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눈치보기, 막무가내 최저임금, 소득주도 성장 몽니… 시민 3만명의 함성은 통곡이었다
  • 건국 70년을 맞은 지난 15일, 서울 도심에 ‘국가 해체’를 우려하는 소리가 퍼졌다. 100년 만의 폭염을 아랑곳 않고 모인 3만 명의 시민들은 ‘대한민국 해체’에 관한 걱정을 쉰 목소리로, 분노한 표정으로, 결연한 피켓으로 거리에 쏘아 올렸다. 서울역에서 덕수궁을 거쳐 광화문으로 이어지는 서울 도심의 긴 거리, 긴 행렬은 흐트러짐이 없었다. 다시 찾아온 폭염만큼 오래 된, 그러나 다시 찾아오기를 바라지 않았던, '망국(亡國)'에 대한 탄식을 삼킨 행렬이었다. 

    100여년 전 ‘망국’ 우려 떠올리게 한 ‘대한민국 해체’ 규탄

    100여 년 전에도 망국을 걱정한 이들이 있었다.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에 민감한 지식인들로부터 흘러나온 망국의 우려가 민초들에게 스며들었다. 나라가 망했다. 사람들은 망국의 우려 대신 망국의 설움을 삼켰다. 

    이후 수십 년, 잠복과 용틀임이 있었다. 그리고 나라가 다시 섰다. 꼭 70년 전의 일이다. 이승만 당시 대통령은 고초(苦楚)와 신산(辛酸) 끝에 정부를 구성하고는 대한민국의 수립을 선포했다. 1948년 8월 15일, 망했던 나라가 그렇게 일어섰다. 건국(建國)의 날이었다.  

    거리를 채웠던 역사적 구호들... ‘대한민국’을 의심하진 않았다 

    대한민국 70년, 역사의 파랑(波浪) 속에서 수많은 구호가 광장에 등장했다. 전후 ‘못 살겠다 갈아보자’와 ‘갈아봤자 별 수 없다’의 대치로 시작한 거리의 메시지는, 시대를 달리하며 절박한 변주(變奏)를 토해냈다. 보수와 진보가 맞섰고, 혁명과 개혁이 갈등했고, 성장과 안정이 드잡이했다. 친북의 이념과 반공의 정신이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이기도 했다. 

    그러나 지난한 상황에서도 망국의 우려가 다시 나오진 않았다. 저마다의 시대정신을 내세운, 서로 다른 색깔의 시민들이 지근거리에서 몸싸움을 벌이고, 면전의 상대방을 비난할 때도, ‘대한민국’의 존재에 대한 의심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좌(左)와 우(右), 그 격한 싸움의 마지노는 당파와 정권의 교체였다. 대한민국의 정체성 안에서 벌어지는 격돌이었다. 

    나라의 안위를 떠올릴 필요는 없었다. 그런데 100여 년 만에 거리에 등장한 망국론. ‘대한민국 해체’라는 여섯 글자는 그래서 암울하고 불길하다.  

    국가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과 혼란

    해체의 우려는 정체성의 혼돈에서 비롯한다. 국가 정체성의 혼돈은 100년 전의 망국을 예감케 했던 국제 정세와 국내 상황의 위기를 넘어선다. 한 나라의 정체성을 둘러싼 논란과 혼란은, 위기를 극복할 방어기제의 붕괴를 뜻한다. 정체를 둘러싼 대립은 첨예함을 넘어선다. 한 나라의 명운을 걸고 벌이는 싸움이다.   

    서울 도심을 메웠던 시민들의 우려는 절박하고, 그 대상은 총체적이다. 대한민국 해체 수순이라고 시민들이 거리에서 지목했던 현안들은 현 정부가 구상하고 펼치는 정책 전반을 포괄한다. 북한의 의중을 우선시하는 친북(親北) 일변도의 대북정책, 북한산 석탄 유입이 시사하는 의도적 무감각, 국민을 배려의 2선으로 내모는 인권정책, 국민경제를 실험의 대상으로 여기는 최저임금, 그리고 자가당착의 소득주도 성장 정책까지. 

    건국이념 무력화하는 ‘정부 수립론' 

    3만 명의 시민이 100여 년 전 망국의 기억을 되살리며 광화문에 운집한 날은, 대한민국에 공존하는 두 개의 역사관이 지근거리에서 대립한 날이다. 시민들이 폭염의 광화문 거리에서 ‘건국 70주년’을 기념할 때, 대통령은 용산의 국립중앙박물관에서 8·15 경축사의 형식으로 ‘정부 수립 70년’을 얘기했다. 이날 대통령의 축사에는 ‘광복’과 ‘정부수립’과 ‘남북관계’에 대한 얘기는 나왔지만, ‘건국’이란 말은 끝내 등장하지 않았다. 

    ‘1948년 8월 15일’에 대한 ‘정부 수립’ 명명은 대한민국을 지탱해 온 ‘건국’의 무력화다. 건국이념의 부정인 동시에 대한민국 정체성에 대한 탄핵이다. 70년 전 기사회생한 대한민국을 소외시키는 일이다. 

    지난 15일 저녁, 건국 70주년 집회를 마치고 쓸쓸히 흩어지는 광화문의 시민들을 지치게 한 것도 폭염이 아니라, 역사적인 소외감이었을지 모른다. 집회의 끝물, 사람들 사이에선 “대한민국의 칠순 잔치를 아스팔트 위에서 치르게 하느냐”는 탄식이 나왔다. 그 탄식은 100년 전 망국의 우려와 설움만큼이나 안타깝고 절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