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뻔뻔스러움에 대하여

    뻔뻔스럽다. 뻔뻔스럽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나는 수치심을 느낄 필요가 없다고 느끼는 마음가짐이다. 왜? 나는 너무 잘났으니까. 나는 올바름 그 자체이니까. 나는 초월자니까. 그래서 나는 다른 모든 자들에게 적용되는 객관적 율법이나 도덕률에 매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군왕(君王)은 무치(無恥)라 했듯이.

     그들은 20대부터 이미 자신들을 정의의 사도라고 자처했다. 그들은 정말로 그런 거룩한 기분에 들떠 있었다. 그들이 싸운 상대방을 그들은 ‘악마’라고 확신 한 그 만큼 그들은 자신들이 정의의 투사라고 여겼다. 이른바 성전(聖戰) 사상이었다. 그들은 신흥종교를 만들고 믿었던 것이다.

     신흥 유사종교의 특징은 자기들 집단 밖의 세상은 악귀(惡鬼)의 세상이라고 보는 확증편향이다. 그들은 가족도 멀리한 채 자신들만의 밀폐된 비밀결사를 만들어 구루(guru, 師父)의 지도 아래 주문을 외우며 새 하늘 새 땅이 오기를 고대했다. 더러는 밖의 악한 세상을 무자비하게 처단하는 자살 폭탄테러도 자행한다.

     이런 그들은 밖의 사악한 세상에 대해서는 그 어떤 부도덕을 저질러도 괜찮다는 터무니없는 오만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이래서 그들은 ‘내로남불’ 교도(敎徒)이기도 하다. 그들의 뻔뻔스러움은 그래서 생겼다. 나는 무슨 짓을 해도 그것은 정의구현의 수단이고, 그래서 그것은 정당화된다는 것이다. 나는 초월자이기 때문에 무슨 짓거리를 해도 괜찮다...일종의 초인(超人)의식, 특권의식 같은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이젠 모든 걸 다 잃고 있다.

    최근의 일련의 뻔뻔스러움 시리즈가 이 점을 말해준다. 그들은 우선 억울하게 당하는 약자(弱者)라는 특권을 잃은 지 오래다. 그들은 민주투사가 아니라 자유를 삭제한 민주주의, 즉 전체주의적 민주주의 투사였다는 정체도 드러났다. 그들은 부패한 기득권 집단이라는 사실도 드러났다. 그들은 이젠 정의롭기는 고사하고 지극히 뻔뻔스러운 집단이라는, 자신들이 쌓은 도덕적 마지노선마저 상실했다. 어떻게 이런 뻔순이, 뻔돌이들이 연속극처럼 튀어나올까?

    그러나 그들은 갈수록 거칠어지고 있다. 게거품을 물며 “아니다,”라고 궤변을 토한다. 이 뻔뻔스러운 혁명집단을 어찌할 것인가? 뻔뻔스러움이여, 너의 정체를 국민은 언제나 깨칠 것인가? 저들을 지지하는 숫자가 아직도 반(半)은 되니 말이다.

     낭만에 대하여,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를 부른 우리들의 가수 최백호는 노래하라, 뻔뻔스러움에 대하여...

    류근일 / 전 조선일보 주필/ 2019/1/27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