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조지 오웰은 성직자 같은 기자, 소설가였다. 그의 생애와 작품을 대하면 절로 옷깃을 여미게 된다. 그가 폐결핵으로 죽어가면서 쓴 '1984'는 오늘의 한반도를 想定한 것 같은 생각이 들 정도이다. 이 소설의 무대인 '오세아니아'는 북한의 거의 완벽한 再現이다.
     
      *오세아니아는 두 적대국과 전쟁 상태이지만 서로 적당히 싸운다. 치명상을 주지 않으려고 애쓴다. 그리하여 전쟁상태는 승자도 패자도 없이 영구적으로 계속된다. 이 전쟁은 두 가지 목적을 가진다. 첫째, 전쟁은 소비 상품의 생산력을 감소시켜 주민들을 가난하게 만든다. 주민들을 가난하고 배고프게 만들어야 반란을 예방할 수 있다. 전쟁으로 인한 긴장상태를 이용하여 계급사회의 유지에 필요한 특별한 분위기를 만드는 것이다. 이 나라에서 진정한 의미의 전쟁은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대상으로 하고 있는 것이다. 전쟁의 목적은 영토를 차지하거나 지키는 것이 아니라 사회구조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처럼 지속적인 전쟁은 지속적인 평화와 같다. 즉, 지속적인 전쟁상태를 유지하여야 지배층에는 지속적인 평화(이런 평화를 비판자들은 공동묘지의 평화라고 부른다)가 유지된다. 오세아니아의 당에서 내건 슬로건, '전쟁은 평화이다'는 말뜻이 바로 이것이다.
     
      *조지 오웰의 천재성은 전체주의 체제의 본질을 파악하고 텔레비전 등 전자 기술이 이런 체제를 위하여 어떻게 악용될 것인가를 내다 본 데서도 드러난다. 그는 과거의 어떤 정부도 시민들을 24시간 감시체제 하에 둘 수 있는 힘이 없었다고 했다. 텔레비전의 등장으로 상황이 바뀌었다는 것이다.
      <텔레비전의 개발과 같은 장치로 송수신을 동시에 할 수 있는 기술의 발전에 의하여 사생활은 존재할 수 없게 되었다.> 오세아니아의 모든 시민들은 집집마다, 방마다, 거리마다, 작업장마다 설치된 '텔레스크린'의 감시하에 놓이게 되었다. 텔레스크린은 경찰의 눈이고 선전부의 입이다. 텔레스크린을 제외한 다른 모든 통신수단은 폐쇄되었다. 텔레스크린의 등장으로 국가의 의지에 대한 완전한 복종뿐 아니라 모든 주제에 대한 완전한 일치를 달성하는 것이 역사상 처음으로 가능하게 되었다.
       북한에서는 텔레스크린은 없지만 집집마다 걸려 주민들을 내려다 보는 大兄(김일성, 김정일)의 초상화가 주민들에게 같은 역할을 한다. 당의 세포 조직과 상호비판 제도가 텔레스크린의 역할을 한다. 한국에서는 텔레스크린의 역할을 선동꾼이 장악한 SNS나 방송이 대행할 수 있다.
       조지 오웰이 1984를 쓰던 1948년 무렵엔 아직 텔레비전이 보편화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오웰은 이것의 가공할 정치적 의미를 간파한 것이다.
     
      *오세아니아는 주민들의 저항을 막기 위하여 텔레스크린을 이용한 감시뿐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동원한다. 당의 존립 목적이 권력유지이다.
     
      1. 기억의 조작: 정권 유지에 불리한 정보를 차단하고 주민들이 진실에 눈을 뜨는 것을 막기 위하여 사람들의 기억을 통제한다. 특히 정권 유지에 불리한 역사적 기록을 왜곡, 날조한다. 과거는 실체가 아니라 인간의 기억이므로 기록을 조작하면 기억도 마음대로 통제할 수 있다.
     
      1984년의 오세안니아를 다스리는 黨은 과거나 역사는 객관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과거는 기록과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과거는 기록과 기억이 합의한 그 무엇이다. 당이 모든 기록을 통제하고, 모든 구성원의 마음을 통제하므로 과거는 무엇이든 당이 선택한 대로여야 한다. 과거는 또 당이 원하는 대로 변조되고 바꿔치기 될 수 있는 것이다. 과거에 대한 새로운 해석이 나오면 그 전의 과거는 지워진다. 같은 역사적 사건이 당의 필요에 따라 여러 번 바뀌기도 한다.
     
      대형이 수령으로 있는 당의 슬로건은 이렇다.
     
      <과거를 지배하는 이가 미래를 지배하는데, 현재를 지배하는 이가 과거를 지배한다.>
     
      현재의 독재권력으로 과거와 역사를 멋대로 조작할 수 있어야 영원히 권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뜻이다.
     
     
      2. 언어의 조작: 용어혼란 전술과 새로운 문법을 병용한다. 비판정신을 일깨우는 단어, 예컨대 '과학'이라는 낱말은 사전에서 지워버리고 못 쓰게 한다. 언어가 인간의 思考를 결정한다는 사실을 잘 안다. 오세아니아에선 2중적 언어 해석의 법칙이 엄격하게 시행된다. 한 단어가 상반된 두 의미로 쓰인다. 사람들은 당이 원하는 방향으로 해석한다. 전쟁을 일삼는 부처는 평화부이다. 전쟁과 평화의 두 상반된 의미를 적절하게 쓰도록 훈련된다. '자유는 노예이다'는 구호는 모순된 것 같지만 개인의 자유를 大兄에게 바쳐서 노예가 되어야 진정한 자유를 얻는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고문을 자행하는 검찰 기관은 愛情部이다. 거짓선동이 전문인 부서는 眞實部이다. '무식이 힘이다'는 구호도 '힘이 무식이다'는 의미로 바꿀 수 있다.
     
     
      3. 외부 및 과거와 단절: 비교 대상이 되는 외부 및 과거 정보와 단절시킨다. 인간은 비교 대상이 없어지면 무중력 상태에서 떠다니는 사람들처럼 방향감각과 비판의식을 잊는다.
      4. 전쟁상태의 유지: 긴장된 분위기를 유지하고, 주민들을 배고프게 만들어 비판의식 자체를 가질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한다.
      5. 증오심의 분출: 생길 수 있는 불만을 외부로 표출시키기 위한 '매일 2분간 미워하기' 같은 스트레스 해소 기회를 만든다.
     
      1984의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사상 경찰의 심문관 오브리언이 反체제 지식인 윈스턴을 고문하면서 뱉어내는 이야기이다.
     
      '우리 당은 순전히 우리 자신을 위하여 권력을 추구하는 거야.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위한다는 것에 대하여는 아무 관심도 없어. 우리는 오로지 권력에만 관심이 있어. 부(富)나 사치, 오래 사는 것, 혹은 행복, 그런 것들이 아니라 권력, 순수한 권력에만 관심이 있다구. 우리는 우리가 하는 일이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안다는 점에서 과거의 어떤 독재 체제와도 다르다는 점을 알아야 해. 우리와 비슷하였던 자들을 포함하여 그 어느 누구와도 우리는 달라. 그들은 비겁하고 위선자들이었어. 나치 독일과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은 방법론에선 우리에게 매우 근접하였지만 그들은 자신들의 동기를 인정할 용기가 없었단 말이야. 그들은 원하지 않았는데도 일시적으로 권력을 잡게 된 것처럼 가장하고 저 모퉁이만 돌면 거기엔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사는 천국이 있는 것처럼 속였지. 그렇게 실제로 믿었을지도 몰라. 우리는 그렇지 않아. 우리는 아무도 권력을 넘겨주기 위하여 권력을 잡지는 않는다는 점을 잘 알지. 권력은 수단이 아니고 목적이야. 혁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독재를 확립하는 게 아니야. 독재를 하기 위하여 혁명을 하는 거라구. 탄압을 하는 목적은 탄압이다. 고문의 목적은 고문 그 자체라구. 권력의 목적은 권력이고. 이제 알겠어?'
     
      권력의 본질에 대한 이런 정의(定義)를 권력유지를 위하여 충실하게 적용하고 있는 것이 바로 북한 노동당 정권 아닐까? 그렇기에 북한정권은 소련과 동구권이 무너져도 존속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권력을 목표로 하는 권력, 순수한 권력, 모든 것을 권력에 종속시키는 절대권력, 인류가 일찍이 경험해보지 못한, '1984'에서만 상상하였던 권력이 북한에 있는 것이다.
     
      오브리언은 이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는 권력의 성직자들이야. 너가 먼저 알아야 할 것은 권력은 집단적이란 점이야. 개인은 개인이기를 포기할 때 권력을 가질 수 있어. 너는 당의 구호인 '자유는 노예이다'를 알지. 이것을 거꾸로 돌려 볼 생각은 안 했어? 노예가 자유이다. 혼자이고 자유로운 인간은 늘 패배한다구. 모든 인간은 죽게 되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인간의 최대 실패야. 그러나 그가 완벽하고 최종적인 복종을 하고, 자아(自我)로부터 벗어나 당과 일체가 된다면, 그는 전능한 불사(不死)의 존재가 되는 거지. 다음으로 너는 권력이란 인간을 지배할 수 있는 힘이란 점을 알아야 해. 신체에 대한 권력, 그러나 무엇보다도 마음에 대한 지배이지. 물질, 즉 외부적 현실을 지배하는 권력은 중요하지 않아. 이미 물질에 대한 우리의 지배는 절대적이니까.'
     
      당에 헌납한 개인의 생명은 영원하다는 점을 북한에선 '정치적 생명'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한다. 북한정권이 1984를 연구하여 실천에 옮긴 것이 아닌가 전율이 돌 정도이다.
     
      북한에선 수령에 대한 사랑만 진정한 사랑으로 여긴다. 1984도 마찬가지이다. 오브리언이 하는 말도 같다.
     
      '舊시대의 문명은 사랑과 정의에 기초한다고 선전하고 했지. 우리의 문명은 증오심에 기초하고 있다. 우리의 세상에선 공포, 분노, 승리, 그리고 자기모멸감 이외의 감정은 허용되지 않아. 혁명 전부터 내려오던 사고방식을 우리는 부수고 있는 중이야. 자녀와 부모, 남자와 남자, 남자와 여자의 관계를 단절시켰지. 아무도 아내, 자녀, 그리고 친구를 믿지 않아. 장래엔 아내와 친구도 금지될 거야. 아이는 태어나자 마자 어머니로부터 떼내어질 것이야. 암탉으로부터 계란을 가져오듯이 말이야. 성적 본능도 말살될 거야. 오르가즘도 폐지될 거라고. 정신과 학자들이 그 방향으로 연구를 하고 있어. 당에 대한 충성 이외의 충성은 없어. 大兄에 대한 사랑 이외의 사랑은 금지야.'
      
        
      처칠과 오웰의 사실우선주의
     
     
      최근에 나온 '처칠과 오웰: 자유를 위한 투쟁'(CHURCHILL & ORWELL: THE FIGHT FOR FREEDOM)이라는 책을 읽었다. 퓰리처 상을 받은 적이 있는 기자 출신 저술가 토마스 E. 릭스가 썼다. 처칠과 오웰은 정치인과 문학가로 역할은 달랐지만 1930~40년대의 세계 문명이 공산주의와 파쇼라는 야만적 전체주의 체제의 도전에 직면하였을 때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같은 방식으로 행동, 성공적 결과를 만들었다는 공통점이 있다는 것이다.
     
      著者는 처칠과 오웰이 문명의 존속을 위협하는 종말론적 위기를 만났을 때 우선 사실 관계를 확인하는 것으로 대응하였다고 했다. 그러나 나서 그 사실에 입각한 신념에 따라 행동하였다. 다른 이들은 악이 승리할 것으로 믿고 그 악과 타협하려 하였다. 두 사람은 용기와 통찰력으로 대응하였다. 著者는 傳記의 결론 부분에서 두 사람의 생애에서 얻을 수 있는 지혜를 이 점에 두었다. 위기가 닥치면 먼저 사실을 확인한 다음에 신념에 따라 행동하라는 것이다.
     
      <열심히 사실관계를 확인하고 나서 원칙에 따라서 대응하라.>
     
      때로는 두 사람이 誤判을 하곤 하였지만 그런 때에도 사실의 본질에 접근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않았다. 특히 오웰은 자신의 생각에 사실을 맞추지 않고 사실이 그의 생각을 바꾸도록 하였다. 그는 사실이 신념보다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 이다. 사회주의자로서 스페인 내전에 좌파 편을 들어 참전하였지만 거기서 소련 공산주의자들의 실상을 알게 되자 공산주의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이 때문에 극좌, 극우세력으로부터 협공을 당하고 소외되기도 하였다. 그는 불후의 명작 ‘1984’에서 사실을 수집하는 행동은 혁명적 행동이라고 표현하였다. ‘거짓이 판 치는 세상에선 진실을 말하는 것이 혁명’이라는 것이다.
     
      그의 생애, 특히 ‘1984’의 주제는 거짓선동이 판을 치고 전체주의 독재자들이 표현을 억압하는 가운데서 어떻게 하면 사실을 지켜냄으로써 개인의 존엄성을 지켜낼 것인가였다. 그는 이 소설에서 “2 더하기 2는 4라고 말할 수 있는 사회는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썼다. 사실을 말할 수 있는 양심의 자유, 언론의 자유가 보장된다면 개인의 자유도 지켜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빅 브라더’라는 독재자가 다스리는 ‘1984’의 오세아니아에선 사람들의 기억을 말살하고 조작하기 위하여 과거를 지우거나 왜곡하고, 용어 혼란 전술을 쓰는 시스템이 작동한다. 나치즘이든 공산주의이든 개인의 자유를 위협하는 전체주의 체제의 가장 유효한 무기는 거짓말, 그리고 사실의 말살임을 오웰처럼 강조한 문학인은 없었다. 냉전 시대에 공산주의 체제에서 짓눌렸던 지식인들이 오웰을 등대처럼 여겼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84’의 거의 완벽한 再現인 북한은 물론이고, 민주 민족 민중으로 위장한 선동 세력이 국민들을 속여 다방면에서 주도권을 잡고 정권까지 장악한 한국에서도 오웰의 역할은 남아 있을 것이다.
     
      처칠과 오웰은 개인의 존엄성을 전체주의 독재로부터 지켜내는 것을 자신들의 의무, 그리고 문명 보존의 핵심이라고 믿었다. 그런 점에서 스탈린과 히틀러는 각각 左와 右의 극단에 있었지만 본질적으로는 같은 전체주의 세력이었다.
     
      저자 토마스 E. 릭스는 종군기자 출신인데 처칠과 오웰도 종군 기자 출신이다. 처칠은 보어 전쟁에, 오웰은 스페인 내전에 참전, 기록을 남겼다. 오웰은 ‘동물농장’과 ‘1984’으로 유명하지만 스페인 내전 참전기인 ‘카타루니아 頌歌’는 20세기를 대표하는 넌 픽션으로 꼽힌다.
     
      처칠과 오웰의 사실 優先주의는 당대의 思潮나 여론과 맞지 않아 비난을 많이 받았다. 처칠이 예언한 대로 히틀러가 2차 대전을 일으키지 않았더라면 그는 독불장군 형 정치인으로 끝났을 것이다. 오웰은 살아 있을 때는 별로 알아주지 않았지만 死後 냉전 시절에 큰 영향력을 끼쳐 20세기를 대표하는 不動의 문학가로 평가 받게 이르렀다. 역사적 대사건들이 두 사람의 지혜로움을 드러내어준 덕분이다.
     
      저자는 ‘처칠과 오웰: 자유를 위한 투쟁’의 마지막 문단을 이렇게 정리한다.
     
      <事物을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한 투쟁은 아마도 서구 문명의 본질적 動力源이었다. 아리스토텔레스, 알키메데스, 로크, 흄, 밀, 그리고 다윈으로 이어져온 이 기나 긴 계보는 조지 오웰과 처칠을 거쳐 ‘버밍험 감옥에서 보내는 편지’(마르틴 루트 킹)에 이른다. 이는, 객관적 현실은 존재하는 것이고, 善意를 가진 인간들은 이를 이해할 수 있으며, 그러한 사실을 들이대었을 때는 다른 사람들도 자신들의 생각을 바꿀 것이라는 합의인 것이다.>
     
      이를 한 마디로 요약하면 實事求是 정신이다. 事實과 現實에 기초하여 올바른 길을 찾으려는 실용정신이 결국은 개인의 존엄성과 문명의 발전에 기여하게 된다는 뜻이다. 이 점에서 동서양이 만나는 보편성을 발견하면서 사실과 현실을 떠난 관념의 유희가 20세기에 수억 명의 인간 생명을 희생시켰던 점을 상기하게 된다.

    [조갑제닷컴=뉴데일리 특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