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길남 박사 실화' 통해, 분단의 도시 베를린서 벌어진 80년대 한국 현대사의 비극 그려
  • 1986년 분단의 도시 베를린.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는 그곳에서 한순간의 실수로 모두의 타겟이 된 남자.

    베를린 유학 중이던 경제학자 '영민'은 북한 공작원의 말에 혹해 자신과 가족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북으로 가는 선택을 한다.

    그러나 이내 실수임을 깨닫고 서독으로의 탈출을 시도하던 그는 그곳에서 가족과 헤어지게 되고, 설상가상 서로 다른 목적으로 그를 이용하려는 세계 각국의 감시를 받게 되는데….

    잃어버린 가족을 되찾기 위한 한 남자의 사투를 그린 영화 '출국'은 '잃어버린 딸들 오! 혜원 규원'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된 오길남(76) 박사의 논픽션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배우 이범수가 연기한 '영민'은 실존 인물인 오길남 박사를 모델로 만들어진 캐릭터다. 실제로 영화 '출국'에선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자진 입북했다 뒤늦게 탈출을 감행하는 오 박사의 실제 사연이 고스란히 재현된다.

    그렇다고 이 영화를, 흑색선전과 납북을 일삼던 북한의 만행을 폭로하는 그저그런 '반공 영화'로 치부해선 곤란하다.

    메가폰을 잡은 노규엽 감독은 정치적 이슈보다 실제 사실에 여러가지 가공된 이야기를 덧붙여 아버지로서의 사명감을 다하려는 '부성애'에 좀 더 초점을 맞췄다. 자신의 성공이 가족의 행복이라고 믿었던 80년대 아버지들의 표상(영민)을 내세워 인간 본연의 고뇌와 아버지로서의 사명감을 표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

    타이틀롤을 맡은 이범수 역시 '영민'이라는 캐릭터에 대해 "자상함과 책임감, 열정을 가지고 있지만, 무뚝뚝하고 표현을 잘 하지 않은 그 당시 평범한 아버지"라며 "정치적인 해석에 중점을 두기보다는 가족을 되찾기 위해 모든 것을 내던진 아버지의 마음에 관심을 더 가져주셨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 "아내와 딸은 북한에 인질로 붙잡혀"

    영화 속에선 영민이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의사 강문환에게 속아 북한으로 들어갔다 뒤늦게 잘못을 깨닫고 탈출하는 장면이 그려진다.

    '민실협' 활동으로 국내 입국 금지를 당한 영민은 남한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자신의 학문을 높이 평가한다는 강문환의 말에 혹해 북한으로 들어가 예상치 못한 간첩 교육을 받게 된다.

    이후 영민은 또 다른 연구원들을 포섭하기 위해 가족과 함께 독일로 보내지는데, 망명을 시도하던 중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서 가족들과 안타까운 생이별을 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 오길남 박사는 아내와 딸을 동반하지 않고 홀로 독일로 돌아간 것으로 알려졌다.

    재미작가 조화유의 글에 따르면 독일 튀빙겐-브레멘 대학에서 유학 생활을 하던 오길남 박사는 1985년 (재독 친북인사들을 통해)북한 당국으로부터 '입북하면 독일 경제학박사에 걸맞는 일자리를 주고, 부인(故 신숙자)의 간염을 무료로 치료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두 딸(당시 초등학교 학생)을 데리고 평양으로 들어갔다.

    당시 오길남 박사 가족은 모스크바를 거쳐 북한에 도착하자마자 전부 평양 인근 산속의 군부대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약속한 부인의 특별 치료도 받지 못하고 몇 달 동안 김일성 주체사상 교육만 받으면서 깊은 회의를 느끼던 중 오 박사는 '독일로 돌아가서 남한 유학생들을 포섭해서 북한으로 데리고 들어오라'는 새로운 지령을 받게 된다.

    가족이 인질로 붙잡힌 상태에서 집을 떠나려는 오 박사에게 부인 신씨는 "당신은 양심상 그럴 사람이 못되고 그런 짓을 해서도 안된다"며 독일에 들어가거든 다시는 입북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를 했었다고.

    이에 북한 공작원과 함께 독일로 돌아가기 위해 항공편으로 덴마크 코펜하겐 공항에 기착했을 때, 오박사는 부인의 말대로 탈북을 결심하고, 공항에서 덴마크 당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한 것으로 전해졌다.
  • ▲ 오길남 박사의 아내 故 신숙자씨와 두 딸이 북한 요덕수용소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찍은 기념 사진. ⓒ 뉴데일리DB
    ▲ 오길남 박사의 아내 故 신숙자씨와 두 딸이 북한 요덕수용소로 추정되는 장소에서 찍은 기념 사진. ⓒ 뉴데일리DB
    "입북 권유한 인물은 야채상 교포"

    영화 '출국'에선 작곡가 윤이상을 모델로 그려진 '의사 강문환'이 오 박사 가족의 월북을 유도한 장본인으로 묘사되는데, 실제로 오 박사에게 입북을 주도적으로 권면했던 인물은 현지에서 야채상을 하던 김종한이라는 재독교포였다.

    오 박사는 2011년 10월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작곡가 윤이상은 당시 북한의 대남 공작총지휘부에 있었다"며 "따라서 그가 지시를 했을지는 몰라도 나를 포섭하는 데 실질적 역할을 한 것은 김종한"이라고 밝힌 바 있다.

    오 박사는 1985년 7월 독일 브레멘대학에서 경제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하지만 졸업 후 직장을 얻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간호사로 일하던 아내 신 씨가 간염으로 앓아눕는 바람에 생계까지 위협을 받고 있었다.

    같은 해 10월, 오 박사의 이런 상황을 잘 알고 있던 교포 김종한이 오 박사 가족에게 입북을 권유했다.

    그에게서 많은 도움을 받았던 오 박사는 처음에는 거절했지만, 경제적 어려움을 이기기는 어려웠다고 한다. 결국 김 씨의 유혹을 못 이긴 오 박사는 구라파의 북한대남 공작책 백치완 등에 가족과 함께 인계돼 월북했다.

    이후 오 박사는 탈북을 결심, 공항에서 덴마크 당국에 정치적 망명을 요청했는데, 이 일로 북에 남아 있던 아내와 두 딸은 제15호 정치범수용소로 끌려간 것으로 전해졌다.

    1991~1994년 요덕수용소에 수감됐던 국군포로 자녀 김OO씨는 2012년 10월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통영의 딸'로 알려진 신숙자 모녀 집에 땔나무를 주는 일을 했었는데, 어느날 신숙자 모녀가 보위부원들에 의해 남한으로 보낼 사진을 찍은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김씨에 따르면 1991년 윤이상이 북한 관계자에게서 이 사진과 두 딸의 육성 녹음테이프를 구해 오길남 박사에 전해줬던 것으로 알려졌다. 김씨 등 일부 탈북자들은 당시 윤이상이 오 박사에게 재입북을 권유하기 위해 이 사진을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윤이상의 가족은 생전 윤이상이 월북을 강요한 적이 없다는 진술서를 쓴 적이 있다며 북한에 간 것이 윤이상의 권유 때문이었다는 오 박사와 탈북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윤이상의 가족은 2011년 오 박사를 명예훼손 혐의로 고소했으나 2013년 증거불충분으로 무혐의 처분을 받았다.

    이 사진은 2011년 무렵 다수 언론에 대서특필됐던 사진으로, 요덕수용소에 갇힌 두 딸은 물론 신씨의 마지막 모습을 담고 있어 의미를 더하고 있다.

    영화 '출국'에서도 문제의 사진이 나온다. 독일에서 한국으로 돌아온 영민은 우연히 북한 사진전을 관람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큰 딸로 추정되는 20대 여성의 사진을 발견하고 오열을 터뜨린다.

    [사진 출처 = 플래닛PlanIt / 뉴데일리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