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정치적 병역 거부에 빼앗긴 '양심'이란 이름…나라 지키는 이들의 상처받은 '양심'은 어쩔 건가
  • ▲ 1일 대법원 앞에서 병역거부 허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마치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1일 대법원 앞에서 병역거부 허용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기자회견을 마치고 구호를 외치고 있다.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대법원이 1일 종교적 이유로 병역을 거부한 사람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2004년 대법원 전원합의체가 내린 “병역거부자 처벌은 합당하다”는 판결이 14년 만에 뒤집힌 것이다. 이날 무죄를 선고받은 오 모 씨(34세)는 ‘여호와의 증인’ 신도라고 한다. 2013년 현역 입영 통지에 불응해 병역법 위반 혐의로 기소됐다. 오 씨는 1·2심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다.

    대법원은 “양심적 병역거부자에게 병역을 일률적으로 강제하고 불이행에 대해 제재를 하는 것은 소수자에 대한 관용 등 자유 민주주의에 위배되는 것”이라며 무죄 취지로 원심을 깨고 창원지법으로 돌려보냈다. 이날 판결에서 대법관 13명 가운데 8명이 ‘병역거부’는 무죄라는 의견을 냈고, 4명은 반대 의견을 냈다. 1명은 법리해석은 달랐지만 무죄라는 데는 뜻을 같이 했다. 이번 대법원의 판결을 두고 여러 말이 나온다.

    ‘양심적 병역거부’의 숨은 역사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을 듣고서 일각에서는 “그럼 입대하는 것은 비양심적이냐”고 반발한다. 사실 이 단어는 영어 ‘Conscientious Objection’를 번역하면서 나온 말이다. ‘양심과 비양심의 대결이냐’는 반박에 부딪힌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군대에 가는 것도, 안 가는 것도 모두 양심에 따라야 한다”며 이를 피하려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특정 종교 신도만 병역거부로 처벌받고 있으니 이를 종교적 병역거부라고 불러야 한다”는 지적이 나왔다. 병역거부 지지자들은 난감해 하다가 어느 순간 불교 신도 등 타 종교의 병역거부자를 찾아내 언론에 ‘데뷔’시켰다. 사실 한국의 병역거부자 가운데 99.2%가 ‘여호와의 증인’ 신도라는 ‘국민일보’의 지난 7월 2일자 보도를 비롯해 곳곳에서 병역거부자의 절대 다수가 특정 종교와 관련이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럼에도 병역거부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극소수의 불교, 기독교 신도와 ‘여호와의 증인’ 신도를 한 데 섞어 놓고 ‘양심적 병역거부’라고 부른다. 중국 공산당이 인구의 92%가 한족이라는 사실을 숨긴 채 “우리는 57개 민족이 하나로 뭉친 나라”라고 주장하는 것을 연상케 한다.
  • ▲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 이철희·박주민 의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대체복무제 허용을 촉구하며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지난 7월 더불어민주당 이철희·박주민 의원, 시민사회단체 관계자들이 대체복무제 허용을 촉구하며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갖는 모습. ⓒ뉴시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공교롭게도 ‘양심적 병역거부’라는 말로 본격적으로 병역 의무를 거부한 것이 1차 세계대전 당시 미국에서 세를 확대하던 ‘세계산업노동자연맹’과 ‘미국 사회당’이라는 사회주의 세력이다. 이들은 반전 집회, 입영 거부, 파업 등을 벌이다 방첩법 위반으로 체포돼 징역을 살았다.

    이후로도 일제, 나치 독일, 미국, 영국, 이스라엘 등 세계 곳곳에서 ‘반전 평화’를 내세운 병역 거부가 있었지만 대부분 정치적 이념, 특히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 이념에 따른 것이었다. 한국의 경우에는 ‘자칭 진보세력들’이 1993년 ‘문민정부’가 들어선 뒤부터 광범위하게 ‘양심적 병역 거부’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했다. 즉 ‘양심적 병역거부’의 본질은 ‘정치·종교적 병역거부’, 줄여서 그냥 ‘병역거부’라 부르는 게 낫다는 것이다.

    병역거부 무죄 판결의 후폭풍

    지난 6월 28일 헌법재판소는 병역거부에 대해 “처벌은 합헌이지만 대체복무를 허용하지 않는 것은 헌법에 불합치하므로 정부는 관련 제도를 마련하라”고 판결했다. 헌법재판소의 판결 이후 전국 곳곳에서는 병역거부자에 대한 무죄 판결이 쏟아졌다. 대법원 상고심 판결은 그 하이라이트였다.

    대법원의 병역거부 무죄 판결이 불러올 후폭풍은 예상보다 클 것으로 보인다. 일단 정부가 마련하려는 병역거부 대체복무제에 벌써부터 국회의원들이 ‘숟가락’을 얹은 상태다. 헌법재판소 판결 이후 김학용 자유한국당 의원은 예전부터 나왔던 국민들의 이야기를 의식한 듯 “병역거부자들에게는 44개월 동안 지뢰제거나 보훈병원 중환자 수발 등을 맡겨야 한다”고 주장했다. 44개월은 공군 복무기간 22개월의 두 배에 맞춰 나온 기간이었다.

    그러자 하태경 바른미래당 의원이 “반인권적 발상”이라며 병역거부자들의 편에 섰고, 박주민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국제적 사례를 운운하며 “병역거부자 또한 사회복지나 공익 업무를 맡겨야 하고, 복무기간도 향후 단축하기로 한 육군 복무기간 18개월을 기준으로, 그 1.5배인 27개월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후 ‘진보’를 자처하는 국회의원과 학자, 언론인들은 “병역거부자를 군인처럼 합숙시키고 영외로 내보내지 않는 것은 인권유린”이라며 현재의 ‘사회복무요원(일명 공익요원)’과 같은 대우를 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집에서 출퇴근하고 주말과 휴일에는 쉬며, 급여도 현역 군인보다 많은, 다만 공무원들에게 시달린다는 그 ‘사회복무요원’ 말이다.

  • ▲ 2016년 11월 병역거부자 모임과 노동당의 기자회견 모습.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2016년 11월 병역거부자 모임과 노동당의 기자회견 모습. ⓒ연합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병역 면탈 의도를 어떻게 파악할 수 있는지도 논란이다. ‘종교적 병역거부’의 경우에는 해당 종교를 어린 시절부터 다녔던 것이 확인되면 된다는 주장이 있는데 순진한 발상이다.

    '주류 종교'도 병역거부의 예외 아냐
    국내 주류 종교에서 병역거부자가 모두 나왔다. 2001년 12월 불교 신자이자 평화운동가라는 오태양 씨가 병역거부를 선언, 사회적 논란이 됐다. 2003년 4월 다른 불교 신자가 병역거부를 선언한 뒤 불교도 가운데 병역거부자들이 증가하기 시작했다. 2005년 10월에는 가톨릭 신자 가운데 병역거부자가 나왔다. 병역을 거부하는 가톨릭 신자들도 점점 늘었다. 2006년 10월과 2009년 7월에는 연세대 신학생이 병역을 거부했다. 불교, 가톨릭, 기독교 모두에서 병역거부자가 나온 것이다.

    종교가 없는 이들에겐 또다른 병역거부의 길이 있다. 이런 사람들은 해외에 난민 신청이나 정치적 망명을 할 수 있다. 이미 동성연애나 평화애호가 등이 “병역거부를 하면 한국에서 인권유린을 당할 수 있다”며 캐나다, 프랑스 등으로 망명했다. 2009년 동성애자 A씨, 2012년 평화주의자 B씨, 2016년 C씨 등은 현지에서 ‘난민’으로 받아들여졌다.

    자, ‘양심’이라는 단어를 갖다 붙인 덕분에 병역거부는 이제 어떤 이유를 대든 할 수 있는 일이 됐다. 만약 병역거부자를 위한 대체복무가 현역 군인만큼 육체적·정신적·정서적으로 힘들지 않다면, 위험하지 않다면 이제 그 누구든 병역거부를 할 수 있게 됐다. 한국의 사회 보편적 정서로 볼 때 이는 군대를 없애자는 소리, 역사적 측면에서는 나라가 자살하는 소리로 들린다.

    병역거부하는 ‘양심들’ 눈에는 대한민국 자체가 문제일 듯

    아무튼 이제 종교적 확신과 정치적 신념만 있으면 군대에 가지 않아도 되는 시대가 온 것 같다. 하기야 최근 군대를 전역한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다수의 부대에서는 ‘양심과 인권’에 따라 이제 상명하복도 희미해지고, 전투력 증강보다는 병사들의 안전이 최우선이 된 상태라고 하니 국방의 의무라는 게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겠다. 합법적 병역거부가 보편화된 다음 단계는 뭘까. 모병제 실시? 아니면 남북통일?

    이번 대법원의 판결과 향후 느슨한 대체복무제가 시행되면 안보가 아닌 다른 측면에서 ‘양심’을 악용하는 사례가 나올 수 있지 않을까. ‘양심적 병역거부’가 큰 논란이 됐을 때 어떤 이는 ‘양심적 납세거부’라든지 ‘양심적 사법제도 거부’ 등을 주장했다. 정신 나간 소리 같지만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는 ‘양심’만으로 국방의 의무를 거부할 수 있게 된 상황에서 이런 주장이 없으리라고 장담할 수가 없다.

    어쩌면 아예 대한민국 자체를 부정하는 사람들이 목소리를 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양심적 병역거부’를 운운하는 사람 가운데 극소수는 대한민국이 친일파가 세운 나라이고, 군부독재정권이 만든 나라라며 폄하한다. 나라 자체를 혐오하는 이들이 득세한다면 누구도 여러분을 지켜줄 수 없다. 최근 성황리에 곳곳에서 열리고 있다는 ‘이민 설명회’가 독자 여러분의 생존 수단이 될 수도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