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 1만명·학생 1천명 청원하면 교육감 답변…지방 직장인이 서울 학생인 척 청원해도 몰라
  •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뉴데일리 정상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뉴데일리 정상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을 비롯해 신고리 5·6호기 건설 문제, 대입제도 개편 문제까지…. 현 정부 들어 시민 의사·결정에 의존하는 경향이 두드러지고 있는 가운데, 9일 서울시교육청(교육감 조희연)도 '시민·학생 청원게시판'을 10일부터 도입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시교육청은 청원게시판을 도입하며 청원자에게 일체의 개인정보를 요구하지 않는 것은 물론, 청원 찬성자의 중복투표 대비책 및 일반인과 학생, 거주지역 등을 구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자격 기준도 마련하지 않아 청원게시판이 '여론 왜곡의 장'으로 전락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오고 있다.

    지방 사는 직장인이 '학생 행세' 하면서 청원하면?

    시교육청에 따르면, 시민과 학생들은 각각의 게시판에 별도의 본인인증 절차 없이 청원 글을 작성할 수 있다. 청원 글이 게시된 지 30일 안에 시민 1만명 또는 학생 1천명 이상이 동의하면 조희연 교육감이 30일 이내 공식 답변하는 것이 골자다. 청원 내용은 서울교육현안 및 정책과 관련돼야 한다.

    시교육청은 보도자료를 통해 "서울교육정책 추진에 서울시민 뿐 아니라 학생들 의견을 적극 반영하기 위해 '학생 청원게시판'을 별도 구성했다"며 "접근성과 개방성을 높이기 위해 일체의 인증 절차 없이 청원 글을 작성할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다만 시민이나 학생이 기존 청원 글에 찬성하고 싶은 경우 페이스북이나 트위터 등 소셜미디어를 통한 인증은 필요하다. '학생 청원게시판'의 경우에도 청원 찬성자는 학교를 입력해야 한다.

    그러나 사실상 이는 무의미하다. 개인이 여러 계정을 만들 수 있는 소셜미디어 특성상, 무제한 중복투표가 가능한 데다 거주 지역이나 나이, 신분에 관계 없이 '학생 청원게시판'에 찬성표를 던진 사람의 신상을 확인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학교 역시 아무 학교나 골라 선택하면 그만이다.

    예컨대 제주도에 사는 50대 직장인이 '학생 청원게시판'에 게시된 청원 글에 동의하고 학교만 서울지역 학교로 등록하면 1표가 행사된다. 10개 계정을 보유한 100명만 뜻을 같이한다면 언제든 교육감을 '소환'할 수 있다는 뜻이다. 조희연 교육감은 청원자와 청원 찬성자들이 학생인지, 직장인인지는 물론 서울시민인지도 구분할 수도 없다.  

    의도적·조직적 여론 왜곡에 취약

    서울시교육청 청원게시판 도입을 하루 앞두고,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교육계는 우려의 목소리를 쏟아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교육계 관계자 A씨는 "교육청에서 청원게시판을 만들며 청원에 필요한 최소한의 절차도 마련하지 않았다는 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으로 받아들여진다"며 "이념적 색채를 띤 단체들이 청원게시판에 일반시민·학생 의견인 양 민의를 왜곡·포장해서 자신들의 뜻을 관철시키는 도구로 악용될 가능성이 크다"고 우려했다. 

    서울지역 고등학교 교사 B씨도 "최소한 청원 글을 올리는 사람의 신상은 대외적으로는 비공개로 하더라도 교육청 내부적으로는 신원을 파악해야 할 필요가 있다"며 "무고로 인한 피해자가 나왔을 때 실효적 대응책이 없다면 청원게시판을 도입하는 의도가 뭔지 의구심이 든다"고 지적했다.

    이와 관련, 시교육청 관계자는 "자유로운 의견을 개진하기 위한 조치라고 판단해 교육청도 작성자 신원을 파악하긴 어렵다"며 "다만 비속어나 명예훼손, 불건전한 내용이라면 관리자에 의해 숨김 또는 삭제될 수 있다"고 답했다. 청원게시판 관리자가 24시간 모니터링하지 않는 이상, 새벽에 게시판을 통한 특정인 비방글이나 허위사실 유포가 이뤄졌을 때 어떠한 대비책이 없는 것이다.

    미투를 통해 개인의 실명이 우회적으로 거론될 경우에 대해 그는 "우선 숨김 처리를 하고 사실확인을 거쳐 해당 부서에 안내하는 방식을 취할 것"이라고 덧붙였다.

    교육계, 발 동동 구르는데…교육청 "높은 시민의식 기대"

    김재철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대변인은 "민의를 수렴한다는 취지는 반대하지 않지만, 일정 수준의 시민이 청원에 동의하면 조희연 교육감이 공식적인 '행정 행위'로서 답변해야 하는 것"이라며 "청원의 신뢰성과 책무성을 담보하는 보완책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김 대변인은 "일정 요건이나 절차 없이 접근성·개방성이라는 미명 하에 청원게시판을 일반에 공개하는 것은 좋은 취지에도 불구하고 부적절해 보인다"며 "교육청의 심도 있는 검토와 논의를 통해 올바른 방향으로 개선하길 바란다"고 당부했다.

    시교육청은 청원게시판에 대한 비판에 "아직 시행 전이기 때문에 지켜봐 달라"는 입장이다. 여러 우려가 나오고 있는 상황이지만, 불안 요소들 때문에 게시판 개설을 하루 앞두고 당장 어떠한 조치를 취하는 것은 어렵다는 것이다.

    시교육청 관계자는 "청원게시판을 만들 때 고민했던 부분이었지만, 누구나 제한 없이 (청원·청원 찬성을) 할 수 있는 것, 자유로운 의견 개진의 공간으로서 활용되길 바란다는 뜻을 감안해주면 좋겠다""며 "(높은) 시민의식을 기대하고 있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