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2년 수신사 박영효가 만들었다는 주장은 '소설'… 문헌 찾아보니 나타나는 '배후의 인물'
  • ▲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소장‘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도안.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수호 통상조약 조인식에 성조기와 함께 걸렸던 조선 국기다. ⓒ 이태진 명예교수/조선일보
    ▲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최근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 소장‘슈펠트 문서 박스’에서 발견한 태극기 도안. 1882년 5월 22일 제물포에서 열린 조·미수호 통상조약 조인식에 성조기와 함께 걸렸던 조선 국기다. ⓒ 이태진 명예교수/조선일보
    2018년 8월 14일자 <조선일보>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실렸다.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가 워싱턴 국회도서관에서 최초의 태극기 도안을 발견해 공개했다는 보도다. 기사에 따르면 이태진 교수는 최근 미국 워싱턴 국회도서관에 소장된 ‘슈펠트 문서’ 박스 속에서 ‘한국 조약 항목’에 들어 있는 태극기 도안을 발견하고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이태진 교수는 "태극기 그림엔 작성 날짜가 없지만 이 도안이 들어 있는 항목이 1882년 조·미 수호통상조약이며 바로 뒤에 있는 문서는 같은 해 6월 11일 작성된 것으로 그 이전 자료가 분명하다"고 했다.

    태극기는 그동안 1882년 9월 수신사 박영효가 일본에 가는 메이지마루호 선상에서 즉석에서 만든 것으로 알려져 왔다. 일국의 상징인 국기를 대신(大臣)이 즉석에서 만들어 내걸었다는 비상식적인 이야기가 마치 정설처럼 퍼져 있는 것이다.  

    박영효가 국기를 만들어 처음 내걸었다는 주장은 조선시대 관료 조직을 아프리카 부족국가 수준 정도로 보지 않는 이상 애당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우리 학계에서는 이에 대한 이의를 적극적으로 제기하지 않았다.   
  • ▲ 고종황제 행렬이 종로를 지나고 있다. 1885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가 촬영한 것으로, 어가 앞에 대형 태극기가 보인다. 신식 군대와 전통 군대가 섞여서 어가를 호위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 고종황제 행렬이 종로를 지나고 있다. 1885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신부가 촬영한 것으로, 어가 앞에 대형 태극기가 보인다. 신식 군대와 전통 군대가 섞여서 어가를 호위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태극기의 기원

    태극기 도안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라, 기본적으로는 조선시대 군사 지휘기인 좌둑기(左纛旗)와 옛부터 군주를 상징해왔던 태극팔괘도에서 연유한다. 둑(纛)은 임금의 가마나 군대의 대장 앞에 세우는 군기(軍旗)를 말한다. 

    2016년 3월 광복회 광주ㆍ전남 지부는 3.1 절을 맞아 ‘태극기 특별기획전’을 열고, 미공개 태극기 사진을 다수 공개했다. 이 가운데 눈길을 끈 것은 1885년 고종 황제의 어가 행렬을 이끄는 대형 태극기의 모습이다. 전문가들은 이 깃발이 ‘국가 행사’에 등장한 가장 오래된 태극기라고 한다.  

    바로 이 사진에 등장하는 고종황제 행차 행렬 앞에 있는 ‘태극 깃발’이 바로 ‘둑’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애초부터 태극기 창안자를 특정하는 것이 쉽지 않은 일이다. 더구나 태극 문양은 우리가 이미 오래전부터 즐겨 사용해오던 상징물이었다. 

    설사 태극기의 도안이 전통적인 좌둑기나 기존의 태극 8괘에서 유래한 것이라 하더라도, 이런 상징 또는 도안과 근대 국가에서 한 나라를 상징하는 정식 국기와는 차원이 다르다. 
  • ▲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가 공개한 1907년 순종황제즉위식 기념엽서에 나온 평양의 모습. 거리마다 온통 태극기 물결이다.
    ▲ 광복회 광주전남연합지부가 공개한 1907년 순종황제즉위식 기념엽서에 나온 평양의 모습. 거리마다 온통 태극기 물결이다.
    국기로 제정된 태극기

    최초의 국기 제정 과정에 대해서는 현재 명확하게 기록이 남아 있지 않다. 다만 고종실록 1883년 1월 27일(고종 20년)  기사에 "통리교섭통상사무아문에서 아뢰기를 '국기를 이미 제정했으니 팔도와 사도(四都)에 행회(行會)하여 다 알고 사용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하니 윤허했다"라는 기록이 나온다. 이미 국기가 결정되어 있던 상태에서 이 때에 이르러 공식적으로 선포하고 전국적으로 사용을 확대하도록 한 것이다.

    박영효가 일본에 수신사로 간 것이 1882년 9월이다. 한동안은 박영효가 일본으로 가는 배 위에서 국기를 최초로 만들었거나 아니면, 최소한 그가 국가 공식 업무에 태극기를 최초로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왔다. 

    하지만, 2004년 미국 해군부가 발간한 <해양국가들의 깃발>이란 자료에서 박영효가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시점보다 앞선 1882년 5월 조미수호통상조약 때 사용된 태극기 도안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박영효가 최초로 태극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고사하고, 공식 업무에 태극기를 처음 사용했다는 것도 사실과 맞지 않은 것으로 밝혀졌다. 이번에 이태진 교수가 발견한 태극기 그림은 바로 <해양국가들의 깃발>에 싣기 위해 그린 ‘원도안’인 셈이다.  
  • ▲ 소위 '이응준 태극기'로 알려진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사용된 태극기. 2004년 미국 해군부 해상국의 자료에서 그 실체가 발견됐다. 이태진 교수가 발견한 태극기 그림은 이 태극기의 원도안이다.
    ▲ 소위 '이응준 태극기'로 알려진 1882년 5월 조미수호조약 체결 당시 사용된 태극기. 2004년 미국 해군부 해상국의 자료에서 그 실체가 발견됐다. 이태진 교수가 발견한 태극기 그림은 이 태극기의 원도안이다.
    누가 태극기를 만들었나?

    2004년 발견된 조미수호통시조약 체결시 사용된 태극기를 세간에서는 ‘이응준 태극기’라고 부른다. <태극기의 탄생>이라는 책을 쓴 소설가 박충훈씨는 “당시 역관이던 이응준이 고종의 명을 받아 현재와 같은 태극 4괘(卦)의 도안을 처음 그렸다”고 주장했다. 

    현재 학자들도 김홍집의 명을 받은 이응준이 현재와 같은 4괘 태극기 도안을 그렸고, 이후 박영효가 일부 수정한 것을 사용했다는 것을 정설로 인정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이응준이 상관의 명을 받아 국기를 그린 것과 국기의 도안을 창안한 것은 분명 다른 문제다. 

    1948년 2월 8일 <경향신문>에 태극기의 유래에 관해 ‘국기고증변(辨)’이라는 한 편의 글이 실렸다. 이 글의 필자는 유자후(柳子厚ㆍ1895~ 납북)라는 분으로 경사(經史)에 해박하며 신학문(新學文)에도 능통하였다. 유자후의 국기고증 글에서는 이응준이라는 이름은 등장하지 않는다. 

    <(전략) 국기의 ㅇ處(ㅇ처)에 대하여는 여러 가지 주설이 구구한 모양이니, 혹자는 병자강화조약 때에 제정된 것이라 하고, 혹자는 임오 한미 통상조약 때 선정된 것이라 하고, 또 혹자는 임오군란 후 일본 수신사 박영효씨가 작(作)하였다하기도 한다. 이 세 가지 주장 가운데 최후의 설이 근시(近是)한 것이다. 

    지금까지 참고된 결과를 보면 본래 김옥균씨의 創ㅇ(창ㅇ)로써 김홍집씨와 상의하고 어윤중씨의 찬성을 받은 후에 박영효씨의 동의를 얻어 고종황제께 품달하여 어재가를 받았다는 것이 사실에 가까운 듯하다. 그리고 보면 우리 태극기의 창안자는 김옥균씨요. 그 제정자는 고종황제였던 것이다.  

    (중략)우리 태극 8괘의 국기가 이와 같은 경위와 이와 같은 뜻을 갖고 탄생하기는 실로 대조선개국 491년 임오년 7월 25일 고종 19년 서력 1882년이니, 지금으로부터 67년 전에 특명전권대사 수신사 박영효씨가 국서를 받들고 일본으로 향하였던 날이다. 그리고 고종황제께서 각국의 기호와 비교하여 만약 고칠 점이 있거든 고치라는 품허까지 내리셨다. (후략)>
  • ▲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 고문을 지낸 데니(1838~1900)에게 하사한 태극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다. 가로가 263, 세로가 180cm인 대형 태극기 인데 기사 상단의 고종황제 행렬에 사용된 태극기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보인다. 태극기 제정 당시의 태극 소용돌이는 지금보다 매우 깊어 전통 태극 문양에 가깝다.ⓒ뉴시스
    ▲ 고종황제가 미국인 외교 고문을 지낸 데니(1838~1900)에게 하사한 태극기.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태극기다. 가로가 263, 세로가 180cm인 대형 태극기 인데 기사 상단의 고종황제 행렬에 사용된 태극기와 비슷한 크기와 형태로 보인다. 태극기 제정 당시의 태극 소용돌이는 지금보다 매우 깊어 전통 태극 문양에 가깝다.ⓒ뉴시스

    한미통상조약 때 최초 사용

    유자후는 태극기의 최초 창안자로 김옥균을 주목하고 있다. 이런 사실을 종합하면 국기의 도안 과정에 김옥균, 김홍집, 어윤중, 박영효가 골고루 나름의 역할을 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즉 국기의 필요성과 제정이라는 국가 중대사를 두고 대신들이 머리를 맞대고 상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간과하지 말아야 할 것은 이 모든 국기 도안과 제정 문제는 고종황제의 지대한 관심 속에서 진행되었고, 그 중심에 고종이 서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1875년 8월 일본이 일으킨 운양호사건 후 조일수호조규 체결 때부터 조선은 국기의 존재와 필요성을 느끼고 있었다. 역사에 두루 밝고 국가의 독립과 왕권 강화 문제에 민감하던 고종이 국기를 결정하는 중대한 문제에 무관심했을 리가 없다. 

    국기 문제를 한참 고민하고 있을 무렵 조선은 청나라의 극심한 내정간섭에 시달리고 있었다. 당시 여러 기록을 보면 청은 속국을 뜻하는 용기(龍旗)를 사용하라고 조선에 압력을 넣었다. 하지만, 자존심 강한 고종은 이를 묵살하고 조선을 상징하는 별도의 국기를 원했다. 청의 집요한 압력까지 물리치고, 별도의 독립된 국기를 제정하는 과정은, 고종의 확고한 의지가 없었다면 진행 자체가 불가능하다. 

    이렇게 고종의 강력한 의지에 의해 탄생한 것이 바로 태극기이고, 이것을 최초로 국가대표의 상징으로 사용한 것이 한미통상조약 때인 것이다. 

    만민일체 사상이 깃든 태극기 

    다만, 이후로도 국기의 최종 도안 문제가 확실하게 매듭지어지지는 않았던 것 같다. 박영효가 일본에 갈 때 8괘가 그려진 태극기를 가지고 갔는데, 이에 대해 소설가 박충훈씨는 고종황제가 자꾸 시비를 거는 청나라의 압력을 피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8괘 태극기와 4괘 태극기를 두 종류를 가지고 가게 했다는 가설을 펴고 있다. 이후 8괘 태극기가 번잡하다는 영국인 선장의 의견을 내세워 그냥 4괘 태극기를 대외적으로 조선의 국기로 확정 짓는 기회로 활용했다는 것이다. 

    1882년 10월 2일 도쿄 일간신문인 <시사신보>에는 “조선에 지금까지 국기가 없었는데 청국에서 온 마건충이 조선의 국기를 청국의 국기를 모방하여 삼각형의 청색 바탕에 용을 그려 쓰도록 한데 대하여 고종이 크게 분개하여 결단코 거절하면서, 사각형의 옥색 바탕에 태극도를 적색, 청색으로 그리고, 기의 네 귀퉁이에 동서남북의 괘를 붙혀 조선의 국기로 정한다는 명을 하교하였다”고 보도하고 있다. 즉, 고종황제가 태극기 문제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관여하고, 박영효는 이 명령을 따라 태극기를 그렸을 뿐이라는 내용이다. 

    이를 근거로 1882년~1883년 사이 태극기를 국기로 최종 확정 짓는 과정에서 고종황제와 대신들의 심도있는 논의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이 과정에서 고종이 국기의 기본 도안을 주도했다는 것도 여러 자료에도 드러나고 있다. 자료를 떠나, 황제인 고종의 명에 의해 국기 제정 작업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국가라는 조직 체제와 역사적 맥락 등을 봤을 때 상식에 속하는 문제다. 

    이 태극기에는 군민일체(君民: 오늘날의 만민일체)의 사상이 들어있다. 태극기가 제정된지 어언 140년이 다 되어간다. 이제 태극기에 제대로 된 족보를 찾아줘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