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정권수립 70주년, 9·9절에 다시 보는 역사 조작-왜곡 실태
  • 9월 9일은 북한의 소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정권’ 수립 70주년이 되는 날. 9.9절(九九節)로 불리는 이 날은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 김정일 생일인 2월 16일, 조선로동당 창건기념일인 10월 10일(雙十節)과 함께 북한의 4대 명절 중의 하나로 꼽힌다.

    북한은 9.9절을 맞아 대규모 열병식과 집단체조 등 행사 준비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이번 행사에 중국 권력 서열 3위인 리잔수(栗戰書) 전국인민대표대회 상무위원장, 발렌티나 마트비옌코 러시아 상원의장 등 외국 고위 인사들이 참석할 것으로 예정된 가운데,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핵무력 및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대해 어떤 메시지를 대내외에 선포할지 주목된다.

    하지만 북한의 9.9절은 엄밀이 말하면 조작된 사실을 토대로 제정된 것이다. 북한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정권 수립이 1948년 당시 조선반도에 거주한 전체 주민의 압도적인 지지 의사가 반영된 남북한총선거에 의해 이뤄진 조선반도 유일합법 국가이자 정부 출범이라고 김일성선집과 교과서, 학습서, 역사서, 사전, 보도선전물 등 모든 문헌에 기록하고 가르치고 있다.  
  • 김정은 시기 들어 2013년에 개정, 현재 사용하고있는 고급중학교 1학년(한국의 고교 1년) 교과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는 ①김일성이 남조선의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해 전(全)조선적인 중앙정부의 수립을 위해 남북한 전역에 걸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남한의 국회의원에 해당)을 뽑는 총선거 방침을 교시, 1948년 8월 남북한 전역에서 투표가 실시됐으며 ②여기서 선출된 대의원들이 그해 9월 8일 평양에서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회의기간: 9월 2-10일)에서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고 김일성(당시 공식 직책: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을 국가수반, 내각수상으로 만장일치로 추대했으며 ③이같은 헌법채택과 국가수반 추대에 따라 김일성이 9월 9일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조선반도의 유일합법국가로 국내외에 선포하고 정부를 조직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이런 내용들은 김일성과 김정일 시절 역시 같은 이름으로 출간된 고교용 역사교과서에도 거의 동일하게 기술돼 있다.

    특히 북한의 대표적인 역사서인 조선통사(1987)와 광명대백과사전(2007), 조선대백과사전(2001) 및 김일성선집, 김일성방송대학 강의자료, 로동신문과 우리민족끼리 등 보도선전물은 교과서의 개괄적인 내용 기술과는 달리 각종 수치 등 상세한 데이터를 제시하면서 1948년 남한 유권자 절대 다수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정권 수립을 위한 총선거에 참여했다고 적고 있다.  

    조선통사와 광명대백과사전 등 문헌들은 김일성의 교시에 따라 1948년 8월 남한에서 실시된 총선거에서는 전체 유권자의 77.52%가 투표에 참가해 1천 80명의 인민대표를 선출하고 다시 이들이 북한으로 넘어와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뽑았으며, 이 남한측 대의원들이 북한지역 선출 대의원 212명과 함께 헌법채택과 함께 김일성을 국가수반(내각수상)으로 선출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했다고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북한의 중앙선거위원회 발표를 인용한 북한 문헌들에 따르면 북한지역에서는 1948년 8월 25일 최고인민회의 구성을 위한 총선거를 실시, 총유권자 452만 6천 65명의 99.97%가 투표에 참가해 98.49%의 찬성으로 21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다. 하지만 “자유로운 환경에서 선거가 진행된 북한지역과는 달리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가혹한 탄압을 받고있고 테러가 살판쳤던 남한에서는 그해 7월 10일 부터 8월 20일까지 유권자들에게 몰래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지하비밀선거가 실시돼 전체 유권자 868만 1천 746명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2천 407명의 서명으로 1천 80명의 인민대표를 선출했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고로 당시 5.10총선을 앞둔 남한의 유권자수는 788만 4천 905명(국회선관위)에서 983만 4천명(미군정청)에 이르기까지 다양하게 집계됐다.

    문헌들은 이어 남측 인민대표들은 1948년 8월 21일 38선을 뚫고 해주의 인민회당에 모였는데 38선을 넘는 도중 일부가 참가하지 못해 결국 997명이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공식명칭은 조선최고인민회의대의원선거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으며 이 자리에서 정당·사회단체 대표로 구성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했다고 적고 있다. 북한은 360명은 인구비례를 감안, 서울에서 부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남한 인구 5만명당 1인이 선출됐다는 것을 뜻한다고 밝혔다. 이렇게 해서 첫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는 북측 대의원 212명과 남측 대의원 360명을 합쳐 572명이 확정됐으며 이들이 참가한 가운데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9월 2일부터 9월 10일까지 열렸다고 북한은 주장한다.
  • ▲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 정권 수립후 각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수상 김일성, 다음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 뉴데일리DB
    ▲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 정권 수립후 각료들이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오른쪽에서 네 번째가 수상 김일성, 다음이 부수상 겸 외무상 박헌영. ⓒ 뉴데일리DB
    헌법은 최고인민회의에서 9월 8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란 이름으로 채택, 공포됐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선거를 통해 김두봉을 최고인민회의 위원장(국가원수)으로 선출했다. 그리고 이날 북조선인민위원회위원장 김일성이 ‘정권이양에 관한 성명’을 발표한 뒤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권한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이양했으며 초대 내각수상으로 선출됐다. 김일성은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공식 선포하고 다음날인 10일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을 발표했다.

    북한은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우리민족끼리’ 등 대남선전선동매체들을 총동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던 날 서울을 비롯한 남한 도시들에는 ‘김일성장군 만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 등의 구호가 나붙었으며 서울 중앙청에는 5각별에 빛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기가 게양됐고, 남조선 전지역에 ‘인민공화국선포의 노래’가 울려퍼져 공화국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했다”고 날조된 허위사실을 전하고 있다. 선전매체들은 또한 “남조선의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도 연이어 공화국의 창건을 지지,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했으며, 서울의 신문들은 김일성의 초상화를 모시고 그를 공화국 내각수상으로 추대한데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했다”고 전하고 있다.

    문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정권 수립을 위해 남한의 절대다수 주민이 투표에 참여했다는 이런 북한의 주장이 우리나라 고등학교용 일부  교과서에 버젓이 실려 있다는 점이다.

    지난 2013년 8월 교육부의 검정을 통과한 동아출판사 간행 ‘한국사’ 교과서의 273쪽은 “북한은 남한에서 총선거가 실시되자 곧바로 정부 수립에 나섰다. 8월 25일에는 남북 인구 비례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뽑는 선거를 실시하였다. 북한과 남한에서 선거로 뽑힌 대의원들은 1948년 9월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헌법을 만들고, 김일성을 수상으로 선출하였다. 9월 9일에는 내각을 구성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선포하였다.”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 교과서는 또 주(注)를 달고 <남한에서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남한에서는 공개적으로 선출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밀리에 실시되었다>는 설명도 덧붙여놓고 있다.
  • ▲ 북한 김일성 정권이 ‘남북 인구 비례에 따른 선거’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서술한 동아출판사 간행  <한국사> 교과서의 표지. ⓒ 뉴데일리DB
    ▲ 북한 김일성 정권이 ‘남북 인구 비례에 따른 선거’에 의해 수립되었다고 서술한 동아출판사 간행 <한국사> 교과서의 표지. ⓒ 뉴데일리DB
    북한의 이러한 날조된 역사 기술은 북한의 초대 부수상 겸 외무상이었던 박헌영이 1948년 조선반도에서 수립된 2개의 정부 즉, 38선 남쪽의 대한민국정부와 북쪽의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중 유엔총회가 대한민국정부만을 유일합법정부로 인정할 가능성이 높다는 분위기를 사전에 간파하고 그해 10월 7일 트리그베 리(Trygve Halvdan Lie: 노르웨이인)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서한에 잘 나타나있다. 박헌영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선반도에서 '유일정통합법정부'(the only legitimate and lawful government)라는 것을 주장하기 위해 남북한총선거에 북한유권자 99.97%, 남한 유권자 77.52% 등 남북한 유권자 절대다수가 참가했다는 허위사실을 적시한 것이다. 실제 유엔총회는 북한의 그같은 주장을 거부하고 1948년 12월 12일 총회결의 195호를 통해 찬성 48, 반대 6, 기권 1표로 대한민국만을 한반도유일합법정부로 승인했다.

    북한은 1949년 10월 14일에도 유엔결정에 대한 반대성명을 들고 나왔다. 북한은 역시 외무상 박헌영의 이름으로 유엔사무총장에게 보낸 성명서에서 “만일 유엔이 대한민국정부를 계속 인정하게 되면 조선인민은 모든 수단과 방법을 다해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몰아내고 조국을 통일하겠다”라고 주장하고 이를 언론에 공표했다. 이에 대해 유엔총회는 10월 21일 총회결의 제293호를 통해 1948년 12월12일의 총회결의 195호를 거듭 확인하면서 대한민국이 한반도유일합법정부임을 재확인했다.
  • ▲ 동아출판사 간행 <한국사> 교과서의 북한정권 수립에 관한 부분. 남한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김일성 정권 수립에 참여한 것으로 기술돼있다. ⓒ 뉴데일리DB
    ▲ 동아출판사 간행 <한국사> 교과서의 북한정권 수립에 관한 부분. 남한 유권자들이 선거를 통해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김일성 정권 수립에 참여한 것으로 기술돼있다. ⓒ 뉴데일리DB
    물론 1948년 9월 북한 최고인민회의 개최를 앞두고 남한에서는 불법화된 남로당의 지하당원들끼리 비밀리에 서명하는 방법으로 자기들만의 인민대표를 뽑았던 사례가 없지않았고, 실제 박헌영(북한 초대 내각 부수상 겸 외무상), 홍명희(소설 ‘임꺽정’의 작가로 내각 부수상 역임), 김달삼(제주 4.3 사건을 주도한 남로당원) 등 일부 좌익 인사들이 남한지역에서 뽑힌 자칭 인민대표라며 38선을 넘어 해주의 남조선인민대표자회의에 참석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으나 남한 전체 유권자의 77.52%인 673만 2천 407명이 그런 비밀투표에 참가했다는 주장은 그 신빙성이 전혀 없다.

    언론인 출신의 북한연구 전문가인 김학준씨는 그의 저서 ‘북한 50년사: 우리가 떠안아야할 반쪽의 우리 역사’(동아출판사, 1995, p. 126)에서 당시 남한에서 그같은 선거가 있었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고 말했다.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허구라는 뜻이다.

    이승만 대통령은 1948년 9월 2일에 AP통신 기자로부터 600만명 이상의 남한주민이 투표에 참가했다는 북한의 주장에 대한 논평을 요구받고 ‘근거없는 기만’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우리는 비록 상호 기만하는 시대에 살고 있을망정 인민(국민)은 속지 않을 것이다. 북한의 소련 정권은 유엔총회에서 이 황당무계한 주장을 행할 것으로 추측되는데, 그들은 한국 인민이 명백히 아는 바와 같이 유엔총회에서 가소롭다고 생각될 것이 확실하다. 유엔위원단의 감시하에 700만명의 남한인민은 5월 10일 선거에 투표하여 우리 대한민국을 수립한 국회를 선출하였던 것이다. 공산당이 선전하는 바와 같이 이들 남한시민 중에서 600만명이 전향(轉向)하여 하등의 법적 근거도 가지지 않는 정부에 재차 투표하였다는 것은 우리들 시민으로서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근거 없는 기만에도 불구하고 북한 인민은 합법적 정부가 서울에 수립되었으므로 소련이 허락만 한다면 곧 이 정부에 참가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3선 의원의 언론인 출신 정치인 손세일씨는 ‘월간조선’ 2012년 11호에 연재한 ‘이승만과 김구’에서 1948년 8월 남한 유권자 77.48%(77.52%의 오기인 듯)가 북한 김일성정권 창출을 위한 투표에 참가했다는 것은 북한측의 발표에만 있는 허구라면서 소위 ‘남한 비밀 지하선거’의 실상을 아래와 같이 말했다.
     
    “북한의 소련 군정 당국은 스탈린의 지시를 받고 김일성을 조종하면서 이른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 과정을 철저히 관리하였다. 정부의 모태(母胎)가 되는 최고인민회의(한국의 국회에 해당)를 구성할 대의원 수를 인구 5만명에 1명씩으로 하고 인구 비례에 따라 남한 대의원은 360명, 북한 대의원은 212명으로 할당하였다.
     
    북조선 대의원 선거는 8월 25일로 정하였고, 남한에선 남로당의 주도하에 할당된 대의원 수의 3배수인 1천 80명의 인민 대표를 먼저 뽑기로 하였다.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은 이 불법 ‘지하선거’를 돕기 위하여 북한에 있던 정치 군사 간부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 학생들을 동원하였다. 200여 명을 뽑아 선거를 진행할 전권위원으로 임명, 남한 각지로 밀파한 것이다. 이들은 7월 10일쯤부터 닷새에 걸쳐 개성, 강원도의 연천(漣川), 양양(襄陽) 방면으로 38선을 넘어 담당 지역으로 잠입했다.
     
    이들은 남로당원과 좌익세력을 상대로 한 지하선거를 공작하기 시작하였다. ‘지하선거’를 치르기가 너무 위험한 지역에서는 전권위원들이 골방에 들어앉아 제멋대로 연판장을 조작, 중앙에 올려보내기도 했다. 군중집회를 연 적이 없는 곳에서 “군중집회를 열어 서명날인을 받았다”는 연판장이나, “선거를 치렀다”면서 투표용지를 보낸 허위 사례도 없지 않았다고 한다. 아무 이름이나 적고 적당히 도장을 파서 찍는 경우도 있었다. 도토리나 감자로 도장을 파서 찍기도 했다.
     
    불법적이고 기만적인 ‘지하선거’를 통하여 선출된 1천 80명의 인민대표가 비밀리에 월북하였다는 것이 북한 측 발표이다. 제주도의 4.3 사건을 주도한 스물 두 살의 청년 김달삼(金達三)은 목포를 거쳐 해로(海路)로 해주에 도착했다.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는 8월 21일부터 26일까지 해주시의 인민회당에서 열렸다. 보고자는 남조선의 전(全)유권자 868만1746명 가운데 77.48%에 해당하는 673만 2407명이 투표에 참가했다고 발표했다. 물론 믿을 수 없는 숫자이다. 과도정부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은 8월 20일 현재 ‘지하선거’와 관련하여 구속된 자는 1379명인데, 그 가운데 226명이 송청(送廳)되고, 414명은 치안재판에 회부되었으며, 123명은 석방되고, 나머지 616명은 유치 중이라고 8월 24일에 발표했다.”
  •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돌 경축준비위원회 여러 나라에서 결성됐다고 전하는 조선중앙통신의 2018년 7월 21일자 보도기사. ⓒ 뉴데일리DB
    ▲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 70돌 경축준비위원회 여러 나라에서 결성됐다고 전하는 조선중앙통신의 2018년 7월 21일자 보도기사. ⓒ 뉴데일리DB
    북한 문헌들은 이와 함께 조선민주의인민공화국과 북한정권이 김구, 김규식 등 남한의 민주세력도 인정해 탄생한 국가이며 정권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북한은 ‘전조선적인 통일중앙정부’ 수립 명분을 쌓기위해 1948년 4월 평양에서 열린 ‘남북연석정치협상회의’에 김구, 김규식 등 이른바 남한 ‘협상파’의 참여로 남북한의 좌우파 대부분이 승인하고 결정한 바에 따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이 만들어지고 정부가 수립됐다고 주장하면서 자기들이 유일정통합법정부라고 우기고 있다.

    4월 19일부터 23일까지 평양의 모란봉 극장에서 열린 남북연석정치협상회의에는 좌·우를 불문하고 남한의 41개 정당·사회단체와 북한의 15개 정당·사회단체에서 선출된 695명의 대표자가 참석했다. 김구와 김규식은 1948년 4월 30일 평양 김두봉의 집에서 김일성, 김두봉과 함께 최종 담판의 성격을 가진 이른바 ‘4자 회동(4김 회동)’에서 이승만의 단선·단정 반대와 함께 김일성에게도 단독정부 건설을 중단해 줄 것을 요청했다. 이날 회동이 끝난 뒤 ‘전조선 제정당·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의 명의로 발표한 성명은 ①남북한 모두에서 외국군의 즉시 철군 ②외국군의 철수 후 내전이 발생할 수 없다는 점 확인 ③전조선정치회의 소집→임시정부 수립→총선으로 입법기관 설립→헌법 제정과 통일정부 수립의 4단계 통일정부 구성안 ④남조선 단독선거 절대 반대 등의 4개 항을 담았으나 ②항과 ③은 북한으로서는 동의, 시행하기 어려운 내용이었고 결국 북한을 방문한 김구 일행은 철저히 역이용당한 꼴이 되고 말았다.

    남한이 먼저 단독선거(1948년 5.10선거)를 실시해 의회를 구성, 헌법을 제정·공포(1948년 7월 17일)하고 단독정부수립(1948년 8.15)을 했기 때문에 북한이 뒤늦게 1948년 9월 9일 공화국창건과 함께 정부를 수립하게 됐으며 결국 분단의 책임이 미국과 미국의 추종세력인 남한에 있다는 북한의 주장 또한 완전한 역사 왜곡이자 조작이다.

    북한의 인민정권 수립은 같은 해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수립보다는 25일 정도 늦은 것이지만, 실제로는 1946년 2월 8일 조직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北朝鮮臨時人民委員會), 그리고 이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이어 1947년 2월 21일 출범한 ‘북조선인민위원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는 그때까지의 북조선 5도행정국위원회를 대신해 북한지역을 총괄한 통일적인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토지개혁, 중요산업 국유화 등 일련의 법령개정을 통해 사회주의적 개조를 단행하면서 실질적인 정권기구의 역할을 수행, 분단정권의 토대를 구축했다.

    이처럼 단독정부나 다름없는 인민정권을 이미 수립했기 때문에 북한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이후 1946년 9월 24일 유엔 운영위원회의 결의를 거쳐 1947년 11월 14일 유엔총회에서 확정된 ‘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총선거안’을 거부한 것이다. 북한의 이러한 거부는 남북을 통합할 정부수립이 무산됐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분단을 막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잃어버린 것으로 미·소의 한반도 분할 점령후 분단의 1차적 책임이 분명히 북한에 있음을 부인할 수 없는 대표적인 사례에 해당한다.

    실제로 북한의 모든 문헌들은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가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의거한 ‘인민민주주의정권’, 북조선인민위원회가 민주선거에 의해 창설된 ‘조선반도 최초의 프롤레타리아독재정권’으로 규정, 그 성격과 기능이 정부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에 대해 김일성은 “로동계급이 령도하는 로농동맹에 기초하여 광범한 반제반봉건적 민주력량을 망라하고 있는 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에 의거한 인민정권으로서 인민민주주의독재의 기능을 수행하였습니다”(김일성저작선집 제5권, p. 139)라고 하여 그 기능과 성격을 밝히고 있다.

    이어 1946년 11월 실시된 시군 인민위원회 선거, 1947년 2월 실시된 면·리 인민위원회 선거를 거쳐 1947년 2월 17일 최고입법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가 발족함에 따라 2월 21일 북조선인민회의는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를 개편,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 출범을 의결했다. 이처럼 선거에 의해 조직된 북조선인민위원회에 대해 김일성은 “우리당은 우리 혁명의 무기인 인민정권을 사회주의 혁명의 임무를 수행하는 데 맞게 더욱 발전시킬 과업을 내놓았습니다. 그리하여 력사적인 첫 민주선거를 실시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창설하였습니다. 이것은 우리 나라에 탄생된 첫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이었습니다”(정치사전,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73, pp. 498-499)라고 규정, 소위 민주선거에 의해 탄생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임을 분명히 했다.
       
    따라서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은 남한이 먼저 8월15일 단일정부를 수립해 분단의 고착화를 가져왔다는 주장을 뒤집는 역사적인 증거이기도 하다. 특히 북한 스스로 북조선림시인민위원회와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조선반도에에 탄생한 최초의 정권이라 규정해놓고 남한의 선(先)단독정부수립 운운(云云)하는 것은 자체 모순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아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과 김일성정권 수립에 대한 북한 문헌들의 조작·날조·왜곡된 기술을 모은 것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남북한총선거를 통해 수립된 유일 합법국가다”

    ...주체37(1948)년 5월 (남조선에서) 미제와 그 앞잡이들이 벌려놓은 단독선거는 사실상 파탄되고말았다. 그러나 미제는 《선거》결과를 날조하여 친일친미파, 민족반역자들로 《국회》를 꾸며냈으며 이어 괴뢰정부를 조작하려고 날뛰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민족분렬의 위기에 대처하여 주체37(1948)년 6월 지체없이 전조선적인 정부를 세울데 대한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지체없이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독정부를 세울것이 아니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로써 전조선정부를 세워야 하겠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북남조선총선거를 실시해서 전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세울데 대하여 결정되였다.(중략)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공화국창건을 위한 북남총선거를 실시하도록 하시였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뜻깊게 맞이하기 위한 인민들의 혁명적열의가 비상히 높아진 가운데 전국각지의 선거구들에서는 대의원후보자 추천사업이 활발히 진행되였다. 평안남도 강동군 승호선거구 선거자들은 위대한 수령님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첫후보자로 높이 추대하였다. 주체37(1948)년 8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북남총선거가 승리적으로 진행되였다.

    남조선에서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가혹한 탄압을 피하여 비밀리에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인민대표들을 선출한 다음 선출된 인민대표들이 사선을 헤치고 북반부 해주에 넘어와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거하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께서는 북남총선거의 빛나는 승리에 기초하여 주체37(1948)년 9월 평양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를 여시였다.

    북으로는 온성, 신의주로부터 남으로는 부산,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각지에서 선거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회의장인 모란봉 극장에 모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회의참가자들의 열광적인 환호에 답례하시며 회의장에 나오시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채택하였다. 회의에서는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을 담아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전체 회의참가자들은 끓어오르는 감격과 기쁨속에 위대한 수령님을 우러러 오래동안 폭풍같은 환호를 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9월 9일 공화국정부를 조직하시고 영광스런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항일혁명투쟁의 불길속에서 마련하신 혁명전통을 계승하고 북남조선 전체인민의 의사에 의하여 세워진 우리의 유일한 합법국가이다.

    합법적 국가란 전체인민의 의사가 반영된 헌법에 기초하여 세워진 국가라는 뜻이다. 우리 나라에는 북남총선거에 의하여, 다시말해서 북과 남 전체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에 의하여 세워진 국가가 우리 공화국뿐이므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우리의 유일한 합법국가이다.

    그리고 로동자, 농민을 비롯한 근로인민의 리익을 대표하고 그들의 자주성을 철저히 옹호하는 참다운 인민의 국가이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력사상 처음으로 국가와 사회의 참다운 주인으로서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존엄있는 인민으로 되었다. 그리고 우리 나라는 당당한 자주독립국가로서 주체의 기치, 선군의 기치높이 국제무대에 떳떳이 나서게 되었다.(출처: 위대한 수령 김일성대원수님 혁명력사(고급중학교 제1학년용), 평양: 교육도서출판사, 주체102(2013)년, pp.151-155.)

    ▲“남한 유권자 77.52%가 선거참가해 조선인민공화국과 김일성정부 수립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자기의 의사와 리익을 대표하는 합법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가지게 되였으며 세계 민주진영의 여러 나라들과 어깨나란히 국제무대에 진출할수 있게 되였습니다.》

    그것은 한마디로 말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남조선에서의 《단독선거》에 의해 조작된 《단독정부》를 반대배격하고 전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수립을 지지하는  북남전체조선인민의 총선거에 의해 수립되였기때문이다.

    남조선에서의 《단독정부》조작책동은 전조선을 저들의 식민지로 만들려는 미제의 침략적야망의 실현이였다. 그러기에 당시 북남전체 조선인민은 미제에 의한 《단선단정》책동을 결사반대하였으며 민주주의적인 진정한 인민의 정부수립을 념원하였다. 그렇기때문에 1948년 4월에 열린 남북련석회의에서는 미제와 그 주구 반동들에 의해 조작되는 그 어떤 《정권》도 인정할수 없다는것을 확인하고 《단선단정》조작책동을 반대하는 전민족적인 공동투쟁을 벌릴것을 호소하였으며 뒤이어 진행된 4월 30일 우리 당을 비롯한 북남조선 정당, 사회단체지도자들은 협의회를 가지고 통일적인 중앙정부로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할데 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그리하여 1948년 8월말에 북남총선거가 실시되였다.

    ※ 북조선에서는 유권자 99.97%가 선거에 참가하여 99.49%가 민전립후보자들에게 찬성투표하였다. 남조선에서는 미제와 괴뢰도당의 류혈적탄압속에서 7월 15일~8월 20일까지 남조선전역에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대표자선거에 유권자의 77.52%(77.55%의 오류인 듯)가 참가하여 선출된 1080명의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 대표자들이 선거에 참가하였다.

    이리하여 조선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는 빛나는 승리로 끝났다. 북남총선거의 결과 572명(북조선에서 212명, 남조선에서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이 선거되였다.

    조선인민의 한결같은 념원과 의사에 따라 1948년 9월 9일에는 통일적중앙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가 조직되였으며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였다.

    이처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전조선적인 총선거에 의해 수립된 합법적인 통일적중앙정부이다. (출처: 김일성방송대학 강의자료(강사 박철만 적), “1948년 9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이 통일적중앙정부의 수립이라고 할 수 있는 정당한 근거는 무엇입니까”​, 2016, 11, 22)    
       
    ▲“조선인민공화국 창건일 서울에선 김일성 만세부르고 중앙청에 인공기 게양됐다”

    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참석밑에 북남총선거의 성과에 기초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위한 력사적인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성대하게 열리였다. 회의에는 사선을 헤치고 38°선을 넘어온 남조선출신 대의원들을 포함하여 572명의 대의원들이 참가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 《정권위양에 관한 성명》을 발표하시여 해방후 3년간 북조선에서 새 조국건설과 조국의 통일독립을 위한 투쟁에서 이룩한 성과와 업적들을 총화하시였다.

    그리고 전체 조선인민이 일일천추로 바라던 전조선의 통일적인 최고립법기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인민회의가 북남조선 전체 인민의 총의에 의하여 창설된 조건에서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정권과 권한을 최고인민회의에 위양한다는 것을 선언하시였다. 최고인민회의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발표하신 《정권위양에 관한 성명》을 전적으로 지지찬동하였다. 그리고 북조선지역에서 실시되고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통일적중앙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으로 승인하고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와 공화국정부구성에 관한 결정을 채택하였다.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전조선의 통일적중앙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내각수상으로,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이것은 온 민족의 절절한 념원과 일치한 의사를 반영한것이였다. 하기에 전체 조선인민은 이 대경사를 최대의 영광으로 여기면서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최고인민회의 위임에 의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조직하시였다. 공화국정부는 련합내각으로 구성되였으며 거기에는 북남조선의 기본적인 정당, 사회단체대표들이 참가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발표하신 내각성원들중에는 북반부에서 선거된 대의원도 남조선에서 온 대의원도 있었다. 그런가 하면 항일혁명투사들도 있었고 국내에서 활동하던 독립운동자, 민족주의자들도 있었다. 더우기 남조선의 홍명희, 리용, 리극로, 백남운, 리병남 등 애국적인사들이 공화국정부의 중요직책에 등용된것은 매우 특기할만 한 사실이다. 이것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북반부의 공산주의자들뿐아니라 남조선의 민족주의자들, 정견과 신앙, 출신을 초월하여 북과 남의 광범한 각계층 대표들로 구성된 범민족련합정부라는것을 보여주고있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단독정부》를 조작한 미국과 그 앞잡이들의 민족분렬책동에 대처하여 북남조선 전체 인민이 주체가 되여 진행한 북남총선거에 의해 수립된 합법적인 정권이다. 이러한 합법적이고 통일적인 전민족정부의 수립은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 제시하신 전조선통일정부로선의 위대한 승리였다...중략... 1948년 9월 9일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마침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전국각지에서는 공화국의 창건을 경축하는 군중대회와 시위들이 성대히 벌어졌다. 1948년 9월 12일 평양에서는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모시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군중대회가 성대히 열리였다. 이 력사적인 대회에서 위대한 김일성주석께서는 《모두다 공화국정부주위에 굳게 단결하여 민주조선창건을 위하여 전진하자》라는 력사적연설을 하시였다. 연설에서는 공화국의 창건과 중앙정부의 수립이 북남조선인민의 단결된 투쟁의 결실이며 승리라는데 대하여 강조되고 공화국정부와 우리 인민앞에 나선 력사적과업이 천명되였다.

    위대한 김일성주석을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고 그이의 귀중한 가르치심까지 받아안은 전체 인민은 끝없는 기쁨과 무한한 영광을 안고 중앙정부수립을 경축하는 군중대회와 시위를 성대하게 진행하였다. 남조선의 민주주의 각 정당, 사회단체들도 련이어 공화국의 창건을 지지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서울의 신문들은 위대한 김일성주석의 초상화를 모시고 그이를 공화국 내각수상으로 추대한데 대해 대대적으로 보도하였다. 서울을 비롯한 도시들에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만세!》의 구호들이 나붙었으며 애국투사들은 서울《중앙청》에까지 공화국기를 게양하여 공화국에 대한 절대적인 지지를 표시하였다.(출처: 우리민족끼리, 주체100(2011)년 11월 6일자 기사)

    ▲“조선인민공화국은 전체 남북인민의 총의를 반영한  전(全) 조선적인 통일적 중앙정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우리 혁명발전의 성숙된 요구와 당시 조성된 정세를 깊이 통찰하신데 기초하여 1948년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통일적중앙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기위한 사업을 적극 다그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8년 6월 29일에 북과 남의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를 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협의회에서 하신 보고 《남조선단독선거와 관련하여 우리 조국에 조성된 정치정세와 조국통일을 위한 투쟁대책》에서 남조선의 5.10 망국적단독선거와 관련하여 결정적구국대책으로서 지체없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여 전조선적인 통일적중앙정부를 세울데 대한 혁명적인 방침을 제시하시였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이해 6월 29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를 소집하시고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지체없이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시하여야 하겠습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단독정부를 세울것이 아니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로써 전조선정부를 세워야 하겠습니다.》(출처: 김일성저작집 4권, p. 356; 김일성선집 8권, p. 111))

    ▲“1948년 9월 9일은 김일성수령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공화국정부를 조직한 날”

    통일이냐 분렬이냐, 자주독립이냐 식민지예속이냐 하는 이 결정적시각에 우리 인민이 나아갈 길은 오직 지체없이 전조선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창건하는 것이였다. 협의회에서는 남조선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다음 전조선적인 선거를 실시하며 그에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창설하고 중앙정부를 세울것을 결정하였다. 1948년 8월 25일 온 민족의 드높은 열의와 감격속에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진행되였다. 선거는 북과 남의 정세가 서로 다른 구체적 실정에 맞게 각이한 방법으로 실시되였다.

    북반부지역에서는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의 방법에 따라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선거가 진행되였다. 유권자의 99.97%가 선거에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써 21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출하였다. 남조선에서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탄압책동을 고려하여 2중적인 선거방법, 다시말하여 유권자들이 비밀리에 서명의 방법으로 인민대표를 선거한 다음 그 인민대표들이 북반부에 들어와 대표자대회를 열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거하기로 되였다.

    탄압과 테로가 살판치는 속에서도 남조선인민들은 8월 20일 현재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2,407명의 서명으로 1,080명의 인민대표를 선출하였다. 피선된 인민대표들은 8월 21일 북반부지역인 해주에 들어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가지였다. 대회 제5일회의에서 추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립후보자들에 대한 비밀투표가 진행되여 남조선인구 5만명당 1명의 비례로 360명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남북총선거의 승리로 우리 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 되는 전조선의 통일적인 최고립법기관인 최고인민회의가 세워지게 되였다. 1948년 9월 2일 평양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먼저 전인민적토의를 거쳐 전체 조선인민의 일치한 지지와 찬동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심의하고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의 상설조직으로서 최고인민회의상임위원회를 선거하였다.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5일회의)에서는 전체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에 의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8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고 공화국정부를 조직하시였으며 다음날에는《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발표하시였다.(출처: 조선통사(하), 평양: 사회과학출판사, 1987, pp. 363-365.)

    ▲“남한에서 선출된 인민대표 1천80명이 월북해 남한 몫 최고인민위원회 대의원 360명을 뽑아 건국과 정권수립 참여”

    위대한 수령님의 현명한 령도 밑에 주체 37(1948)년 8월 25일 남북조선 총선거는 성과적으로 진행되였다. 북반부에서는 합법적으로 민주주의적 선거를 실시하여 21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출하였으며 남조선에서는 비밀리에 선거자들의 서명을 받는 방법으로 1,080명의 인민대표들을 선출하고 그들이 해주에 모여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고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중략)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9월 9일 조선인민의 통일적 중앙정부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조직하시고 영광스러운 우리 조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출처: 조선대백과사전 제18권, 백과사전출판사, 주체90(2001)년, p.247)

    ▲“남조선에서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탄압책동을 고려하여  유권자들이 비밀리에 서명하는 방법으로 인민대표를 선출했다”

    조선인민의 의사를 대표하는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을 세우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을 실시하여 북남조선 정당, 사회단체대표들로써 전조선적인 중앙정부를 세울데 대한 방침은 조선인민의 의사와 념원을 가장 정확히 반영한 정당한 방침이였다. 이 방침은 해방직후 당의 정치로선에서 천명된 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로선을 실현하며 미제국주의자들의 민족분렬책동에 심대한 타격을 주고 국토완정과 조국통일을 이룩해나가기 위한 적극적이고 구국적인 대책이였다.

    주체37(1948)년 6월 29일 남북조선 정당, 사회단체들의 지도자협의회에서는 남조선에서 강압적으로 실시된 비법적인 단독<선거>의 무효를 선언한 동시에 전조선적인 선거를 실시한데 기초하여 최고인민회의를 구성하고 중앙정부를 세울것을 결정하였다. 이해 8월 25일 온 민족의 드높은 열의와 감격속에 북남 전지역에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가 진행되였다. 선거는 북과 남의 정세가 서로 다른 구체적 실정에 맞게 각이한 방법으로 실시되였다. 북조선에서는 일반적, 평등적, 직접적 비밀투표의 방법으로 자유로운 분위기속에서 진행되였다면 남조선에서는 미제와 그 앞잡이들의 탄압책동을 고려하여 2중적인 선거방법, 다시말하여 유권자들이 비밀리에 서명의 방법으로 인민대표를 선거한 다음 그 인민대표들이 북조선에 들어와 대표자대회를 열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을 선거하였다. 북조선에서는 유권자의 99.97%가 선거에 참가하여 98.49%의 찬성투표로써 21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들이 선거되였다.

    탄압과 테로(테러)가 살판치는 속에서도 남조선인민들은 전체 유권자의 77.52%에 해당하는 673만 2,407명의 서명으로 1,080명의 인민대표를 선출하였다. 선거된 인민대표들은 8월 21일 해주에 들어와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선거를 위한 남조선인민대표자대회를 열었다. 대회 제5일회의에서 추천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립후보자들에 대한 비밀투표가 진행되여 남조선인구 5만명당 1명의 비례로 360명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북남총선거의 승리로 우리나라 력사에서 처음으로되는 전조선적인 통일적최고립법기관으로서 최고인민회의가 세워지게 되였다.

    주체37(1948)년 9월 2일부터 10일까지 평양에서는 최고인민회의 1차회의가 열리였다. 회의에서는 먼저 전인민적토의를 거쳐 전체 인민의 일치한 지지와 찬동을 받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헌법을 심의하고 만장일치로 채택하였으며 전조선최고립법기관의 상설조직으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를 선거하였다. 9월 8일 최고인민회의 제1차회의(5일회의)에서는 전체인민의 한결같은 의사와 념원에 의하여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내각수상, 국가수반으로 높이 추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조직하시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으며 다음날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의 정강》을 발표하시였다.(출처: 광명대백과사전 제1권, 조선백과사전편찬위원회 력사부문편찬위원회편, 평양: 백과사전출판사, 주체96(2007)년, pp. 531-532.)

    ▲“북남총선거결과는 계급과 계층, 정견과 신앙, 지역적 차이를 초월하는 온 겨레의 지향이 무엇이였는가를 똑똑히 보여준다”

    지금으로부터 63년전인 주체37(1948)년 8월 우리 나라에서는 력사상 처음으로 통일적중앙정부수립을 위한 북남총선거가 진행되였다. 당시의 기록에 의하면 자유로운 환경에서 선거가 진행된 북반부에서는 선거자총수의 99.97%가 투표에 참가하여 212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한편 남조선에서도 절대다수의 선거자들이 자기의 손으로 1,080명의 인민대표들을 선출하였으며 그들이 해주에 모여 대표자대회를 열고 360명의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선거하였다. 북남총선거결과는 계급과 계층, 정견과 신앙, 지역적차이를 초월하는 온 겨레의 지향이 무엇이였는가를 똑똑히 보여준다. 그것은 외세의 침략과 간섭을 배격하고 자주적인 통일독립국가를 일떠세우려는 우리 겨레의 한결같은 의사와 요구의 반영이였다.

    어버이수령님의 현명한 조치와 세심한 령도에 의하여 북남총선거는 성과적으로 결속되였으며 우리 겨레는 마침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창건되는 력사의 시각을 맞이하게 되였다. 공화국정부에는 전체 조선인민의 향도적력량인 조선로동당을 비롯하여 조선민주당, 천도교청우당 등 공화국북반부의 정당들과 근로인민당, 조선인민공화당, 민주독립당 등 남조선의 민주정당들 그리고 북과 남의 민주주의적인 사회단체대표들이 참가하였으며 내각성원들가운데서 절반이 남조선정치인들이였다. 당시 정부의 부수상 3명가운데 2명과 최고인민회의 의장도 남조선출신이였다는 사실은 위대한 수령님께서 창건해주신 우리 공화국이 온 민족의 의사와 요구를 대표하고 옹호하는 통일적인 중앙정부라는것을 뚜렷이 립증해주고있다.(출처: 로동신문, 2011년 7월 15일자 논설)

    ▲“조선인민공화국창건은 우리 인민의 력사에서 거대한 의의를 가지는 력사적사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9월 9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를 조직하시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을 온 세상에 선포하시였다.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창건은 우리 인민의 력사에서 거대한 의의를 가지는 력사적사변이였다. (출처: 우리민족강당 강의자료 “민족의 태양 김일성동지 자주독립국가의 탄생​을 선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