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리선권에게서 새삼 확인하는 ‘바보 이반’의 나라  
     
    이동복  /북한민주화포럼 대표, 전 국회의원

     
     평양에서 열린 남북정상회담 기간 중 옥류관에서 냉면으로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 자리에서 북측의 소위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위원장이라는 리선권이 동석한 한국측 기업 총수들에게 “냉면이 목구멍으로 넘어 가느냐”고 시비했다는 소식에서 과거 남북회담에 참가한 일이 있는 필자는 변하지 않는 북한의 민낯을 확인한다. 리선권의 이 같은 파행(跛行)에 대한 조명균(趙明均) 통일부장관의 콤멘트가 화제가 되고 있다. 리선권의 말은 “남북관계에 속도를 내자는 의미였을 것”이라는 것이다. 러시아 불후(不朽)의 작가 레프 톨스토이의 단편    <바보 이반>에서나 등장함 직 한 설왕설래(說往說來)다. 듣는 사람의 가슴을 아프게 하는 삽화(揷話) 한 토막이다.

    이 삽화가 되살려 내는 필자의 추억이 있다. 1991넌10월의 어느 날 남북고위급회담 남쪽 대표단이 평양에 도착하여 숙소인 백화원(百花園)에 짐을 풀자마자 구내식당에서 점심 식사를 하게 되었다. 남쪽 대표단의 수석대표는 정원식(鄭元植) 총리였고 필자는 대변인이었다. 북측은 일행 중 대표 7명과 나머지 수행원을 분리하여 각기 다른 방에서 식사를 하도록 했었다. 대표들이 식사를 하던 방에는 북측에서 남자 1명과 2명의 여종업원이 수발하고 있었다. 2명의 여종업원 가운데 한 명의 미모가 특출했다. 이름은 잊었지만 성은 김(金) 씨였다.

    정원식 총리가 이 미모의 종업원에게 관심을 표명하고 싶었던 것 같다. 정 총리가 이 종업원을 불렀다. 종업원들의 자기 성명 소개가 끝난 뒤였다. “아, 미스 김....” 하는 정 총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정 총리는 봉변(逢變)을 당하기 시작했다. 문제의 그 ‘미스 김’이 정 총리의 의자 옆으로 “달려가서” ‘항의’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총리 선생님, 지금 무어라고 했습네까? 다시 한 번 말씀하시라요...” 평양이 초행(初行)이었던 정 총리는 엄청나게 당황해 하기 시작했다. 정 총리가 당황한 표정으로 대꾸하지 못하자 ‘미스 김’의 가차 없는 공격이 계속되었다. “‘미스 김’이 무업네까. 내가 양갈보라는 말입네까?” 결국, ‘미스’라는 외래어(外來語)가 동티였다.

     순간적으로 필자는 이 엉뚱한 시비를 가로 맡아야 하겠다고 판단했다. 필자가 끼어 들었다. 필자가 이렇게 말했다. “남북이 오래 분단되어 떨어져 살다 보니까 언어에 많은 문제가 생긴 것을 자주 확인한다. 지금 우리 총리께서 ‘미스’라고 호칭한 것 때문에 그러는 모양인데 그렇게 할 문제가 아니다. 남쪽은 워낙 국제화가 진행되어 있기 때문에 젊은 여성들이 즐겨 하는 호칭이 ‘미스’다. 총리께서는 그러한 뜻에서 지금 ‘미스’라는 호칭을 사용한 것인데 북쪽에서는 그것을 그렇게 받아드리지 않는 모양인가 보다. 그러면, 북쪽에서는 ‘미스’라는 호칭 이외에 어떤 호칭을 사용하는 것이 좋겠는가?” 이에 대한 여종업원의 대답이 화살처럼 날아 왔다. “동무라고 불러 주시라요.”

    이 말을 들은 필자에게 순간적으로 장난스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 결과 이 여종업원과 필자 사이에 다음과 같은 수작(酬酌)이 오갔다.

    필자: “그건 안 되겠네요. 남쪽에서는 ‘동무’라는 단어가 갖는 전투적이고 살벌한 함의(含意) 때문에 남자들 사이에서도 그 말 대신 친구라는 단어가 사용되 고 있는 데 아가씨 같은 미인에게 어떻게 그 같은 살벌한 단어를 사용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호칭할 수 없지요. 아무래도 다른 호칭이 있어야 하겠네요.”

    종업원: [침묵]

    필자: “남쪽에서 사용되는 순수한 우리말로는 결혼한 여자를 ‘여사(女史)라고 부르고 미 처혼 처녀를 ‘양(孃)’이라고 호칭하는 데 아가씨는 기혼입니까, 미혼입니까?';

    종업원: “처녀야요.”

    필자: “그러면 ‘김 양’이라고 불러야 하겠는데 그래도 괜찮겠습니까>”

    종업원: “그러면 그렇게 해 주시라요.”

    필자: “그런데, 또 문제가 있네요. 지금 남쪽에서는 국제화의 바람 때문에 대부분 의 양가집 처녀들은 모두 ‘미스’라는 호칭을 선호하고 ‘양’이라는 호칭은 식 당이나 술집 종업원들을 부를 때에 한하여 사용되고 있는 것이 사실인 데 당신을 ‘김 양’이라고 불러도 상관없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북측 여종업원은 가쁜 숨소리만 내면서 대꾸를 하지 않았다. 결국 북측 여종업원에 대한 호칭 문제에 관해서는 결론을 내지 못했고 일단 여종업원에 대한 호칭도 ‘선생’으로 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미스 김’이 ‘김 선생’으로 바뀐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식사 때 보니 문제의 ‘김 선생’이 보이지 않았다. 미색(美色)의 잠적(潛跡)은 남측 대표 일곱 명 모두의 관심사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 북측의 남자 종업원에게 물었더니 그의 대답은 “아까 ‘김 동무’가 남측 수석대표 선생에게 불경(不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수행원 식당으로 일 자리가 바뀌고 이곳에는 다른 동무가 왔다”는 것이었다.

    이 때 필자의 머리에 강렬하게 떠올랐던 생각이 “아하, 이곳은 지금도 ‘바보 이반’의 세상이로구나” 하는 것이었다. 오늘 <조선일보>가 전하는 남측 기업 총수들에게 했다는 리선권의 말에 접하면서 필자는 “북한은 여전히 여전하구나”하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그런데, 얼마 전 보도에 의하면 판문점에서 열리는 남북 고위급(?) 회담에 남측의 조명균 통일부장관이 잠시 지각 참석한 것을 가지고 리선권이 마치 초등학교 선생이 학생을 나무라듯이조 장관을 나무라는 데 그치지 않고 조 장관에게 ';현재까지 잘해온 것처럼 연말까지 분투하길 기대한다';며 ';특히 지금까지 진행한 사업들을 전면적으로 돌이켜보고 점검해보면 바로잡아야 할 문제들이 있다. 남측이 더 잘 알 테니…';라고 훈시(?)조의 발언을 한 데 대해 조 장관은 ';말씀 주신 대로 역지사지(易地思之)하면서 문제 풀어간다면 어떤 문제가 발생해도 평양 공동선언을 철저하게 이행해나갈 수 있다';고 공손하게 대답했다는 소식이다.

    ‘바보 이반’은 북한에만 존재하는 현상이 아닌 것임이 분명하다. 남북대화의 자리에 나서면 남쪽 사람들도 ‘바보 이반’이 되어야 하는 것이 남북관계의 현주소라는 사실을 우리는 계속해서 확인하게 된다. 밥 맛 떨어지게 하는 고약한 세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