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하 7도 날씨에도 시민 1000여 명 참석… "바라던 걸 이루지 못해 안타깝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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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 필요 없다. 하루 세끼 밥 먹으면 되는데 우리가 1억 받으려고 이때까지 싸워 왔나. 1000억원을 줘도 우린 받을 수 없다. 우리가 해방됐다고 하지만 위안부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우리는 진정으로 해방된 것이 아니다.”1일 오전 8시 40분께 서울시청 앞에서 엄수된 고(故) 김복동 할머니의 영결식에서 김 할머니의 생전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영하 7도의 추위에도 김 할머니의 마지막 길을 배웅하려 나온 1000여 명의 시민들은 김 할머니의 목소리가 나오자 '무거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를 세상에 알리고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30여 년간 여성 인권가로 활동한 김 할머니에 대한 고마움과 아쉬움이 교차하는 듯했다.추모영상 나오자 분위기 '숙연'…옛 일본대사관까지 운구행렬서울시청 앞에서의 행사가 끝난 뒤 김 할머니의 운구행렬은 광화문광장을 거쳐 서울시 종로구 옛 주한일본대사관으로 이어졌다.두팔을 벌리고 활짝 웃고 있는 김 할머니의 그림을 실은 트럭과 진선미 여성가족부 장관과 장례위원회 관계자들이 운구차 주변에 서서 운구행렬을 이끌었다. 그 뒤로는 노란색 나비 모양의 깃발을 든 시민들이 뒤따랐다. 나비모양 깃발은 김 할머니가 나비처럼 훨훨 날아가길 바라는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노란색은 김 할머니가 생전에 가장 좋아했던 색이기도 하다. 이날 김 할머니의 영결식은 ▲묵념 ▲추모영상 ▲할머니 소개 ▲추모사 ▲살풀이 ▲호상 인사 ▲헌화 순으로 이어졌다.권미경 학교의료원노동조합 위원장은 “김 할머니가 암에 걸리셨을 때 ‘내가 이까짓 암을 이길 수 있다. 일본 사죄를 반드시 받아낼 것’이라고 힘 있게 말씀하셨다”며 “마지막 순간 진통제도 들지 않는 고통 속에서 ‘엄마 너무 아파’라고 외치던 순간, 아무것도 할 수 없어 손만 잡아드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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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석자들, 日대사관 향해 "공식 사죄하라"운구행렬이 멈춘 옛 일본대사관 앞에서 시민들은 사회자의 선창에 따라 참석자들은 일본대사관 건물을 향해 “일본은 공식 사죄하라”고 외쳤다.한 시민은 “김 할머니의 고통에 공감했고, 그런 아픈, 숨기고 싶은 상처를 딛고 용기 있게 나서는 모습에 감동을 받았다”며 “이전부터 수요집회에 참석했고 얼마전엔 장례식장에도 갔다. 너무 슬퍼서 자리를 계속 지키고 있다”고 말했다.또 다른 시민은 “할머니가 바라던 걸 이루지 못하고 돌아가셨으니 너무 안타깝다”는 반응을 보였다.운구행렬에는 학생들도 많았다. 학생회에서 나왔냐는 질문에 한 학생은 “학생회에서 나온 거 아니고 동아리에서 자발적으로 나온 거예요”라고 말했다.한편 김 할머니는 1926년 태어나 16세 때 일본군에게 속아 위안부 끌려가게 됐다. 이후 1992년 피해사실을 밝히고 전 세계를 돌아다니면서 위안부 피해자 인권과 명예회복을 위해 30여년간 여성인권가로 활동했고 2019년 1월 28일 향년 92세의 나이로 유명을 달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