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5년, 1958년, 1996년 무력시위 때마다 ‘대만 독립’ 주장 세력에 도움 돼
  • ▲ 지난해 11월 대만 지방선거 국민당 돌풍의 주역 한국유 (韓國瑜, 한궈위) 가오슝(高雄)시장의 취임식 선서 장면. ⓒ허동혁
    ▲ 지난해 11월 대만 지방선거 국민당 돌풍의 주역 한국유 (韓國瑜, 한궈위) 가오슝(高雄)시장의 취임식 선서 장면. ⓒ허동혁
    지난 11월 27일 미 해군 구축함 두 척이 ‘자유항행작전’이라는 이름으로 대만해협을 지나갔다. 사우스차이나 모닝포스트(SCMP)는 당시 이를 “2018년 7월과 10월에 이어 세 번째 작전”이라고 보도했다.

    美해군 구축함의 대만해협 통과는 1995~96년 ‘제3차 대만해협 위기’ 이후 22년 만의 군사행동이다. 대만과 중국, 미국과 중국 간 군사 충돌 우려가 생기면 ‘대만해협위기’라 부른다. ‘제3차 대만해협 위기’는 1995년 7월 당시 대만 리덩후이(李登輝) 총통이 모교인 美코넬大에서의 강연을 위해 미국에 신청한 비자가 발급되자 이에 격분한 중국이 대만 해협에서 두 차례의 미사일 시험 발사를 하면서 촉발됐다.  

    제1차 대만해협 위기(1955년)는 중공군과 국민당군의 中절강성 타이저우(台州) 앞바다 다첸 군도(大陳 群島) 공방전을 일컫는다. 1949년 中공산당은 본토를 점령한 뒤 한국전쟁에 참전하느라 국민당 군이 잔류한 중국 연안 도서지역을 방치하고 있었다. 1953년 한국전쟁이 휴전된 뒤에야 이들 지역으로 눈을 돌렸다. 국민당군은 공방전 끝에 3만여 명에 달하는 다첸 도민과 군인들을 대만으로 무사히 철수시켰다. 국민당 장제스 총통은 자신의 고향(절강성 시코우-溪口)과 가까운 다첸 군도에 애착을 보이며 사수하려 했으나, 이를 고집하면 국민당 지배 하의 복건성 샤먼(廈門) 앞바다 킨멘(金門)섬이 위험해진다는 미국 군사고문단의 설득에 따라 애통해 하며 철수를 결정했다고 전해진다.

    제2차 대만해협 위기(1958년)는 복건성 킨멘섬에서 벌어진 국민당군과 중공군 간 포격전을 말한다. 중공군의 선제 포격에 대해 존 덜레스 美국무장관이 비난 성명을 내놓자 국민당군이 곡사포와 군함, 전투기를 동원해 반격에 나서 큰 전과를 거뒀다.

    이어 미국이 중국 샤먼에 대한 핵공격을 검토하고, 이를 탐지한 소련 흐루시초프 서기장이 당시 소련과 소원한 관계에 있던 중국에게 ‘미소 간의 핵공격을 촉발하지 말라’고 경고하자 중국은 꼬리를 내렸다. 이후 중공군은 등소평이 완전 집권하는 1979년까지 킨멘의 야산을 표적으로 매주 3회 정기적으로 포격을 가했지만, 이는 적대 행위를 과시하는 공포(空砲)에 불과했다. 이때 킨멘 방어 성공으로 국민당군은 대만 해협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장악했고, 현재 대만의 존재가 가능했다는 평가가 있다.

    中공산당, 대만 위협했다 반중 정당 당선 도와줘

    제3차 대만해협 위기는 1996년 3월 치러진 대만 최초의 총통 직접 선거를 겨냥한 것이었다. 중국은 1996년 3월 8일 대만 수도 타이페이 인근 항구도시 키렁(基隆), 제2도시 가오슝(高雄), 중국 복건성 연안 대만영토 킨멘(金門), 마쭈(馬祖) 열도 앞바다를 향해 미사일을 발사했다. 당시 언론들은 중국의 행동이 총통 선거를 앞둔 대만과 미국의 반응을 살피기 위해서라고 전했다.
  • ▲ 차이잉웬 총통과 시진핑 주석 풍자. ⓒ트위터 세계정상 풍자만화 사이트 The Dolltator 캡쳐
    ▲ 차이잉웬 총통과 시진핑 주석 풍자. ⓒ트위터 세계정상 풍자만화 사이트 The Dolltator 캡쳐
    같은 날 빌 클린턴 美대통령은 항모 전단을 대만해협으로 파견했다. 중국은 이에 지지 않고 3월 12일부터 20일까지 대만 서부 펑후(澎湖)제도 인근 해상에서 실탄훈련을 실시하며, 3월 23일 예정된 대만 총통선거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 그러나 당시 중국 군사력으로는 월남전 이후 최대 항모 선단을 보낸 미국에게 대항할 수 없었고, 이는 총통 선거에서 대만인들의 분노를 표출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대만 분리·독립 성향을 잠재적으로 갖고 있던, 국민당의 리덩후이 현직 총통이 51%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당시 언론들은 “중국의 군사 행동이 리 총통의 득표율을 5% 끌어올렸다”고 분석했다. 리 총통은 이 선거를 기점으로 대만 분리·독립 정책을 전면에 내세웠다.

    중국은 2000년 총통선거에서는 군사행동은 자제했지만, 말로 공갈협박을 했다. 이때도 역효과가 일었다. 선거 3일전 주룽지(朱鎔基) 中총리는 기자회견 도중 “대만독립은 전쟁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이는 리등후이 총통의 사실상 후계자이자 대만 분리·독립을 주장하던 첸수이벤(陳水扁) 민진당 후보가 당선되는 한 요인이 됐다. 중국이 2000년 대만 총통 선거에서 최초의 평화적 정권교체(국민당->민진당)에 일조한 셈이다.

    2016년 ‘쯔위 청천백일기’ 사건, 차이잉원 당선에 도움

    이후 중국은 학습효과가 있었는지 한동안 대만 선거에서 중국에 적대적인 민진당에 도움이 되는 일체의 도발을 자제해 왔다. 그러나 2016년 총통선거 하루 전, 트와이스 멤버인 쯔위가 인터넷 방송에서 대만 국기인 청천백일기를 들고 등장한 것을 중국이 맹비난한 것이 차이잉원(蔡英文) 민진당 후보가 당선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중국이 비난하자 소속사인 JYP가 17살 쯔위에게 “중국은 하나다”라고 공개 사과를 시킨 것에 대만인들이 격분했던 것이다. 대만 언론들은 쯔위 소동으로 차이잉원 후보의 득표율이 1% 올랐다고 분석했다.

    중국은, 이번에도 미국의 ‘자유항해작전’에 대응하면 11월 24일 실시된 대만 지방선거에서 민진당에 유리한 결과를 가져올 것이라 우려해 대응을 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이 지방선거는 중국과의 대화를 주장하는 국민당이 압승했다.

    이렇듯 중국의 군사 행동은 지난 20년간 전혀 효과가 없다는 것이 증명돼 왔으며, 이는 대만에서 무통(武統)으로 불리는 중국의 대만 무력 통일기도를 억제시키는 결과로 이어졌다.

    해외 유명 군사전문 유튜브 채널 ‘Binkov's Battlegrounds(이하 빈코프)’는 지난 12월 21일과 28일 중국의 대만 침략이 불가능하다는 방송을 내보냈다.
  • ‘빈코프’에 따르면, 대만 침공은 2차 대전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이상의 대규모 전력이 필요한데, 중국이 현재 보유한 군함 1600척, 상륙정 6만 3천대 그리고 민간 선박을 모두 동원하려면 10개월 이상 준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게다가 중공군의 보급능력은 노르망디 상륙작전 당시 연합군보다 떨어지며, 10개월의 준비기간 동안 상륙이 용이한 대만 서부 평야지대에 대만군이 미리 지뢰를 매설하고, 동부 고산지대에서 방어전을 준비하면, 중국의 대만 침공은 소모전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지적했다.

    중국이 대만 주변을 1년 간 완전봉쇄 하여 물자교역을 차단한 후 공격하는 방법도 있지만, 대만은 이미 1년 치 비상물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지정학적으로도 봉쇄작전은 인근 일본 오키나와 주둔 미군, 필리핀과 피치 못할 충돌을 초래한다.

    대만 언론들, 시진핑 '무력통일'에 코웃음 치는 분위기

    대만 언론 ‘ET Today’는 이런 ‘빈코프’의 주장을 근거로 ‘중국의 1년 내 무력통일 협박은 단순공갈’이라고 주장했다. 또한 지난 2일 시진핑 中주석이 ‘대만 동포에 고하는 글 발표 40주년 기념회’ 담화를 통해 “대만과의 평화통일과 일국양제를 지향하며, 필요시 (대만에 대해) 무력을 사용할 수도 있다”고 밝혔지만, 대만에 대한 무력 사용이 쉽지 않은 것이 대내외적으로 증명된 만큼, 대만 언론들은 이 담화에 코웃음 치는 분위기이다.

    한편 중국이 ‘응원’한다는 국민당은 시 주석 담화에 대한 논평에서 “중화민국은 유일한 주권독립 국가이며, 대만독립을 반대한다. 그러나 일국양제는 대만인들의 지지를 받기 어렵다”며 반대 입장을 밝혔다. 국민당의 최종 목표는 ‘국민당에 의한 중국 통일’로, 상황이 호전되면 언제든지 ‘본토수복’을 다시 주장할 준비가 돼 있는 정당이다. 민진당은 국민당과 달리 대만과 중국은 전혀 별개의 역사를 가진 독립국가로 인식하고 있다.

    국민당이 압승을 거둔, 작년 11월 대만 지방선거 결과를 두고 많은 한국 언론들이 ‘대만인들이 친중을 선택했다’ ‘미국이 곤란하게 됐다’는 식으로 보도했는데, 이는 중국 언론들의 주장일 뿐이다. 한국과 중국 언론사들은 당시 대만에서 현지보도를 거의 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