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시장 격동하던 시기에 중화학공업 개혁 '승부수'… 그가 없었다면 '한강의 기적' 가능했을까?
  • 민주주의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전 세계의 빈곤국 중 민주주의 꽃을 피워낸 나라가 있는가? 가난한 개인은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급급하다. 자신을 발전시킬 장기적 계획과 투자는 꿈도 못 꿀 일이다. 나라도 마찬가지다. 국고가 바닥나면 장기발전을 계획할 여유도, 수립한 계획을 추진할 여력도 부족하다. 천운(天運)이 따르지 않고서는 빈곤국을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깝다.

    그래서 대한민국은 위대하다. 전 세계에서 가장 못 살던 나라가, 어디 내놔도 부끄럽지 않은 나라로 발전했다. 당장 내일 먹을 양식을 걱정하던 나라에서, 100세 노후계획을 세우는 나라로 탈바꿈했다. 기적 중에 기적이다. 

    가난 앞에 장사(壯士) 없다. 손에 쥔 무기가 도덕이라는 무딘 칼이라면 더욱이 그러하다. 가난하지만 치안이 훌륭한 나라를 들어본 적 있는가? 대부분의 인간은 굶어 죽을 바엔 남의 떡을 훔치기 마련이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민주주의도 돈이 있어야 가능하다. 가난할수록 약육강식의 원시적 사회가 도래한다. 문명이란 찾아볼 수 없고 총과 칼, 주먹질이 권력인 세상이다. 

    그런 의미에서 한강의 기적의 물꼬를 튼 이승만과, 국제적 산업변동의 급류를 타고 한강의 기적을 이루어낸 박정희는 대한민국 최고의 인권운동가이며 민주투사다.

    '내수시장' 넘어 '국제시장' 주목한 박정희 
    박정희는 천운(天運)의 기회를 놓치지 않은 승부사다. 좁아터진 내수시장에서 넓디넓은 국제시장으로 진출, 당당히 승기를 잡은 사나이다. 당시 국제시장은 급격히 변모하고 있었다. 기술발전에 따라, 경공업과 같은 노동집약적 제조업이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 이양되고 있었다. 자원이 부족한 나라더라도, 원하는 만큼 일할 수 있고 일한만큼 돈을 벌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흐름을 가장 먼저 탄 나라는 일본. 선발대로서 가장 빠른 성공을 맺은 일본은 중화학공업국으로의 변모를 시도한다. 중화학공업으로의 집중으로 인해 일본의 주력 품목이었던 경공품은 대한민국으로 이동한다. 후발대로서 단단히 한 몫 챙길 기회가 다가온 것이다.
    당시 한국경제인협회의 사무국장이었던 김입삼은 한국의 기회를 보며 명언을 남겼다. “바가지를 들어라.” 하늘에서 돈이 쏟아져서 바가지만 들면 부(富)를 담을 수 있는, 당시의 시대를 잘 비유한 재치 있는 명언이다. 

    그러나 박정희 대통령은 바가지를 드는 수준에 만족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지폐가 흩날려도 바가지의 개수가 한정되어있으면, 담을 수 있는 돈 또한 한정되기 마련이다. 돈을 더 담으려면 바가지 개수를 늘려야하고, 바가지 수를 늘리려면 바가지를 더 사와야만 한다. 하지만 승부사 박정희는 바가지를 단체주문 하지 않았다. 아예 플라스틱 공장, 바가지 공장을 차려버렸다. 물 들어올 때 노 젓는 격이 아니라 모터를 달고 있는 힘껏 내달리는 격이다.

    원자재와 부품을 수입하여 조립하고 판매하던 수준에서, 원자재와 부품을 내부적으로 생산하여 이익을 극대화했다. 1962년 대한석유공사를 설립하고 울산에 정유공장을 세웠다. 1968년엔 신속하고도 원활한 시장의 가동을 위해, 한국경제의 대동맥, 경부고속도로도 건설했다. 

    한국 경제는 날개 돋친 듯 고공 성장하여 하늘을 날게 되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안심할 수 없었다. 1968년 이후로 북한은 군사적 도발을 강화하고, 1969년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군사적으로 동아시아에서 점진적인 후퇴를 감행한다는 닉슨독트린을 발표하였다. 여태까지 성공적이었던 경공업주도의 경제발전이 한계에 봉착한 징후도 나타났다. 군사적, 경제적인 위기였다.

    당시 국제시장은 격동하고 있었다. 격동의 시기에 박정희는 승부를 건다. 중화학공업국으로의 개혁이다. 박정희의 승부수는 잭팟을 터트리며, 하늘을 날고 있는 한국경제가 우주로 튀어나가게 만들었다. 대한민국은 꾸준히 발전하여 전 세계 5대 공업국가, 7위 수출국으로 도약했다. 
  • 정주영 회장, 박 대통령에게 떠밀려 조선업에 투신
    대한민국의 중화학공업이 성공할 수 있었던 건 국제적인 투자와 도움 때문이다. 대표적인 성공사례는 현대중공업이다. 

    현대그룹의 정주영 회장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떠밀려 맨땅에 헤딩하듯 조선업에 투신했다. 대한민국의 경제력과 내부기술로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투자금은 런던의 금융시장에서 받아왔다. 당시 최고의 기술을 갖고 있는 일본인들을 설계기술자로 영입했다. 현대조선의 초대사장은 덴마크인이었다. 현대조선은 시작부터 국제기업이었다.

    현대는 영국-일본-덴마크의 기술자들을 적절히 견제시키며 불과 3년 만에 현대고유의 기술을 성립시켰다. 전 세계가 놀라는 가운데 성공한 국제기업으로 떠올랐다. 위대한 ‘현대정신’의 승리였다.

    경공업의 발전과 중화학공업으로의 변모... 쉬운 일은 아니었다. 쉽지 않은 요인들이 모여 한강의 기적을 일으켰다. 무엇하나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요인들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오늘날의 풍요를 낳았다. 하지만 그 톱니바퀴가 돌아갈 수 있었던 배경에는 국제시장의 급변이 있었다. 국제시장이 요동쳤기 때문에 박정희라는 파도잡이가 경제성장의 파도를 탈 수 있었다.

    어떤 이들은 박정희가 없었더라도 한강의 기적을 이룰 수 있었다고 말한다. 과연 사실일까? 1967년, 박정희식 경제개발을 비판하며 대두한 경제개발이론이 있다. 이론의 이름은 ‘대중경제론’ 김대중 당시 야당 후보의 이론이다. 김대중은 국내자본을 최대한 동원하여 농업과 중소기업 같은 내수시장에 투자, 국내시장을 확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박정희가 국제시장이라는 백(百)마지기 땅에 농사를 지을 때, 김대중은 내수시장이라는 한(一)마지기 땅에 농사를 지어야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김대중의 이론과 비슷한 경제개발을 추구한 곳이 있다. 북한이다. 1960년대, 북한의 1인당 소득은 남한의 1인당 소득의 2배 이상이었다. 북한초기 경제정책은 성공적으로 보인 듯하였다. 하지만 머지않아 북한의 경제는 뒷걸음치기 시작하였다. 북한이 내수시장의 기술과 자원만으로 경제를 발전시키려고 시도했기 때문이다. 설상가상 북한의 폐쇄적인 외교정책은 자국(自國)을 국제적으로 고립시켰다. 석유화학공업이 석탄을 대체하고 있을 시대에, 북한은 석탄으로 공장을 돌렸다. 당시는 대한민국이 외국기술을 적극 도입하여 석유화학공업을 활발히 전개할 때였다.

    남한과 북한에게 똑같이 주어졌던 기회였다. 문을 열고 국제시장으로 뛰어든 대한민국과, 문을 닫고 스스로 고립에 처한 북한. 찰나의 기회가 극복할 수 없는 수준차이를 빚어냈다. 일국(一國)의 지도자가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절감한다.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대한민국은 여전히 북한보다 가난하지 않았을까.

    <필자 소개>
    김창대(1995년생)
    서울신학대학교 신학과 재학
    거룩한 대한민국 네트워크 부총무
    (사) 대한민국 통일건국회 청년단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