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7도 날씨에도 시민 1000여 명 참석… "바라던 걸 이루지 못해 안타깝다"
  • ▲ 광화문으로 향하는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운구행렬.ⓒ뉴데일리 DB
    ▲ 광화문으로 향하는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운구행렬.ⓒ뉴데일리 DB
    “돈 필요 없다. 하루 세끼 밥 먹으면 되는데 우리가 1억 받으려고 이때까지 싸워 왔나. 1000억원을 줘도 우린 받을 수 없다. 우리가 해방됐다고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다.”

    1일 오전 8시 40분께 서울시청 앞에서 엄수된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에서 김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하 7도의 추위에도 김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 나온 1000여 명의 시민들은 김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오자 '무거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30여 년간 여성 인권가로 활동한 김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듯했다.

    추모영상 나오자 분위기 '숙연'…옛 일본대사관까지 운구행렬

    서울시청 앞에서의 행사가 끝난 뒤 김 할머니의 운구행렬은 광화문광장을 거쳐 서울시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으로 이어졌다.

    두팔을 벌리고 활짝 웃고 있는 김 할머니의 그림을 실은 트럭과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과 장례위원회 관계자들이 운구차 주변에 서서 운구행렬을 이끌었다. 그 뒤로는 노란색 나비 모양의 깃발을 든 시민들이 뒤따랐다. 나비모양 깃발은 김 할머니가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노란색은 김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색이기도 하다. 이날 김 할머니의 영결식은 ▲묵념 ▲추모영상 ▲할머니 소개 ▲추모사 ▲살풀이 ▲호상 인사 ▲헌화 순으로 이어졌다.

    권미경 학교의료원노동조합 위원장은 “김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을 때 ‘내가 이까짓 암을 이길 수 있다. 일본 사죄를 반드시 받아낼 것’이라고 힘 있게 말씀하셨다”며 “마지막 순간 진통제도 들지 않는 고통 속에서 ‘엄마 너무 아파’라고 외치던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손만 잡아드렸다”고 했다.

  • ▲ 영결식에 참여한 시민들이 운구차를 뒤따르고 있다. ⓒ뉴데일리 DB
    ▲ 영결식에 참여한 시민들이 운구차를 뒤따르고 있다. ⓒ뉴데일리 DB
    참석자들, 日대사관 향해 "공식 사죄하라" 

    운구행렬이 멈춘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은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참석자들은 일본대사관 건물을 향해 “일본은 공식 사죄하라”고 외쳤다.

    한 시민은 “김 할머니의 고통에 공감했고, 그런 아픈, 숨기고 싶은 상처를 딛고 용기 있게 나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이전부터 수요집회에 참석했고 얼마전엔 장례식장에도 갔다. 너무 슬퍼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시민은 “할머니가 바라던 걸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너무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

    운구행렬에는 학생들도 많았다. 학생회에서 나왔냐는 질문에 한 학생은 “학생회에서 나온 거 아니고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거예요”라고 말했다.

    한편 김 할머니는 1926년 태어나 16세 때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부 끌려가게 됐다. 이후 1992년 피해사실을 밝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위안부 피해자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30여년간 여성인권가로 활동했고 2019년 1월 28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