇게 평하였다.
     
       "그는 의지의 인간이었습니다. 그는 독립투사로 단련된 성격을 국가원수가 되고나서도 바꿀 수 없었습니다. 그는 이성적일 때는 훌륭한 역사적 이해력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는 아주 고차원의 시각에서 복잡한 세계 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했습니다."
     
       한편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관을 엿볼 수 있는 기록을 소개한다.
     
      <대학 시절 나의 비판의식과 사회의식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분은, 그 무렵 많은 대학생들이 그러했듯 리영희 선생이었다. 나는 리영희 선생의 ‘전환시대의 논리’가 발간되기 전에, 그 속에 담긴 ‘베트남 전쟁’ 논문을 ‘창작과 비평’ 잡지에서 먼저 읽었다. …1, 2부는, 누구도 미국의 승리를 의심하지 않을 시기에 미국의 패배와 월남의 패망을 예고했다. 3부는 그 예고가 그대로 실현된 것을 현실 속에서 확인하면서 결산하는 것이었다. 적어도 글 속에서나마 진실의 승리를 확인하면서, 읽는 나 자신도 희열을 느꼈던 기억이 생생하다.> (문재인의 운명 中)
       그가 말한 희열 속에는 월남이 공산화된 데 대한 기쁨도 포함된 것인가?
      
       <친일세력이 해방되고 난 이후에도 여전히 떵떵거리고, 독재 군부세력과 안보를 빙자한 사이비 보수세력은 민주화 이후에도 우리 사회를 계속 지배해나가고, 그때그때 화장만 바꾸는 겁니다. 친일에서 반공으로 또는 산업화 세력으로, 지역주의를 이용한 보수라는 이름으로, 이것이 정말로 위선적인 허위의 세력들이거든요.> (대한민국이 묻는다 中)
       친일파의 눈에 비친 이승만은 과연 사이비 보수이고 허위의 세력인가?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