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림받은 역사, 자유시를 가다 ②] 볼셰비키-일본, 캄차카 연안 어업권 거래하며 학살 '밀약'
  • ▲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역사에 정차해 있다.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러시아 시베리아 횡단 열차가 역사에 정차해 있다.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지난해 12월 27일, 독립군 발자취를 찾는 청년 역사 기행단에 합류했다. 10박 11일 동안 1920년대 연해주에서 활동한 독립군의 이동 경로를 쫓았다. 정확하게는 1921년 6월 28일 '자유시 참변' 전후사를 따라갔다.

    떠나기 두 달 전쯤 조형곤 21C미래교육연합 대표의 취재 제안이 있었다. 조 대표는 전화를 걸어 "강 기자, 시베리아 횡단열차 타고 러시아 갑시다"라며 "자유시 참변 역사가 너무너무 중요해"라고 말했다. 그날 조 대표는 "자유시 참변 이후로 무장한 3,500명 독립군이 와해됐다"며 "보수우파 진영이 다뤄야 할 너무너무 중요한 역사"라고 강조했다. 

    마침, 김용삼 전 월간조선 편집장의 책을 통해 자유시 참변 역사에 얽힌 불편한 진실과 마주한 참이었다. 그는 저서에서 "소련 볼셰비키 정부는 일본과 비밀리에 협정을 맺고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는 조건으로 민족주의적 성격이 강한 대한독립군단을 자유시로 끌어들여 와해시키고 극동 시베리아지역 통치권을 장악했다. 결국 한인 독립군과 한인 공산주의자들이 조직한 무장 세력은 공산주의 종주국 소련에 의해 처절한 배신을 당한 셈이다. 이것이 자유시 참변의 진실이다"라고 밝혔다. 사실이라면 자유시 참변은 기획 학살이었다. 조 대표에게 "이번엔 꼭 가겠다"고 약속했다. 역사 기행을 하며 새롭게 알게된 사실이지만, 소·일 사이에는 이보다 더 충격적인 밀약이 숨겨져 있었다.  

    조국을 위해 독립군이 참아야 했던 것들… 추위 그리고 죽음  
    러시아의 한겨울은 기온이 영하 40도까지 떨어진다. 허리 높이까지 오는 큰 여행용 가방에 핫팩, 귀도리, 내복 2벌, 털모자, 수면 양말, 목티 등 방한용품을 바리바리 챙겼다. 시베리아의 살벌한 추위가 걱정돼, 거위 털이 빵빵하게 들어간 롱패딩과 부츠까지 구매했다. 완전 무장했지만, 한국과 차원이 다른 추위에 컨디션 난조 현상이 이어졌다. 돌아오는 날까지 코에 피딱지가 생기고 목에 가래가 끓어 고생했다.  

  • ▲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러시아 이르쿠츠크의 눈 덮인 자작나무 숲.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러시아에 머무는 동안 평균 온도는 영하 30도를 웃돌았다. 머리카락에 입김이 닿으면 그대로 얼어버렸다. 추위가 몸을 짓누른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추위는 러시아에서 느낄 수 있는 극강의 추위는 아니라고 했다. 아주 추운 날엔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고 하니, 체감온도는 영하 60도쯤 될까. 독립군이 일본군 토벌을 피해 러시아령인 연해주로 이동했던 시기도 이맘때였다. 

    1920년 6월부터 10월까지 우리 독립군은 간도 지역에서 일본군을 상대로 대승을 거둔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들어봤을 봉오동·청산리 전투가 이 해에 일어났다. 당시 수적으로 열세한 독립군에게 죽은 일본군 숫자는 못 잡아도 1,000여 명 이상이었다. 중경상을 입은 일본군까지 합하면 1,500여명의 사상자가 생겼다. 

    독립군들, '간도참변' 이후 연해주로 이동
    약이 오를 대로 오른 일본군은 간도 지방에서 대대적인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편다. 이것이 '간도참변' 이다. '경신참변'으로 부르기도 한다. 이때 3,600여 명의 한인들이 간도에서 피살됐다. 독립군도 근거지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살아야 독립도 가능하지 않나. 간도에 머물던 독립군은 점차 북상해 처음엔 소·만 국경 지역인 밀산(密産)에 주둔했고, 곧 국경을 넘어 연해주의 이만(현재 지명 달네레첸스크)으로 이동했다. 이때가 러시아의 본격적인 추위가 시작되는 12월과 1월이었다. <자유시 참변 청년 역사 기행단>도 이때를 맞춰 출국했다. 

    1921년 1~3월, 한국 독립군은 변변치 않은 군복을 입고 한겨울의 산을 넘고 강을 건너 연해주 땅으로 갔다. 독립군이 '소련제 군복'을 구해 입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그것도 지휘관들이나 제대로 갖춰 입을 수 있었을 것이다. 이들은 녹초된 몸으로 눈산을 넘을 때면 골백 번도 더 '그냥, 허물어져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 ▲ 대한독립군이 간도에서 러시아령으로 이동하며 건넜던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우수리강'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대한독립군이 간도에서 러시아령으로 이동하며 건넜던 러시아 우수리스크의 '우수리강'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기행 기간 약 한 시간 정도 얼어붙은 강 위에 서 있을 기회가 있었다. 기행단은 자유시 참변 당시 독립군이 총탄을 피해 뛰어들었던 제야강에서 위령제를 지냈다. 제야강은 추위에 얼어 있었고, 얼마나 단단하게 얼었던지 승용차들이 쌩쌩 달려도 끄떡없었다. 한 시간 서 있었을 뿐인데 몸이 꽁꽁 얼었다. 그야말로 동태가된 기분이었다. 한기가 꽉 들어차서 하루 이틀이 지나도 몸이 으슬으슬했다. 

    시베리아 횡단 열차 안, 창밖엔 정말 사람 발자국 하나 나지 않은 설원이 아득하게 펼쳐져 있었다. 눈의 바다다. 눈이 얼마나 내렸는지 아파트 3층 높이쯤 돼 보이는 길쭉한 나무들이 눈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반쯤 휘어져 있었다. 감상도 잠시, 열차는 철로 위에서 덜컹 거렸고, 자유시를 향해 걷던 독립군들의 기나긴 행렬이 떠올라 숙연해지곤 했다. 1921년, 독립군의 적은 사방에 있었다. 일본, 추위, 외로움_. 그리고 공산주의.  

    러시아는 워낙 추워서 눈이 한 번 내리면 잘 녹지 않는다고 한다. 실제로 러시아 숲속에서 눈길을 걸어봤는데, 종아리가 절반쯤 눈에 파묻혔다. 독립군도 발이 푹푹 빠지는 눈길을 걷고 또 걸었겠지. 끝이 안 보이는 하얀 설원이 아름답기보다는 경악스러웠을지도_. 사람 체온에 녹은 눈이 처음엔 발바닥을 간지럽혔겠지만, 곧 감각을 앗아갔을 것이다.   

    1월 1일, 러시아의 파리라 불리는 이르쿠츠크에서 스보보드니행 열차를 탔다. 이르쿠츠크에서 시베리아 횡단 철도(TSR)를 타고 2,325km를 달려야 스보보드니가 나온다. 횡단 열차를 타고도 꼬박 이틀(50시간)을 가야 하니 대단한 거리다. 한반도 최남단에서부터 최북단까지 약 1,146km 정도인데, 여기는 도시와 도시 사이가 그 두 배쯤 되니 러시아의 영토 크기를 짐작해 볼 수 있다. 러시아 극동지역인 블라디보스토크에서부터 모스크바까지는 7,400km다.  모든 역에서 정차하는 건 아니지만, 850개의 역이 있다 한다.  

  • ▲ 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 모습.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시베리아 횡단열차 내부 모습. ⓒ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자유시 참변 후 열차 타고 유랑했을 생존 독립군들
    시베리아 횡단 열차는 1등칸, 2등칸, 3등칸으로 나뉜다. 우리는 2등칸을 타고 이동했다. 2등칸은 4인 1실이다. 한 호실 안에는 2층 침대가 2개 들어가 있다. 열차는 굉장히 비좁다. 1층은 침대 아래쪽에, 2층은 호실 입구 쪽 천장에 짐칸이 있다. 좌석 벽면에 수건, 세면도구 등 간단한 물건을 보관할 수 있는 장소가 따로 있다. 승무원들은 취침 시간에 맞춰 오후 9-10시 사이에 전 객실의 형광등을 끈다. 물론 주광색의 보조등이 객실마다 설치돼 있고, 개인 조명도 있다. 열차는 복불복이라, 신식 열차와 구식 열차가 섞여 있다. 신식 열차는 1,2층 모두 각자 USB 충전 코드와 콘센트가 있다. 구형 열차는 객실 안에 콘센트가 없는 경우도 있다. 1층 창가 쪽에는 접이식 식사 테이블이 하나 있다. 

    여행 기간 기행단끼리 4인 1실을 써서 불편하지 않았지만, 스보보드니에서 하바롭스크로 이동하며 딱 하루 러시아 현지인과 객실을 썼는데 정말 불편했다. 하필 2층이 걸려서, 사다리를 타고 오르락내리락 할 때마다 1층 현지인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 같아 찜찜했다. 그래서 침대에서 잘 안 내려오고, 화장실도 웬만하면 안 갔다. 식사 시간도 1층 승객의 시간에 맞춰서 했다. 테이블을 사용하려면 어쩔 수 없이 1층 침대를 의자로 이용해야 하기 때문이다. 

    열차 한 칸에는 90도 이상의 뜨거운 물을 받을 수 있는 온수기가 있다. 온수기 앞에는 승무원실이 있다. 여기서 러시아식 도시락 라면이나 감자수프, 초콜릿 같은 식사류와 주전부리를 구매할 수 있다. 횡단열차 기념품도 있다. 승무원들은 시간마다 객실을 돌며 물품을 강매한다. 사라고 할 때 안 사면 승무원에 따라 '불친절'한 경우도 있어 주의해야 한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는 젊은이들과 전 세계 배낭여행족의 버킷리스트라고 한다. 전 세계인의 낭만을 싣고 달리는 기차라고나 할까. 그러나 한국 사람들에겐 마냥 낭만 가득한 기차는 아니다. 스탈린이 연해주 한인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이주시킬 때 이 철도를 이용했다. 자유시 참변 이후 적군의 포로가 된 한국 독립군이 횡단열차를 타고 러시아 전국 각지로 흩어졌을 것으로 추측한다. 

    1910~1920년대 러시아 공산 혁명 시기를 배경으로한 '닥저 지바고' 같은 영화를 보면 독립군이 탔던 기차 내부가 얼마나 열악했는지 잘 나온다. 열차 안은 독일의 유태인 수용소나 축사를 연상케 한다. 

    조형곤 대표가 열차 안에서 자유시 참변 이야기를 꺼낸 것도 이때문이다. 조 대표는 청년들이 역사를 무작정 욱여넣는 것보다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탔던 열차는 독립군이 탔던 열차와는 눈꼽만큼도 비슷한 구석이 없었지만…. 기행단은 기차 식당칸에 모여 각자 맥주 하나씩을 앞에 놓고 대화를 이어갔다. 

    조형곤 대표는 자유시 참변으로 대한독립군단이 와해되고 3·1운동 직후 고조된 반일무장투쟁의 열기가 한풀 꺾였다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독립운동의 맥이 뚝 끊겨 버린 것"이라고 했다. 

    조 대표가 자유시 역사 기행을 기획한 것은 2016년부터다. 어느 해는 시베리아를 가로질러서, 어느 해는 중앙아시아를 따라서 독립군의 발자취를 추적했다. 그가 몇 해째 자유시를 방문하고 있는 이유는 대부분 자유시 참변의 실상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기행에서 돌아와 주변인들에게 '자유시 참변을 아느냐'고 물으면, '모르겠다'는 사람이 5명 중 3명쯤 됐다. 2명 정도는 '독립군 이야기 아니냐'라는 식이었다. 기행단 청년들도 여행을 떠나기 전까지 이런 역사가 있는지 잘 몰랐다고 했다. 

    달리는 횡단열차 안, 조형곤 대표가 들려준 자유시 참변 이야기는 무참했다. 힘없는 조국마저 잃은 백성의 최후가 너무 비참했다. 입술만을 꽉 깨물었다. 단원들 모두 답답한 속을 달래려 앞에 놓인 맥주만 벌컥벌컥 들이켰다. 조 대표의 강의가 계속될수록 다들 '와... 그런 사실이 있는지 몰랐어요' 같은 반응이 나왔다. 

  • ▲ 독립군 훈련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캡처
    ▲ 독립군 훈련 모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캡처
    신식 무기 주겠다는 레닌 정부의 말 믿었지만...

    가장 충격적인 것은 소련과 일본이 밀약을 통해 자유시 참변을 기획했다는 사실이었다. 

    "자유시 참변의 실상은 러시아가 일본에 캄차카반도 연안 어업권을 받는 조건으로, 일본이 요구한 독립군 해산을 약속하면서 생긴 참극이다. 우리 독립군은 신식 무기로 무장해주겠다는 레닌 정부의 약속만 믿고 자유시로 왔는데, 소련 공산당이 일본과 밀약 후 독립군을 배신했다. 그래서 자유시 참변 같은 살상극이 벌어졌다." 조형곤 대표의 설명이다. 

    자유시 참변이 있던 1921년 6월 28일 소련 적군(붉은 군대)과 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대대는 기관총과 장갑차를 대동해 자유시에 주둔 중인 독립군 학살을 감행한다. 그야말로 '개죽음'이었다. 보통 자유시 참변을 독립군 통수권을 놓고 싸우던 한인 지도자들의 내전으로 알고 있지만, 이는 수박 겉핥기식으로 역사를 알고 있는 것이다. 

    조 대표는 “대한독립군은 자유시에서 독립운동의 전환점을 만들려 했다. 그래서 적군 편에 가담했다. 이들은 나중에 러시아 내에 자치주를 보장받을 생각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의 배신으로 물거품이 됐다"며 "자유시는 만주로, 간도로, 연해주로, 상해로 흩어져있던 우리 독립군이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다같이 모인 곳이 됐다"고 설명했다. 

    자유시 참변으로 총병력 3,500명 규모의 독립군이 와해됐다. 자유시에 사망하거나 행방불명된 독립군은 500여명이지만, 1,000여명 이상이 소련 적군의 포로가됐다. 이들은 공산혁명을 위해 총을 들어야 했다. 가까스로 탈출해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든 사람도 있었지만, 두 번 다시 자유시에 모였던 규모의 무장 독립군이 결성되지 않았다. 

    조 대표는 "독립군의 진짜 원수는 공산주의자다"라며 "그러나 좌파 학계는 자유시 참변을 고집스럽게 한인 독립군의 내부 분열로 몰아갔다"고 했다. 그러면서 "공산제국주의에 희생된 독립군의 비참한 역사를 알려야 한다"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조 대표는 이렇게 말했다. 

    "이제 청년들이 공산주의와의 지긋지긋한 100년 전쟁을 끝내야 한다. 지금도 한반도 이북에는 한국 국민들을 포로로 잡고 있는 북한 공산 정권이 있다. 자유시 참변 이후 대한민국은 약 100년 동안 공산제국주의와 싸우고 있는 셈이다. 이번 기행을 '공산제국주의와의 100년 전쟁을 끝내자'라는 주제로 기획한 것도 이때문이다." 
  • ▲ 대한독립군단 서일 총재(1881년 ~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와해된 이후 동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캡처
    ▲ 대한독립군단 서일 총재(1881년 ~ 1921년). 자유시 참변으로 독립군이 와해된 이후 동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진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캡처
    조 대표가 들려준 '자유시 참변, 그 후' 이야기는 더 비참했다. 

    대한독립군단 서일 총재는 자유시 참변을 막지 못한 죄책감에 어느 마을 뒷산에서 스스로 호흡을 끊어 자진했다. 서일은 홍범도·지청천 등 일부 대한독립군단이 자유시로 들어갈 때 따라가지 않았다. 김좌진 장군과 회군해, 다시 밀산 일대로 돌아왔다. 서일 총재는 김좌진 장군과 함께 청산리전투를 진두지휘할 만큼 뛰어난 장군이었지만, 3,500명의 동지를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을 견디지 못해 죽었다. 

    40년을 조국 독립을 위해 불꽃같이 살다간 서일, 그의 유언은 절규에 가까웠다.

    “조국 광복을 위해 생사를 함께 하기로 맹세한 동지들을 모두 잃었으니 무슨 면목으로 살아서 조국과 동포를 대하리오. 차라리 이 목숨을 버려 사죄하는 것이 마땅하리라.”

    봉오동 전투 영웅인 의병장 홍범도 장군도 중앙아시아 시골 마을인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했다. 

    그는 자유시 참변 이후 일단 살아남아야 항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하고 소련 적군 25군단 조선인 여단의 지휘관으로 승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소련이 고려인 배제정책을 시작하면서 1923년 군복을 벗었다. 이 또한 제국주의 소련과 일본이 서로 상대국가 치안을 해치는 행동을 금지하기로 약속하면서 생긴 일이었다. 

    카자흐스탄 알마티에서 고려인 관련 장편소설을 집필 중인 고려인 작가 정장길(鄭長吉. 65)씨는 홍범도 탄신 140주년을 맞아 그간 소장해온 `레닌기치'(현 고려일보 전신. 1938년 창간, 1990년 폐간)의 홍 장군 관련기사를 공개한 적이 있다. 이는 홍범도 장군이 카자흐에 정착해 현지에서 사망했다는 역사적 사실을 세부적으로 뒷받침하는 증거였다. 

  • ▲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캡처
    ▲ 1920년 봉오동 전투를 이끈 홍범도 장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캡처
    카자흐 크질오르다에서 발행된 레닌기치는 홍 장군의 탄신 100주년인 1968년 8월27일자 특집기사에서 "자유시 참변이 발생한 1921년 6월28일 이후 홍범도 장군은 휘하 병력 약 300명을 이끌고 이르쿠츠크 소련군 제5군단 합동민족여단 대위로 편입됐다"고 했다. 

    당시 레닌기치 기자로 일했던 정씨는 홍범도 장군이 1921년 소련 적군과 일제 및 러시아 백군(볼셰비키 반대 세력)간에 치열한 전쟁이 벌이던 시기에 적군이 홍 장군에게 소련군 편입을 강요했다는 사실을 밝혔다. 

    또 소련 적군이 당시 홍 장군의 독립군 부대 외에 연해주로 피신해온 5천여명의 여러 독립군 부대에 대해서도 "우선 소련 적군과 손잡고 일제ㆍ백군과 싸우면 차후에 조선 독립운동을 지원하겠다"며 적군 휘하 편입을 압박한 것으로 드러났다. 

    그다음은 우리가 아는 대로 소련군은 일본과의 밀약을 이행하기 위해 1921년 6월28일 '자유시 참변'을 일으켜 독립군을 제거한다. 

    이방땅, 고려인 극장 야간 수위로 생을 마감한 홍범도 장군. 홍 장군은 그가 아꼈다는 소총 대신 관람객을 세는 싸구려 계수기 한 대를 들고 생을 마감했다. 간도 산악을 누비며 일본군을 대파했던 공로도 제대로 인정받지 못한 채 이 땅을 떠났다. 그것이 힘없는 조국을 둔 장군의 마지막이었다. 세계공산주의 건설이라는 달콤한 구호 뒤로 제국주의 야욕을 숨긴 소련의 이중성을 간파하지 못한 우리 독립군의 극단적 현실이었다.

    조 대표의 역사 강의가 끝났지만, 러시아의 새하얀 설원은 끝나지 않았다. 러시아 땅에 떨어진 독립군의 피 이야기. 그리고 겨울 설원, 설원은 무참했고 모순적이었다. 하얀 설원에서 태동한 붉은 혁명이라는 모순. 러시아 땅에서 흘러간 한국의 역사는 아름다웠지만 동시에 비참했고, 뜨거웠으나 가장 차갑게 끝났다는 모순. 내가 사랑하는 대문호 톨스토이와 도스토예프스키, 천재 피아니스트 라흐마니노프, 꿈과 사랑을 그린 샤갈과 같은 걸출한 예술가를 배출하고도 공산주의의 병적인 가난함을 벗어나지 못한 러시아의 모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