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년간 '대통령직선제 개헌 - 한미동맹 - 시장경제 개헌 단행건국후 공산군과 싸우며 '대만민국 게2건국 완성 시키다사대주의-강대국 간섭 원천봉쇄…현대국가로 재탄생!!
  • 제92회 이승만 포럼 /2018.10.16. /정동제일교회

    [6.25 전쟁중 이승만의 독립전쟁]
    부산정치파동에서 사사오입 개헌까지
    - 인보길 뉴데일리 대표(이승만포럼 공동대표)

    이승만 건국대통령은 하와이에서 눈을 감는 순간까지 독립운동을 쉬지 않았디.

    "통일은 어찌 되느냐...나라를 한번 잃으면 다시 찾기가 얼마나 힘든 줄 아느냐. 다시는 남의 종이 되지 말라" 기도하고 기도하며 유언조차 독립운동으로 남겼다.

    배재학당 졸업때 'Independence of Korea' 영어연설에서 시작된 이승만의 반세기 독립운동의 클라이막스는 해방정국 3년 건국. 제2의 클라이막스는 건국후 1952~4년 '전쟁중 독립전쟁 3년'이라고 보여진다. 자유독립을 위해 혼자서 미국과 싸우고 소련과 싸우면서 막판에 제시한 기막힌 통일방안-'유엔의 힘을 이용한 남북한 총선거' 전략은 궁지에 빠진 미국을 구하였지만, 김구가 손을 잡자고 떼쓰던 김일성과 소련에 의해 거부되어 결국 한반도 반쪽 대한민국이 되고말았다. 이것은 이승만이 목표한 독립국가가 아니다. 1946년 6월 전국 반공계몽 중에 나온 '정읍발언'을 다시 보자. 

    "공산주의자는 소련으로 보내야 한다. 가족일지라도 파괴주의자이므로 함께 나라를 건설할 수 없다…이제 우리는 무기휴회된 미소공위가 재개될 기색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방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 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 공론에 호소하여야 될 것이다…"

    이것이 분단정부 세우자는 말인가? 처음부터 반공이요, 전제주의 소련 공산주의 추방이다. 이승만은 대한민국 건국후에도 자신의 정부를 스스로 '과도정부'라 부르곤하였다. '임시정부'라도 만들어 북한에서 소련을 몰아내고 삼천리 반도 금수강산에 자유통일정부를 세워야만 완전한 독립국가란 것이 그의 불굴의 목표이다.

    오늘 제92회 이승만 포럼의 주제는 바로 이것, 1952년 부산정치파동에서 반공포로 석방, 한미동맹 체결과 이른바 '사사오입' 개헌파동까지 요점만 정리한다. 이때 이승만은 만77세부터 79세까지, 목숨을 내놓고 평생 가장 치열한 건곤일척의 결전을 벌인 80세 노인의 마지막 독립전쟁 기록이다.
  • 1. 부산정치파동 - 야당과 미국의 음모

    이승만이 독립운동중 가장 힘들었던 상대는 일본도 소련도 미국도 아니었다. 바로 독립운동권 '내부의 적'들이다. 고려공산당-조선공산당 세력은 그렇다 치더라도 헤게머니와 자금 쟁탈을 벌이는 미국내 중상모략, 공산당과 손잡고 임시정부 대통령을 축출하는 평안도파, 의병수준의 싸움밖에 모르는 무력투쟁파, 권력을 위해서라면 김일성과 동침도 불사하겠다며 건국을 건국후까지 반대하는 무지몽매 배신자들, 역사관도 국가관도 이념철학도 빈곤한 소위 동지들의 지리멸렬 난맥상이 무엇보다 고통스럽고 걱정스러웠다. 더구나 그것이 건국 협력자들인 한민당까지임에랴. 15~20살 아래의 독립운동 후배-제자들이 '그 자리 나 달라'며 시도때도 없이 대들 때 이승만의 심중이 오죽했겠는가.

    ◆ "미국과 야당이 배가 맞았다" 

    공산군을 무찌르는 '통일전쟁'이 한창일 때, 대통령 선거(국회 간접선거)를 눈앞에 둔 1952년 봄 야당은 세 번째로 내각제 개헌안을 내놓는다. 그리고 이미 내통한 미국을 믿고 '개헌과 정권교체' 양면작전을 편다. 미국과 통했다는 말은 지난해 휴전 반대를 선언한 이승만을 미국 역시 ’제거 방침‘으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심전심 야당과 미국은 '이승만 축출' 공동목표에 한통속이 되었다고 전해진다.
    한민당은 건국전야부터 이승만과 건국정부에 반기를 들었다. 왜냐하면 건국내각에 '총리 + 장관 6명' 입각을 요구했다가 거부당했기 때문이다. 이승만은 "특정 정당이 독점하는 내각은 독재가 위험하다. 거국내각으로 통일투쟁을 벌여야 한다."면서 북한출신 총리를 지명하고 독립운동가들로 첫 내각을 조직한다. 이때 동아일보 1면 머리 사설(8월7일자)과 기사들은 "대통령은 과오를 범했다. 빨리 청산하라. 졸작 약체 내각 철회하라"고 포문을 열었다. 이어 8.15 건국 축하식이 끝나자마자 야당은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여 이듬해부터 해마다 개헌안을 낸다. 이승만은 직선제 개헌안으로 봉쇄한다. 급기야 중공군 침략에 밀려 1.4후퇴로 다시 쫓겨간 부산 피란 수도에서 야당은 제2대 대통령 국회선거 전략에 정면도전한다. 더불어 미국은 휴전을 결사 반대하는 '통일 미치광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미국 말 잘 듣는 대통령 고르자"는 비밀공작에 따라 야당을 일방적으로 지원한다. 이승만의 눈에 이들의 행태는 중국에 빌붙어가며 권력쟁탈 학살극을 벌이던 조선당쟁 그 망령 그대로였다. "망국의 사대주의 당쟁을 이참에 뿌리뽑고 말겠다" 결심한다.
  • ◆선수 친 전략가 이승만 

    당시 상황을 알려주는 이승만의 편지를 읽어보자. 

    [개인 정치고문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

    "국회가 나를 재선출하지 않을지도 모르지요. 그 이유를 아시오? 일본과 미국은 제각기 나름대로의 이유로 한국의 대통령이 바뀌기를 원하고 있소. 우리 국회는 한국 국민들을 위해서가 아니라 외국의 이해관계를 충족시키기 위해 뇌물도 받고 압력 같은 것도 받고 있는 형편이오. 한마디로 말해서, 현행 헌법에 의한 대통령 선출은 사실상 한국국민들의 선택이 아니라 외국의 압력에 의한 선택이 될 것이오..." (1951년 가을. 올리버 저서 [이승만의 대미투쟁]에서)
    미리 보고 멀리 보고 깊게 넓게 보는 전략가 이승만은 그해 12월 자유당을 창당한다.
    "우리는 쌍놈당을 만들자"며 농민-노동자 당을 주장했다. '쌍놈당'이란 말은 양반지주계급을 과시하는 야당에 빗댄 이승만의 뼈있는 농담이다. 그리고 이듬해 봄, 미뤘던 지방자체제 선거를 단행한다. 시, 도, 면까지 전면적인 자치제 선거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는 것, 자유당과 이승만 지지세력의 압도적 승리, 야당은 참패하였다. 국민의 힘으로 미국의 압력에 국민적 저항을 벌이려는 이승만 특유의 승부수, 이것은 청년시절 만민공동회의 힘으로 고종황제를 굴복시켰던 국민정치의 원조다운 전술이다.

    ◆ "미국은 내정간섭 말라"

    이승만은 마침내 칼을 뽑았다. 5월25일밤 부산과 영호남에 계엄령을 선포하고, 이튿날 국회의원들이 탄 국회출근 버스를 크레인에 걸어 헌병사령부로 끌어간다. 이날부터 40일간 계속된 부산정치파동, 그것은 외견상 대통령의 국회탄압처럼 보였으나 사실은 한국전쟁을 도우러 온 우방 미국과 이승만의 정면 대결, 미국으로부터의 독립투쟁인 셈이었다. 미국은 당장 계엄령을 해제하고 국회의운들을 석방하라며 참전국까지 동원, 압력을 가했다. 이승만은 "내정 간섭 말라, 대한민국의 민주체제를 위해 나보다 더 근심하는 사람은 없다"면서 요지부동이었다. 그리고 국회의원들에게서 압수한 달러뭉치를 증거로 들이댔다.
    야당은 '간접선거 헌법수호' 결의안을 통과시키고, 이승만을 반민주 독재자로 규탄하는 집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한국정당이 '이승만은 독재자'로 규정한 최초의 공식 사례이다.
    이승만은 4월 선거에서 조직한 지방의회 대표들을 동원하여 "직선제 개헌"을 집중 압박하였다. 계엄령은 미국과 야당의 '국회 쿠데타'를 봉쇄한 것일뿐, 국회를 해산시키라는 국민요구도 거부하면서 어디까지나 민주주의 훈련방식을 택하여 정치권과 국민들의 정치의식 교육에 집중, 연일 장문의 담화를 발표하였다.
    "간접선거가 얼마나 위험한지 모르느냐. 강대국 간섭을 불러들이고 공산당에게 먹힌다."
    아들 같은 후배 의원들을 어르고 달래고 설득하며 끈질기게 호소한다.
    "명나라 지배 받고 청나라 지배 받고 러시아 지배 받고 일본 지배 받고 그래도 모자라 미국 지배까지 받으려느냐"
    "내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이것(직선제)만은 실현해놓고 나자가는 것뿐이다. 마지막 간절한 소원이다. 양원제와 직선제만 된다면 내가 일생에 하고자 했던 일은 다 하는 셈이다. 나를 믿어달라."
  • ◆미국의 '이승만 제거 군사작전' 포기 

    한국을 돕는 유엔군의 휴전에 저항하는 "이승만을 제거하라"는 명령을 받은 미군부, 특히 한국전 지휘부는 '이승만 연금, 군정실시' 등의 작전을 준비했지만 결국 포기하고 만다. 백악관 안보회의는 "지금 한국에 이승만을 대체할 지도자는 한명도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이승만과의 협상노선을 택한다.
    미국이 손을 떼자 야당은 맥없이 굴복하였다. 이승만은 장택상 총리의 아이디어를 받아 타협안을 제시하고 구금된 국회의원들을 석방하여 '발췌 개헌'안이 기립투표로 통과 확정된다. 직선재 개헌안에 내각제 조항 몇 개가 혼합된 짬뽕 헌법이 되었다.
  • ◆5천년 만에 처음! 대통령 직선제 선거 실시

    8월5일 한국민들은 5천년만에 처음으로 '정치적 자유의 주인공'이 되었다. 국회의원들 손에서 대통령 선출권을 빼앗아 국민들 손에 쥐어줌으로써 직접선거, 보통선거, 평등선거, 비밀선거의 권리를 행사, 자기 대통령을 자기 손으로 뽑는 자주독립 국민임을 실감하는 순간이었다. 헌법 제1조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대한민국의 주권은 국민에게 있고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주권재민(主權在民) 헌법정신을 명실상부 실현시켜준 이승만 대통령! 그는 87%의 지지를 얻어 5천년만에 처음 자유국민이 뽑은 최초의 직선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다.
    "나의 일생은 투쟁의 역사다. 진리와 대의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는다. 국민들에게 감사할 뿐이다."  이승만은 당선소감 성명을 발표하였다.
    민족사 5천년만에 탄생한 자유의 나라 대한민국은 이렇게 해서 대통령 직선제까지 갖춘 자유민주의 체제를 완성하였다. 20대 시절 "미국보다 나은 민주공화국을 만들자"고 다짐한 이승만은 자기와의 약속을 무려 반세기만에 78세가 되어 지켜내고야 만 것이다.
  • 2. 1953년 세기의 대하드라마 – 반공포로 석방과 한미동맹 

    우리 역사에서 1953년의 이승만만큼 전세계와 혼자 맞서서 국가독립 안보를 위해 종횡무진 고군분투하여 승리를 거둔 지도자의 사례가 언제 있었던가 아니 세계 인류사에 드문 세기의 영웅 그 모습이다. 그것은 '이승만의 세계대전'이다. 해방정국 3년간 대한민국 건국투쟁이 1차 세계대전이라면 휴전반대-반공포로 석방-한미동맹 쟁취로 이어지는 3년간 대하드라마는 이승만의 2차 세계대전이라고 할만 하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말했다. "역사는 어느 집단의 힘으로 변화되는 게 아니다. 그 집단을 이끄는 창조적 천재의 능력만이 새로운 역사의 발전을 창조해왔다"고.

    ◆ 반공포로 석방 및 한미돔앵 체결 과정을 간략한 메모로 대신한다.

    -3월5일 소련 스탈린 사망. 휴전협상에 숨통.
    -포로송환문제로 교착되었던 판문점 휴전회담 급진전.
    _4월5일 제2군단창설식. 이승만 "통일 없는 휴전보다 국군이 압록강 국경으로 진격해야"
    -전국에서 "통일 아니면 죽음을 달라" 대대적 휴전 반대 시위.
    -4월11일 부상포로 교환 협정 타결.
    -4월 24일 이승만 "한국군 전시작전권 되찾아 단독작전하겠다" 아이젠하워에 서한.
    -4월27일 이승만. 미국에 "한미방위조약 체결 및 소련침략시 즉각 개입" 요구.
    -미국, "휴전 성립 전에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 못한다" 거부.
    -5월4일 미국, 이승만이 단독북진하면 제거 'Ever-Ready Plan' 작성.
    -5월6일 이승만, 아이크에 서한. "한미방위조약 체결 합의 해주면 휴전 동의"
    -5월12일 클라크 유엔군사령관, 이승만에게 "송환거부 포로들 중립국관리위에 이관"
    -5월25일 이승만, "반공포로를 중립국관리위에 이관 안된다" 미국에 통고.
            "유엔군이 철수하고 원조 중단해도 한국군은 단독북진 하겠다" 선언.
    -5월30일 이승만, 아이크에 서한 "중공군 잔류 휴전은 한국에 사형선고"
    -6월6일 아이크, 이승만에 서한 "휴전협정 체결후 한미방위조약 협상 용의" 이승만 거부.
    -6월11일 덜레스 국무장관, 이승만에 서한. "한국통일은 평화적 방법으로 하자"
    -6월17일 이승만, 미국대사에게 "미국은 한국을 세 번 배신했다. 조미수호조약 복원하라"
    -6월18일 0시 이승만, 반공포로 3만5천명 전격 석방 단행.
    -6월18일 아이젠하워 백악관회의 "이승만은 새로운 적. 용서할 수 없다"
             이승만 제거 군사작전 'Ever-Ready Plan' 발동 검토.
    ※판문점 휴전회담 전면중지. 공산측 전원 퇴장. 장기간 회담 거부.
    -6월19일 이승만 성명 발표 "내 책임하에 우리 국민을 석방했다. 석방이 너무 늦었다."
    -6월19일 이승만, 미국 항의에 답변 "우리 모든 분야에서 친구로서 헤어지자"
    -6월22일 이승만, 클라크에게 "한국 육해공군 모두 대폭증강해 달라. 휴전협정은 반대"
    -6월23일 이승만, 미국에 휴전협정 전에 한미동맹 체결등 4개조건 각서 전달.
    -6월24일 미국, 이승만에 '평화통일 협상' 약속, 휴전 불응하면 완전철군 최후통첩 내기로.
    -6월25일 아이크 대통령 특사 로버트슨 서울 도착 이승만과 회담 시작.
    -6월26일~7월12일 이승만-로버트슨 16일간 단독협상 진행. 5개항 합의.
    -7월25일 이승만, 미국에게 "일본이 한국침략할 때도 자동개입 방어하라" 요구
    -7월27일 판문점 휴전협정 서명. 한국 서명 불참.
    -8월5~7일 덜레스 미국무장관 내한, 이승만과 마지막 담판. '지동개입' 명문화 실패.
    -8월8일 한미상호방위조약 가조인. 이승만 "이 조약으로 자자손손 번영을 이룰 것"
    -8월10일 이승만 성명 발표 "북한 동포들이어. 실망하지 마시오. 결코 잊지 않소…"
    -10월1일 워싱턴에서 한미상호방위조약 공식조인.

  • 3. 1954년 제2차 개헌 '사사오입' 파동—'시장경제 혁명'

    해가 바뀌자 국회는 1월5일 한미상호방위조약을 비준한다. 미국의회도 26일 비준하였다.
    이승만의 숙원이자 미국의 조미수호조약 파기(1905년)에 대한 '복수'이기도 했던 한미동맹은 그러나 국회비준 만으로 발효되는 것은 아니다. 비준서를 교환해야 발효된다. 
    이승만은 비준서 교환을 무기한 미룬다. 왜냐하면 통일문제와 경제-군사원조 문제가 남았기 때문이다. 특히 통일문제는 지난해 8월 덜레스와 담판을 벌일 때 마지막 줄다리기 카드였다. "통일없는 휴전은 분단고착"이 될 것이기 때문에 결코 동의할 수 없다는 이승만에게 덜레스는 미국이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해주겠다고 큰소리쳤다. 그때 이승만은 웃었다. "다 이긴 전쟁으로도 달성하지 못한 미국이 탁상대화로 얻어낼 수 있겠느냐?" 이승만의 누그러진 태도에 덜레스는 거듭거듭 장담하였다. 그리하여 미국은 휴전협정 체결후 90일내로 '통일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회의'를 열겠다며 휴전협정에까지 명문화함으로써 이승만을 달래기에 이른다.

    <휴전협정 제4조 60항>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위하여 쌍방 군사령관은 쌍방의 관계 각국 정부에 정전협정이 조인되고 효력을 발생한 후 삼개월내에 각기 대표를 파견하여 쌍방의 한급 높은 정치회의를 소집하고 코리아로부터의 모든 외국군대의 철수 및 코리아 문제의 평화적 해결문제들을 협의할 것을 이에 건의한다."

     이 조항에 '통일'이란 단어는 없다. 아무튼 이 조항에 따라 열려야할 정치회의는 3개월 시한 10월27일이 지나도 해가 바뀌어도 열릴 기미가 없었다. 이승만의 거듭된 경고와 재촉을 받은 미국은 2월에야 판문점에서 예비회담을 시작하고 4월26일에야 제네바에서 유엔참전국등 19개국이 참가하는 정치회의가 개최되었다. 휴전협정을 6개월이나 위반한 것이었다.
    결론만 말하면, 제네바협상은 예상대로 공산권의 선전장으로 세월만 보내다가 실패로 끝났다.
    문제는 이 협상중 미국의 태도 변화였다. 북한의 제안 ‘남북총선거’를 덥석 받아들고 이승만의 동의를 요구한 것. 격분한 이승만은 "우리는 이미 유엔관리 총선을 했으니 북한만 하라"고 걷어찬 뒤 대표단을 철수시켜 버렸다. 미국도 따를 수 밖에 없음은 물론이다.
    이승만은 즉각 "휴전협정은 무효다. 단독 북진통일 하겠다"고 선언한다. 덜컥 겁먹은 미국은 "자살행위 말라. 그러면 한미방위조약 비준서 안주겠다"고 맞불을 놓았다. 
    이승만은 "마음대로 하라. 자살하는 것도 우리 고유권한이다. 우리 운명은 우리가 결정한다. 미국은 또 한국을 배신하지 않았느냐. 통일 약속을 지켜라"면서 휴전이전의 자세로 돌아갔다.
    '한국전쟁 휴전'을 대선공약으로 내세워 당선되어 겨우겨우 이승만으로부터 휴전을 얻어낸 아이젠하워는 전전긍긍, 이승만을 국빈으로 미국에 초청한다.
    워싱턴에 도착한 이승만은 미군용기 트랩을 내려가다 말고 멈춰서서 첫 포탄을 날린다.
    "겁쟁이 미국 때문에 남북통일이 날아갔다." 이 예고편을 시작으로 외교 협상의 달인은 방미중 대박을 연발한다. 미국 양원합동회의 연설은 자유세계의 영웅 이승만에게 집중된 미국 국민들을 열광시키고도 남았다. 초만원 방청객은 물론 국회의원들의 기립박수 33차례, 이승만은 이때 불굴의 통일신념을 다시 한번 토해낸다. "중공군이 존재하는 한 세계 평화는 없다. 한국군이 단독 격퇴할 테니 미국은 멀리서 공군 해군 지원만 하라. 또 다시 미국 청년들의 피를 흘리게 해선 안된다." 라디오 중계를 듣는 미국 어머니들이 눈물을 흘렸다.
    수많은 에피소드를 남긴 방미 협상 결과는 경제-군사 원조 10억달러에 육군20개사단과 해군공군 대폭 증강 현대화로 나타났다. 특히 주한미군의 최전방 배치에 합의, 이것은 한미조약에 명문화하지 못했던 ’유사시 미군 자동개입‘을 보완하는 사실상의 자동개입 조치인 것이다.
    한미형상단이 합의 의사록을 교환한 날이 11월17일, 그제서야 이승만은 비준서 교환에 동의, 그날로 한미동맹이 발효된다. 서울에서 조약 맺은 지 1년3개월 뒤의 일이다.
  • ◆ '사사오입 개헌'은 자유시장경제 체제의 탄생 

    부산정치파동에서 '대통령 직선제 헌법'을 만들어냈던 이승만은 2년후 헌법을 대폭 수정 보완한다. 제2차 개헌안이 상정된 것은 정확히 한미동맹 뱔효후 열흘 되는 11월27일이다. 표결결과 찬성 135표, 개헌정족수 136표에 한표가 모자랐다. 사회자 국회부의장은 '부결'을 선포하였다. 그런데 이틀후 29일 그는 "부결선포는 나의 착각"이었다며 '가결' 의사봉을 땅땅땅 쳤다. 야당의원들이 우루루 단상으로 몰려가 부의장의 멱살을 잡고 국회는 난투장으로 변했다. 
    '착각'이란 무엇인가? 이것이 바로 기발한 아이디어 '사사오입' 파동의 정체이다.
    당시 국회 재적의원은 203명, 그 3분의 2는 136명, 찬성 135명은 당연히 '부결'이 맞지만,
    '사사오입' 계산법에 따르면 203명의 3분의 2는 135.333...이므로 반올림하면 135명이란 것.
    왜 이승만 정부는 이처럼 반올림까지 하면서 개헌안을 통과시켜야만 하였을까?
    무엇을 개헌하고자 하였기에? 주요 개헌내용을 들여다보자.

    ▲국민투표제 도입 
    제네바 회담에서 북한제안 '남북총선안'을 미국이 동조, 요구했을 때 이승만은 "국민투표를 통한 국민동의 없이는 불가능"하다며 즉석에서 거부하였다. 그후 국민주권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거나 영토 변경등 중요 사안은 반드시 국민투표를 거쳐야 한다는 조항을 헌법에 명시한 것이다.

    ▲경제조항들을 대폭 자유화
    제헌헌법의 경제조항들은 대부분 사회주의 경제였다. 주요자원과 산업은 국유화(85조), 운수 통신 금융 전기 수도등 모두 국유 및 공영화, 대외무역도 국가관리 (87조), 사영기업도 국가의 필요에 따라 국유-공영화 또는 국가 통제(88조)할 수 있게 되어있었다. 심지어 "사기업의 근로자는 법률에 따라 이익분배에 균점할 권리가 있다.(18조)"고 했다. 제헌의원들은 아직도 오랜 세월 왕권독점경제나 일본의 식민통제 경제에 익숙했을 뿐더러 "공산주의와 대결하려면 이 정도는 돼야 한다"며 "우리도 마침내 민족사회주의를 실현하게 되었다"고 만세를 부를 정도였다.
    이승만은 청년시절 [독립정신]에서도 강조하였고 박사학위 논문에서 보듯이 자유경제 자유통상주의자이다. 더구나 30여년간 미국 자본주의 경험과 본인이 직접 회사를 경영했던 시장경제 지지자였기에 헌법의 사회주의 요수들을 전면 일소, 자유시장경제 체제로 개편하는 개헌을 단행한 것이었다. 국유화-공영화등 국가통제의 모든 조항들을 폐지하고 불가피하게 사유재산 침해의 경우엔 국가가 적정 보상하도록 의무화하였다.

    ▲국무총리 폐지 
    부산정치파동의 발췌개헌 결과 "통치체제의 모순 심각하다. 장관보다도 권한이 왜소한 총리는 국론분열의 요소“일뿐이므로 불합리한 점은 개혁한다"고 했다. 그리고 대통령 궐위 시엔 부통령이 대행한다고 신설했다. 이 조항이 3.15부정선거를 야기하게 된다.

    ▲초대대통령의 중임제한 철폐 
    제2차 개헌안의 부칙 마지막 줄에 "이 헌법 공포당시의 대통령에 대하여는 제55조1항 단서의 제한을 적용하지 아니한다."고 붙여놓았다. 즉 이승만 대통령의 1차 중임 제한을 철폐하여 종신 출마의 길을 열어놓는 것이었다.
    야당이 격분한 것은 '국무총리 폐지'와 함께 이 부칙 때문에 개헌 반대투쟁을 벌였는데 '사사오입 통과'라니, 이승만이 죽기까지 집권기회는 사라진 것, 이승만의 카리스마를 이길 자는 아무도 없으니 기막힐 노릇 아닌가. 헌법수호 특위를 만들고 "종신독재 타도"에 나선 야당의  투쟁은 언론을 앞세운 갖가지 형태로 이어져 1960년 정부통령 선거에서 절정을 이룬다. 
  • ◆ 이승만의 독립전쟁 구경을 끝내며

    부산정치파동 발췌개헌 과정에서 '독재자'로 낙인 찍힌 이승만이 왜 또 종신집권이 가능한 개헌을 감행하며 독재자란 오명을 자초하였는지에 관하여 '역사의 당시성(當時性)'을 현장 그대로 살펴 볼 필요가 생긴다. 
    첫째, 6.25전쟁이 끝난지 겨우 1년후 휴전협정에 서명도 거부한 대한민국은 대규모 중공-북한군의 재침략 위험과 대치상태이다.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미군의 자동개입'도 없는 정세하에서 살아있는 '단독북진 통일전략'을 감당할 사람은 전략의 장본인 이승만 밖에 누가 있겠는가.
    둘째, 철저히 파괴된 전쟁폐허에서 전후복구사업과 경제 부흥에 필요한 자금을 해마다 미국으로부터 '빼앗아오는 재주'를 가진 사람은 이승만 말고 아무도 없는 형편이다.
    셋째, 당시 돈이 없어 장관 월급도 쌀과 잡곡으로 지급하던 때, 정부예산의 몇십배 막대한 원조자금을 운용하는 복구사업을 통하여 이승만은 국민들의 경제능력 향상, 즉 국민경제의 기반을 닦아놓고 싶었다. 
    넷째, '전쟁도 눈에 안보이는' 야권의 권력쟁탈에 함몰된 국론분열상은 준전시상태의 국권안정에 치명적인 위기감을 야기하고 있었다. 당시 외무장관 변영태의 말로 보충해보자.
    미국에 출장갔던 변영태는 '사사오입 개헌'이 확정되었다는 뉴스를 듣고 달려온 미국기자들이 이승만 독재에 대해 질문하자 이렇게 답변하였다.
    "참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세계 공산주의가 80세 이승만의 은퇴를 허락하지 않는다. 그가 은퇴하면 대한민국은 머지않아 공산화된다. 이승만이 은퇴하면 대통령 지망자들이 수십명 쏟아져 나올 것이며, 그리되면 우익 표는 분산되고 위장 출마한 공산분자가 당선될 게 뻔하다."

    ◆ 이쯤 되면 알게 된다. 이승만은 전통적 독재자가 아니라 민주혁명가란 진실을!

    첫째, 건국혁명의 영웅 이승만의 위대함을 재확인한다. 건국한 자리에서 머물지 않고 보다 완벽한 독립국가의 꿈을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며 강대국의 살해협박에 굴하지 않으며 목숨을 걸고 끝내 국가목표를 실현해내는 불글의 신념과 용기와 지혜로움, 80세 인간의 지칠줄 모르는 종교적 열정과 리더십은 올리버의 지적대로 '신화속의 이승만'이 아닐 수 없다.

    둘째, 부산정치파동을 통하여 대통령 간접선거제를 대통령직선제로 바꾼 헌법을 만들어, 강대국의 내정간섭과 공산화의 틈새를 원천봉쇄하고, 국민에게 주권을 확보해주고, 반대 정치인을 한명도 희생시키지 않으며 자유민주의를 교육시킨 지도자의 고행길은 동서학문과 기독교정신을 체화시킨 이승만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영원한 민족 스승의 길'이었음을 새삼 실감하게 된다. 총 한방 안쏘고 대통령 스스로 직선제를 쟁취했으니 그것은 대통령의 민주화 혁명이라 해야겠다. 박정희-전두환 정권때 난리친 좌파운동권의 ’민주화 데모‘로부터 직선제가 시작된줄 아는 오해는 바로잡기 바란다.

    셋째, 약소국가 지도자가 최강국 미국을 비롯한 서방과 공산권까지 전셰계를 한손에 틀어쥐고 호령하며 전쟁하며 자유민주주의와 한미동맹 만리장성을 쌓아놓은 전략전술은 인류역사에 영원히 남을 역사적 승리이다. 강대국의 야만적 이기주의에 희생되는 반공포로들을 석방하며 "기독교 국가들이 기독교 정신도 모르느냐"고 호통칠 때 영국도 미국도 무릎을 꿇어야 했다. 인해전술의 학살자 마오쩌둥도 '경무대의 휴전협상'만 애타게 쳐다보며 "가장 무서운 적은 미국이 아니라 이승만"이라 고백하지 않았던가. 

    넷째, 자유민주공화국의 두 기둥 세우기,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자유민주 없이 시장경제 없고 시장경제 없이 자유공화국은 오래 못산다. 사사오입 변칙을 통해서라도 자유시장경제 체제를 확립한 그 결단은 역사적 평가를 받아 마땅하다. 사사오입 개헌은 독재개헌이 아니라 경제기적을 낳은 경제민주화 혁명, 사사오입이 일궈낸 시장경제 터전과 한미동맹이 없었다면 박정희의 산업화인들 어림없는 이야기이다. 

    6.25전쟁 중의 독립전쟁 3년- 공산군과 싸우고 동맹국과 싸우고 사대주의와 싸우고 포퓰리즘과 싸우고, 생명의 위기를 위기로 여기지도 않으며 '독재자' 비난공세를 철부지 투정으로 웃어 넘기며, 불완전했던 대한민국 독립구조를 혼자서 한꺼번에 리모델링 해낸 불굴의 선지자 이승만. 노련한 용미술(用美術)의 결정체 한미동맹은 동북아는 물론 세계를 균형잡는 영구평화체제이다. 그 어느 것도 한미동맹을 대신할 평화체제는 없다. "이 조약으로 자자손손 번영하리라"던 말대로 세계10대 부국 대한민국을 만들어주고 철벽같이 지켜주는 이승만은 그래서 위대한 건국의  아버지, 자유세계의 수호신이다. 
    아버지여, 저희들에게 용기를 부으소서. 자유신이여, 동맹자 트럼프에게 지혜를 내리소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