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니지서 딴 '박사준비과정' 학위로 HK연구교수직... 한국연구재단엔 '박사'로 기재
  • 중동학자 K씨의 최종 논문 표지에 기재된 학위명, '샤하다 디라싸트 무암마까
(شهادة الدراسات المعمقة·심화학습 학위)'. ⓒ뉴데일리 DB
    ▲ 중동학자 K씨의 최종 논문 표지에 기재된 학위명, '샤하다 디라싸트 무암마까 (شهادة الدراسات المعمقة·심화학습 학위)'. ⓒ뉴데일리 DB
    서울의 한 사립대학교 산하 중동 관련 연구소가 박사 학위를 필요로 하는 HK연구교수직에 자격 미달자를 채용한 사실이 뒤늦게 밝혀졌다. 당시 일부 심사위원들의 문제 제기가 묵살당한 정황까지 드러나면서, 연구소의 조직적 은폐가 있지 않았느냐는 의혹까지 나온다. HK연구교수는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인문한국지원사업(Humanities Korea Project)의 교수로서, 박사 학위 취득이 최소 자격으로서 재단 규정에 명문화 돼 있다. 

    ◇학계 교수들, "'무암마까'는 박사 학위 아니다"
    지난 2013년 4월, 튀니지 M대학교에서 아랍어학을 전공한 중동학자 K(당시 39세)씨는 A대학교 산하 중동 관련 연구소(이하 연구소)의 HK연구교수직에 지원했다. 지원 자격에는 박사 학위 취득이 명시돼 있었다. 그러나 K씨가 연구소에 제출한 M대학교 학위증명은 박사가 아닌, 박사준비과정 또는 석사에 해당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K씨가 채용 당시 연구소에 제출한 '2003년 취득 학위'엔 '샤하다 디라싸트 무암마까(شهادة الدراسات المعمقة, 이하 무암마까)'란 학위명이 등장한다. 한국어로 풀면 '심화학습 학위'다. K씨가 지원서에 기재한 논문의 표지(사진)에도 같은 용어가 등장한다. 

    튀니지 정부가 2001년 승인한 튀니지 고등학위법에 의하면 '무암마까'는 박사 학위가 아니다. 제18조 1항은 '무암마까'를 '박사과정 입학을 허가하는 수준'으로 정의한다. K씨가 '무암마까'를 취득한 2003년 2월은 튀니지 고등학위법이 승인되고 채 2년이 지나지 않은 시점이다.

    튀니지 고등학위법은 '무암마까'가 프랑스의 'D.E.A(Diplôme d'études approfondies·박사준비과정)'와 사실상 동일하다는 내용도 포함하고 있다. 튀니지는 과거 식민 지배를 받았던 프랑스 학제를 따르고 있다. 더욱이 법령에는 '박사 학위' 관련 규정이 따로 나온다. 법령 제20조에 박사 학위를 뜻하는 '둑투르(الدكتور,Doctor)'가 등장하는 것이다. '무암마까'가 박사 학위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무암마까' 규정은 2005년 튀니지 학제가 전면 개편되는 과정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개편과 관계없이 무암마까를 박사 학위로 볼 수는 없다는 게 아랍어권에서 학위를 취득한 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튀니지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한 국내 사립대학교의 한 교수는 "무암마까는 박사가 아니다"라고 못박았다. 이 교수의 학위증명엔 '둑투르'가 분명히 새겨져 있다. 아랍어권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다른 교수도 "석사냐 박사준비과정이냐 논란이 있을 수 있으나 한국 기준으로 볼 때 무암마까가 박사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고 했다.

    ◇'몰랐다' '노코멘트'… 채용 관련자들, 책임 회피
    2013년 4월 K씨의 채용이 유력시되자 일부 심사위원들은 "(K의) 학위에 문제가 있다"며 채용을 반대하고 나섰다. 그러자 연구소장 L씨는 채용을 일단 무산시켰다. 당시 심사에 참여했던 한 교수는 "소장을 포함한 심사위원 4명이 K씨를 채용하지 않기로 합의했다"고 말했다. 당시 심사위원 중 3명이 "당시 학위에 대한 지적이 있었으며 채용이 보류됐다"고 본지에 말했다. L씨는 그러나 "(1차 채용과정에서) 학위에 관한 지적은 없었다"고 부인했다.

    연구소는 같은 해 4월 29일 2차 공고를 냈다. 그러나 첫 채용과정에서 이의를 제기했던 심사위원들은 다른 이들로 교체된 뒤였다. K씨는 2차 지원을 통해 HK연구교수로 채용됐다. 당시 2차 심사위원으로 참여했던 한 외부 교수는 "K씨의 학위를 봤느냐"는 질문에 "기억이 안 난다"고 답했다. 이 교수는 "K씨의 채용을 원하는 연구소 분위기에 따라갔다"고 했다. 그러나 그 역시 "'무암마까'는 박사가 아니다"라고 했다.

    연구소가 있는 A대에 지금도 재직 중인 당시 내부 심사위원은 "불미스러웠던 일을 이제 와서 왜 들춰내려 하느냐"고 했다. K씨는 학계에 거짓 학위 논란이 퍼지면서, 연구소에 채용된 지 석달만에 사직서를 냈다.

    K씨 채용과 관련된 의혹들에 대해 연구소장 L씨는 "채용 당시에는 K씨의 학위가 석사에 해당하는지 몰랐다"며 "이후 튀니지 학제 개편 과정에서 무암마까가 석사로 분류됐다는 것을 확인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중동학계의 한 연구자는 "누구보다도 그(L씨)가 이 문제를 잘 알 텐데 채용 당시에는 몰랐다고 시치미 떼는 게 놀랍다"고 했다.

    ◇단독 연구비로 국비 1억 5000만원 받기도
    K씨는 HK연구교수 채용 이전인 2010년과 2011년에도, A대 소속으로 교육과학기술부(교과부) 학술연구교수 사업에 참여한 적이 있다. 연구비로만 약 1억 5000만원을 받았다. 교과부 사업 역시 연구자들의 박사학위를 전제로 한다.

    K씨가 연구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그는 지난 2010년 7월부터 2011년 6월까지 2800만원을, 지난 2011년 7월부터 2014년 6월까지 단독 연구를 진행하며 한국연구재단으로부터 약 1억 2000만원을 받았다. K씨 단독연구에 지원된 연구비만 1억 5000만원 수준인 것이다. 이는 국가과학기술지식정보서비스(NTIS)에서도 일부 확인이 가능하다. 2011년 진행된 연구의 경우 4000만원, 2012년 연구에 4000만원의 연구비를 받은 것으로 돼 있다. 

    취재 과정에서 K씨가 2007년 8월부터 2010년 7월까지 연구비로 4억 5000만원을 지원받았다는 내용을 연구소에 제출한 사실도 확인됐다. 다만 이 사업은 공동연구로 진행됐고, K씨는 팀원 자격이었다. K씨가 2007년 공동연구로 받은 연구비까지 합산할 경우, K씨에 대한 국비 지원금은 수억원 대로 불어나게 된다. 

    학위 논란에 대해 K씨는 "개인정보를 말할 의무가 없으며, 허위 정보로 기사를 쓸 경우 가만 있지 않겠다"고 했다. 그러나 국내 중동학계의 한 교수는 "K씨가 박사가 아닌 건 학계에서 누구나 아는 사실"이라고 말했다.

    K씨는 아직 학계에 남아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그는 경기도 소재 B대학교에서 2018년도 2학기 아랍어 강의를 맡은 것으로 확인됐다. K씨와 가까운 한 교수는 "현재 K씨가 튀니지 M대학교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으며 논문심사를 남겨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K씨, 한국연구재단 전산시스템에 여전히 '박사'로 등재
    문제는 K씨가 2018년 10월 현재, 한국연구재단이 운영하는 한국연구업적통합정보시스템(KRI)'에 여전히 박사로 등재돼 있다는 것이다. K씨는 어떻게 한국연구재단 공인 박사로 인정받게 된 걸까.

    한국연구재단에 따르면, 연구자는 KRI에 가입해 자신의 최종 학위와 출신대학 등을 스스로 입력한다. 연구자가 입력한 정보는 연구자 소속 대학이 확인하게 되고, 대학 자체 시스템과 한국연구재단 자체 시스템 '크림스'를 통해 학위 검증 절차를 밟게 된다. 대학의 검증이 완료되면 한국연구재단이 최종 승인하는 방식이다. 

    재단 관계자는 "재단은 연구자를 관리하는 곳이 아니라, 기초연구비를 주는 기관"이라며 "만약 학위 문제가 발생했다면, 책임은 전적으로 검증을 하지 못한 학교에 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학위 문제가 확인되면 행정, 사법 및 연구비 환수 절차가 진행된다"고 했다. 교육부 관계자는 "감사를 통해 학위가 허위로 드러나면 연구비 회수의 대상은 연구자가 아니라 대학 산학협력단이 된다"고 설명했다.

    이와 관련, A대 관계자는 지난달 27일 본지와의 통화에서 해당 사건에 대해 "(K씨의) 서류를 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알아보고 답변을 주겠다"고 했다. 그러나 이후 A대학으로부터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수차례 통화를 시도했지만 연락은 닿지 않았다. 다만, 최근 A대는 본지 취재가 시작되자 내부적으로 진상조사에 착수한 것으로 알려졌다.

    익명의 중동전문가는 "학계의 조직적 은폐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고 했으며, 또다른 중동전문가는 "중동학 관련 교수들의 학위 전수조사를 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