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역사, 자유시를 가다 ③] 참변의 前史 : 독립군은 왜 ‘자신들의 무덤’ 급수탑으로 향했나
  • ▲ 러시아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러시아 이르쿠츠크 5군단 거리.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자유시 참변을 서술해보시오.>

    이같은 질문을 받는다면, 자신 있게 답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나 역시 '자유시 참변 역사 기행'이 아니었다면, 기껏해야 한두 줄 정도로 답안지를 마무리했을 게 뻔하다. ‘1920년대 러시아 어딘가에서 있었던 일’이 내가 쓸 수 있는 전부였다. 또래 2030에게 물어봐도 대부분 ‘옛날이야기네’ ‘들어 본 것 같은데, 잘 모르겠다’는 반응이었다. 역사 인식의 현주소다. 5초 안에 답이 떠오르지 않은 사람은 이 글을 끝까지 읽도록 하자. 

    구글에 공개된 자료들 역시 부분적이거나 엉성하다. 살펴보니 자유시 참변은 주로 독립군의 내전 혹은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기술돼 있었다. 자세하게 파고들어도 '고려공산당 상해파와 이르쿠츠크파가 자유시로 모인 독립군 통수권을 놓고 경쟁하다 벌어진 비극' 정도로 그려졌다. 자유시 참변은 정말 내전이었는가?  

    <자유시 참변 청년 역사 기행 단장> 조형곤 21C미래교육연합 대표는 자유시 참변을 동족상잔의 비극으로만 기억하는 것은 일종의 역사 왜곡이라고 주장한다. 조 대표의 말을 들어보자.

    “자유시 참변은 소련 공산당에 의해 총병력 3,500에 달했던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된 사건이다. 소련 정부는 자국의 이익을 위해 일본과 밀약을 맺고 독립군을 학살했다. 이것이 진실이다. 그러나 좌파 역사학계는 참변의 원인을 독립군의 내부 분열로 규정지으려 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자유시 참변은 공산주의자들의 이중성을 몰랐던 독립군이 소련 레닌 정부에 이용당하고, 이용 가치가 없어지자 몰살된 비극이다. 일본까지 넣어 정의한다면 소련과 일본의 합작으로 탄생한 ‘독립군 기획 학살’이다. 

    ‘독립군’은 왜 자유시로 갔나? 

    자유시 참변을 이해하려면 1920년대 전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1920년은 독립군이 가장 빛나던 시절이었다. 

    1920년 6월, 홍범도와 최진동·안무 등 한국독립군 연합부대는 간도 지방 삼둔자와 봉오동 일대에서 일본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이들은 '매복 작전'으로 일본군 157명을 사살하고, 300여 명에게 중경상을 입혔다. 이 전투에서 승리하며 소총과 탄약 등 군비를 노획했다. 
  • ▲ 1920년 항일 무장 독립군의 청산리전투 승리 기념 사진. 맨 앞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1920년 항일 무장 독립군의 청산리전투 승리 기념 사진. 맨 앞에 앉은 사람이 김좌진 장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같은 해 10월 21~26일, 김좌진과 서일이 이끄는 '북로군정서'와 봉오동 전투의 공신 '독립군연합부대'가 청산리 일대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여 일본군을 크게 무찌른다. 독립군은 6일간의 전투에서 일본군 1200여명을 섬멸했다. '청산리 전투'는 항일 무장투쟁 사상 최대의 성과였다. 

    이를 계기로 일본군은 독립군 근거지를 초토화하기 위해 만주에서 '학살작전'을 전개한다. 일본군은 그해 10~11월 2개월 동안 북간도의 8개 현에서 한인들을 학살한다. 간도 일대의 한인 3,600여 명이 피살됐고, 3,200여 채의 가옥과 41채의 학교, 16채의 교회가 불탔다. 이 사건을 간도 참변 또는 경신(庚申) 참변이라 부른다. 

    독립군은 일본군의 무차별적인 토벌을 피해 소련령인 연해주 이만지역(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한다. 연해주 지역에 모인 독립군들은 반격을 위해 서일을 총재로 세우고 단일 지도부인 대한독립군단을 창설한다. 이때의 총병력은 3,500여 명으로 추산된다. 독립군 사상 가장 큰 규모의 군대였다. 

    이들은 대한독립군단의 근거지를 소련령에 구축하고, 전열을 정비할 시간을 갖는다. 무장력을 강화하고 간도와 한국으로 진출해 독립운동을 이어간다는 계획이었다.
  • ▲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에 걸린 레닌 그림.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하바롭스크 향토박물관에 걸린 레닌 그림.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약소국의 독립군 소비에트 공산당과 손을 잡다 

    그러나 반년 만에 자유시 참변이 발생해 독립군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비극은 소비에트 공산당 세력이 소련령에 들어온 독립군에 접촉하며 시작됐다. 1917년 ‘소비에트 공산 혁명’이 발생한 뒤 러시아에선 소비에트 적군과 백군(소비에트 혁명 반대 세력)의 내전이 시작됐다. 독립군이 소련령에 머물던 1920년대는 러시아 내전이 극으로 치달을 무렵이었다. 

    한동안 수세에 몰리던 소비에트 적군은 백군을 무찌르기 위해 한국 독립군 세력을 끌어들인다. 적군은 온갖 달콤한 말로 독립군을 회유한다. 소비에트 적군의 수장 레닌은 당시 민족자결 원칙을 내세우며 약소민족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적군은 독립군에게 신식 무장까지 약속한다. 자금력이 없던 독립군은 적군의 제안을 거절하기 힘들었다. 많은 독립군이 적군에 가담한 이유다. 홍범도 장군에게도 적군이 끈질기게 접근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또 당시 일본이 러시아 백군을 돕고 있었기 때문에, 독립군은 적군편에 섰다. 독립군의 눈에는 일본에 총구를 겨누고 있는 적군이 ‘동지’였다. 자연스레 적군-독립군 대(對) 백군-일본군의 대결 구도가 형성됐다. 적군은 표면적으로 약소 민족 지원을 내세워 독립군과 공동 전선을 구축한 셈이다. 

    그러나 1921년, 적군이 난데없이 입장을 바꾼다. 적군이 우위에 올랐고, 백군은 궤멸 직전이었다. 적군은 더이상 독립군의 힘을 빌릴 이유가 없었다.

    때마침 소련 정부가 일본과 북경에서 밀약을 맺게 됐다. 일본은 소련에게 캄차카만 연안 일대의 어업권을 주는 대가로 소련 영내 한국 독립군의 무장 해제를 요구했다. 

    소련 정부는 '소련은 자국 영토 안에서 일본에 대해 적대행위를 하는 한국독립군을 육성하거나 보호자 않는다'는 합의서에 사인했다. 

    그렇게 소련 정부는 1921년 6월 22일,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를 내린다. 무력도 허용했다. 레닌의 적군은 6월 28일 2대의 장갑차와 30여 문의 기관총을 앞세우고 자유시에 있는 독립군을 공격했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이다. 

    자유시 참변의 결과는 자유시 기행 1편(100년 전 그날, '자유시'의 급수탑은 피로 물들었다) 에서도 기록했듯, 사망 272명,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천여명이다.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 참고.

  • ▲ 러시아 스보보드니의 수라세프카역.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곳이다.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러시아 스보보드니의 수라세프카역.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이 일어났던 곳이다.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자유시 참변은 왜 ‘내전’으로 기록됐는가

    공산제국주의 소련에 의해 소련을 위해 독립군이 학살됐는데, 왜 자유시 참변은 내전으로 기록됐는가. 소련 공산당이 자신들의 계획을 철저하게 숨겼기 때문이다. 소련은 한인공산당을 배후에서 조정하며 계획을 꾸몄다. 

    그 과정에서 이용당한 집단이 '고려공산당'이다. 기록에는 자유시 참변은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대(對) 고려공산 상해파 간의 대립투쟁으로 나온다. 오하묵이 있던 이르쿠츠크파와 이동휘가 있던 상해파가 독립군 지휘권을 놓고 투쟁을 벌이다 오하묵이 배신한 것으로 서술한다. 이것 역시 역사적 사실이다. 그러나 표피에 불과하다. 진피로 들어가지 못한 역사다.

    ‘캄차카 반도를 둘러싼 소·일 밀약’을 통해 이미 독립군 해산을 결정한 레닌 정부는, 이르쿠츠크파 군정부장 오하묵의 욕망을 이용한다. 독립군 지휘권을 손에 넣으려는 이르쿠츠크파 공산당을 꼭두각시로 세워 독립군을 학살한 사실이 역사의 진피다. 고려공산당의 내분은 소련이 학살 책임에서 빠져나가기 위한 '변명'이었다. 

    실제로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 적군 산하 단체였기 때문에, 레닌 정부의 승인 없이 독자적으로 자유시 참변을 일으킬 수 없었다. 

    여기서 질문이 하나 생긴다. 실제로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대립은 한인 사회의 분열일까? 이르쿠츠크파와 상해파의 본질을 보면 내전이 될 수 없다. 상해파는 본디 조선에서 생긴 자생적 공산주의 단체로, 한인 사회라고 볼 수 있다. 고려공산당 '상해파'의 뿌리는 코민테른의 인정을 받은 유일한 조선공산주의 당인 '한인사회당'이다. 상해파는 '공산주의자'로 이루어진 단체는 맞지만, 목표가 독립에 있었다. 독립된 조국에서 공산주의를 이루고 싶었던 사람들이다.

    반면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는 다르다. 이르쿠츠크파는 러시아 공산당의 민족별 별동조직으로 러시아 정부 산하 기관으로 보는 것이 맞다. 이들은 공산주의 종주국인 러시아를 위해 일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원과 일반 주민을 상대로 정치사상교육 및 볼셰비키정책 침투에 힘썼다. 오하묵은 탯줄을 러시아 우수리스크에서 자른 사람이다. 귀화한 러시아인이다. 조직 대부분이 러사아로 귀화한 한인들로 구성됐다. 팩트 체크를 해보자면, 고려공산당이란 단체에서 파가 두 개로 갈라진 것이 아니다. 원래부터 결이 다르게 세워진 두 단체가 모두 고려공산당이란 이름을 사용하면서 편의상 고려공산당의 무슨무슨파로 구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든, 결과적으로든 이르쿠츠크파는 공산제국 건설을 위해 상패하는 독립을 위해 싸운 꼴이 됐다. 자유시 참변을 내전으로 보는 것은 러시아 혁명에 충성한 사람과 독립에 충성한 사람 모두를 한국독립군으로 부르게 되는 위험한 해석일 수 있다. 러시아 소속 군인으로 일본과 대항했던 북한 김일성이 나름 '항일'을 했다는 이유로 마치 조선 독립을 위해 싸운 것처럼 비춰지는 왜곡을 낳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