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0회 이승만 포럼 '한학과 한시' 주제로 열려... "우남의 문필활동은 독립 정신과 직결"
  •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제90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오영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이승만의 한학 수련과 한시 세계'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뉴데일리 공준표
    ▲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된 제90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오영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가 '이승만의 한학 수련과 한시 세계'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뉴데일리 공준표
    "이승만은 배재학당에 들어가기 전까지 약 15년간 한학(韓學)을 연마했다. 한학은 이승만의 호방하고 자유로운 사고와 행동에 큰 영향을 미쳤고, 그가 '개명전제군주(開明專制君主)'라는 평을 받은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21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열린 제90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오영섭 연세대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는 '한학이 이승만에게 끼친 영향'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오 교수는 "한학 수련은 이승만이 당시 신분 사회의 질곡(桎梏)과 문벌 사회의 난맥상(亂脈相)을 극복하고 관직에 나가기 위한 중요 통로였다"며 "고관이나 문벌가(門閥家) 주최 시회(詩會)·시계(時契) 도우미를 거쳐 하급직으로 진출한 후 그 이상 관직으로 나아가는 것이 가장 현실적 방안이었다"고 했다.

    올해로 8년째를 맞는 이승만 포럼은 뉴데일리와 건국이념보급회가 공동 주최하는 행사로, 매달 한차례 열린다. 오 교수는 이날 포럼에서 '이승만의 한학 수련과 한시 세계'를 주제로 강연에 나섰다.

    오 교수에 의하면, 이승만은 6세 때 '천자문'을 암송했고, 6~7세 때 '바람은 손이 없어도 나무를 흔들고 / 달은 발이 없어도 하늘을 건너간다'는 시를 지었다. 12세 땐 '통감절요' 15권을 마친 뒤 맹자·논어·중용·대학 등 사서(四書)를 익혔고, 18세까지 시경·서경·주역 등 삼경(三經)을 모두 뗐다.

    오 교수는 "시부(詩賦) 능력을 제고(提高)하는 것은 이승만과 같은 처지의 사람들에게 생존과 번영이 달린 문제였다"며 "또한 이승만은 평생에 걸쳐 서예를 연마했다. 그의 글씨체는 호방하고 자유롭게 흘러가는 특징을 갖고 있는데, 이는 이승만의 자존적·독존적 성격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승만의 作詩 활동

    1899년 고종 폐위 음모 사건에 연루돼 한성감옥에 투옥된 이승만은 '영한사전' '독립정신' 등을 집필하고 '만국공법' '청일전기' 등을 번역했다. 그러나 투옥 중인 이승만의 지루함과 무료함을 달래준 것은 작시(作詩)였다. 당시 이승만은 반정부운동을 하다 투옥됐던 유성준·이기동·이유형 등과 함께 시를 짓기도 했다.

    이들 중 이승만과 시로 겨룰 만한 실력을 지닌 이는 이유형이었다. 이승만은 '시인을 만난 기쁨(喜逢詩人)'이란 시에서 이유형과 시로 이심전심의 관계임을 노래했다.

    '객지에서 사귀어 절친한 사이되니 / 새로운 시석(詩席)의 새로운 인연이 마음의 친구 같네 / 마음은 소무(蘇武)가 이릉(李陵)을 북해에서 만난 것과 같고 / 기분은 왕자유(王子猷)가 대규(戴奎)를 산음으로 찾아간 듯하네 / 평생의 이별과 회합으로 칼을 품게 되었고 / 반평생 지기 같은 만남으로 그대를 이해하네 / 나그네 책상 성긴 등불 아래 그림자 하나 더해지니 / 체모도 잊고 간담을 기울이는 좋은 만남일세

    해방 후 이승만은 돈암장에서 '담벽에 그림자 어른거려 / 새벽녘 달인가 여겼더니 / 옆집 아낙네가 켜놓은 촛불이 / 낙엽 지는 창문으로 스며든 불빛이라네'라는 시를 지었고, 1956년 4월 침상에서는 '촉촉이 오는 비에 봄풀이 푸르더니 / 야속타 바람 불어 꽃잎 펄펄 떨구네 / 봄이 오고 감은 연례행사인 것을 / 봄 한 철 비바람 속에 오는 듯이 가누나'라는 시를 지었다.

    이승만이 남긴 시는 한시(韓詩)가 대부분이다. 이승만이 남긴 국문시는 1898년 3월 협성회(協成會) 시절 지은 '고목가(故木歌)'와 '독립정신'에 실린 창가 네 수가 유일하다.

    1. 슬프다 저 나무 다 늙었네 / 병들고 썩어서 반만 섰네 / 심악한 비바람 이리저리 급히 쳐 / 몇백 년 큰 나무 오늘 위태

    2. 원수의 땃작새 밑을 쪼네 / 미욱한 저 새야 쪼지 마라 / 쪼고 또 쪼다가 고목이 부러지면 / 네 처자 네 몸은 어디 의지

    3. 버티세 버티세 저 고목을 / 뿌리만 굳박여 반 근 되면 / 새 가지 새 잎이 다시 영화 봄 되면 / 강근이 자란 후 풍우불외(風雨不畏)

    4. 쏘아라 저 포수 땃작새를 / 원수의 저 미물 나무를 쪼아 / 비바람을 도와 위망을 재촉하여 / 넘어지게 하니 어찌할꼬

    여기서 이승만은 대한제국을 늙고 병든 나무에, 친러 관료들을 딱다구리에, 러시아의 위협을 비바람에, 독립협회나 협성회의 개화파 인사들을 포수에 비유한 것으로 알려졌다.

    지금까지 전해지는 이승만의 한시(韓詩)는 약 250수. 이날 포럼에 참석한 유영익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승만 한시의 대표적인 특징으로 "미국의 풍경이나 문물을 묘사하거나 기독교를 찬양한 시는 단 1수도 없다" 말했다.

    이와 함께 오 교수가 소개한 이승만 한시의 특색은 '사물의 성향과 특징'을 노래했다는 점이다. 이승만의 문학성을 대표하는 한성감옥 시절의 한시는 150수인데, 이중 사물과 동식물 등을 노래한 영물시(詠物詩)가 전체의 45%에 달한다.

    오 교수는 "이승만이 문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던 청년기와 우수한 시를 많이 남긴 감옥시절에 정확한 관찰과 긴 시간의 사고가 필수적인 영물시를 즐겨 읊었다는 것은 그의 현실적·실용적 사고방식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했다.
  • 오영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뉴데일리 공준표
    ▲ 오영섭 연세대학교 이승만연구원 연구교수. ⓒ뉴데일리 공준표
    이승만의 韓詩 세계

    오 교수가 분류한 이승만의 '한시 세계'는 △사물·동식물·인간의 모습과 역할 △감옥생활의 어려움과 애환 △이상과 포부, 구국대책 △독립과 건국에 대한 열망 △한국전쟁의 참상과 애민 의식 △가족·고향에 대한 사랑과 인생 무상 등 6가지다.

    △사물·동식물·인간의 모습과 역할 = '빈대'는 한성감옥 투옥자들을 가장 괴롭힌 곤충이었다. 이승만 역시 감옥에서 자신을 괴롭혔던 빈대를 읊었다. 특히, 빈대의 자손이 많은 것에 비해 자신의 집안의 손이 귀한 것을 아쉬워했다.

    '따뜻하면 기운 펴고 추워지면 오물어 / 천장으로 바닥으로 오르고 내리네 / 하얀 벽을 돌고 돌아 아롱을 찍어대고 / 침상 틈을 헐어 보니 잔뜩이나 몰려 있네 / 모기와는 연이 멀어 서로 통하기 어렵고 / 이나 서캐는 쇠하여 곁방살이일세 / 네 집안은 어찌 그리 복이 많은지 / 백 아들 천 손자 대대로 이어가네'

    이승만은 배재학당에서 신(新)학문을 배운 뒤 신문물의 우수성을 인정하게 됐다. 그는 '괘종시계(時鐘)' '전차(電車)' '성냥(白起火)' 등 신문물을 노래했다.

    1899년과 1903년 두 차례 한성전기회사의 전차가 어린이를 죽음에 이르게 한 사건이 일어나자 반미여론이 고개를 들기 시작했는데, 당시 이승만은 대외 통상과 개방의 중요성을 거론하며 외세배척운동을 반대했다. 다음은 '전차(電車)'.

    '쇠바퀴로 빠르게 내달려 비할 데가 없으니 / 만 리의 구름 안개를 경각 사이에 뚫는구나 / 기계로 감춘 전기 상자는 신이 만든 것이고 / 무지개 다리가 선로를 이루니 승객은 신선이라네 / 눈 아래 산들은 내닫는 말의 경주와 같고 / 귓가에 지나는 바람은 어지러운 매미의 울음이라네 / 나무 소의 옛날 일을 신묘하다고 말하나 / 제갈량은 오히려 완전치 못했음을 탄식하리라'

    △감옥생활의 어려움과 애환 = 한성감옥 시절 이승만은 죄수로서 감옥생활의 희비(喜悲)와 애락(愛樂)을 노래했다. 당시 감옥의 위생불량과 식사부실 때문에 많은 죄수들이 죽어나가자 이승만은 감옥의 개선을 요구한 '관식(官食)'이라는 시를 지었다.

    '우거지국 맑기가 비 갠 연못 같은데 / 이방 저방 골고루 나눠주네 / 밥상이 아니라도 배부르고 자리도 항상 젖고 / 반 사발 밥이라 씀바귀도 달기만 하네 / 나물은 싱거워 소금이 생각나고 / 깨물리는 모래알 옥같이 희네 / 얼굴 가득한 부황기로 사람마다 하는 말이 이거나마 하루 새 때 먹어봤으면'

    옥중의 이승만은 육친을 매우 그리워했다. 자신을 걱정하는 부모님과 옥바라지를 맡은 아내에 대한 효성과 사랑을 시로 읊었다. 다음은 '옥중에서 세모를 맞으며(獄中歲暮)'.

    '밤마다 긴긴 사연 새벽닭이 울 때까지 / 흘러가는 세월 옛 집이 그리워지네 / 사람은 벌레처럼 굴 속에서 살아가는데 / 세월은 흐르는 시내처럼 급히 지나가네 / 설 술이 익었거니 어버이께 올려보고파 / 솜옷이 새로 오니 아내가 그리워지네 / 헤어 보니 올 겨울도 열흘 남았으니 / 삼 년이나 매여 있는 천리마라오'

    △이상과 포부, 구국대책 = 이승만은 옥중에서 자신의 포부를 펼치지 못해 울적하다는 심경을 토로하는 시를 남겼다. 다음은 '회포를 읊다(詠懷)'.

    '덧없이 가슴 속에 불평만 쌓이는데 / 비 뿌리고 바람 불어 물결처럼 출렁이네 / 우리 안의 두루미 만리의 구름을 그리고 / 숲새의 외로운 꿈속에 달은 이미 오밤중 / 책 보따리와 친구 되니 행장도 가벼웁고 / 목숨을 아끼랴 갑 속의 칼만이 알아주네 / 세상살이 황금이야 가는 곳마다 있거늘 / 가난이 어찌 경영을 그르칠 수 있으랴'

    이승만은 정치의 급선무는 '외교'라는 외교제일주의 논리에 따라 "국가가 고립의 형세에 빠져서는 안 된다"고 노래했다. 오 교수는 이에 대해 "이승만이 '신의의 부강국'이라고 판단한 미국을 상대로 펼친 외교지상주의적 정치노선이 옥중에서 형성되고 있음을 보여준다"고 했다. 다음은 '이유형의 팔조시에 화답함(和白虛八條詩)'

    '정치의 급무는 외교에 있고 / 일일랑 능한 분에게 물어보시라 / 외로우면 나라가 위태롭다오 / 자유로서 백성을 인도합시다 / 그릇된 옛 법은 선듯 고치고 / 신식도 좋으면 받아들이소 / 오늘엔 교육이 가장 중요해 / 양병은 전쟁을 막을 뿐이고'

    △독립과 건국에 대한 열망 = 이승만이 독립운동기에 지은 시는 총13수가 전해지고 있다. 당시 이승만은 미국과 유럽, 하와이 등을 오가느라 많은 시간을 보냈다. 1935년 늦가을에 지은 '태평양 배 위에서'는 독립운동에 종사하느라 고향과 육친을 그리워한 이승만의 처지를 잘 드러낸다.

    '물 따라 하늘 따라 떠도는 이 몸 / 만리길 태평양을 몇 번이나 오갔는가 / 어떤 명승지도 보잘 것 없으니 / 꿈속에도 내 나라 한남산(漢南山)일네'

    1947년 1월 28일 이승만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9월 15일 남한 단독 총선거 실시를 주장했다. 당시 이승만은 국민통합과 남북통일의 염원을 담은 '가을 달밤에(秋月愛)'라는 시를 지었다.

    '내 염원은 삼천만 동포랑 / 나라 있는 백성이 되고지고 늘그막에 시골로 돌아가 / 한가한 사람으로 지내련다'

    △한국전쟁의 참상과 애민 의식 = 6·25 전쟁 중 이승만은 부산에서 전쟁의 참상을 아파했다. 그의 전쟁 인식과 애민의식은 1951년에 지은 '전쟁중의 봄(戰時春)'에 잘 드러나 있다.

    '강산을 바라보니 진 치는 연기 자욱하고 / 중공 깃발 서양 돛대 봄 하늘을 가리웠네 / 이리저리 떠도는 이들 집 없는 나그네요 / 나다니는 이들 누구나 생쌀 씹고 다니네 / 거리엔 남아 있는 옛 벽만 우뚝하고 / 산 마을엔 새로이 화전을 일구었네 / 전쟁이야 그치건 말건 봄바람은 불어 대고 / 피 흘려 싸우던 들엔 속 잎 돋아 나오네'

    △가족·고향에 대한 사랑과 인생 무상 = 1896년 이승만의 모친이 사망했을 때, 그는 효도를 다하지 못한 애달픈 심정을 담아 '울면서 읊음'이란 시를 지었다.

    '정성껏 길러주신 스물 두 해 / 이제 와선 몸과 머리 정말로 훤칠하네 / 영구를 받들어 장사를 못 뫼시니 / 머리들어 저 하늘에 어찌 부끄럽지 않으리'

    이승만은 대통령 취임 당시 이미 70대 중반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 교수는 "이때부터 이승만은 과거를 돌아보고 인생무상을 노래한 시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이승만이 1956년 지은 '봄을 보내며(餞春)'에는 말년을 맞이한 이승만의 심정이 잘 드러나 있다.

    '해마다 봄은 이리도 바삐 가는데 / 저무는 저 해를 잡아맬 길이 없구나 / 옛부터 재자 가인 탄식해 하는 말들 / 꽃을 보는 다락에선 석양이 빨리 온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