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공산주의들이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기본정신이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되기를 바라며
  •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 축복이었나, 재앙이었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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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응표(뉴욕에서)

    진실을 말하는 것이 거짓말 하는 것보다 더 고통스러운 세상이 된 조국 대한민국, 이런 비정상 환경 속에서 맞는 건국 70주년의 감회는 나라 안에 사는 여러분이나 나라 밖에 사는 저나 다 같이 참담함과 비통함일 것입니다.

    온갖 혜택을 누리며 최고수준의 문화생활을 즐기는 처지에서 대한민국 건국이 축복이었나, 재앙이었나에 대한 답을 강요받는 기막힌 현실은 역사에 대한 배신이며 정상국가이기를 포기한 패륜아적 행태라고 생각합니다.

    고희를 맞은 대한민국이 아직 국가의 정통성과 정체성이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사생아 취급받는 참담한 모습을 보며 생각나는 것이 셰익스피어의 ‘쥴리어스 시저’에서 읽을 수 있는 천년을 지탱해준 로마의 ‘힘’입니다.

    시저를 암살한 브루투스의 거짓말과 선동에 현혹돼 시저의 단죄를 외치던 군중은 안토니가 양심과 진실을 담아 시저의 공적(功績)을 하나하나 설득력 있게 설명하자 군중은 시저의 업적에 감사하며 진실과 정의의 편에 서서 거짓선동자 브루투스 일파 제거작업에 동참하는 로마인들의 양심과 지혜와 용기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습니다.

    천년 로마를 지탱해준 힘은 바로 로마인들의 진실을 듣는 귀, 거짓과 진실을 가려내는 지혜, 선과 악을 분별하는 냉철한 이성(理性)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겐 로마인들처럼 진실을 듣는 귀가 왜 없습니까? 로마인들처럼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가 왜 없습니까? 선과 악을 분별하는 데 있어서 왜 로마인들처럼 냉철하고 이성적이지 못합니까?

    그뿐 아니라 로마인들에겐 우리에게 없는 인간의 가장 기본적 가치인 감사(感謝), 다시 말해 세계일등 국민으로서 누리는 자유와 평화와 풍요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진실을 듣는 귀가 거기서 열렸고,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가 거기서 나오고, 그 바탕 위에서 그들은 냉철하고 이성적 인간이 될 수 있었습니다. 2천 년 전, “나는 로마인이다”라고 말하는 것이 가장 자랑스러웠던 것은 결코 공짜로 주어진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저 즐겁고 편하게만 살자는 생물학적 충동에 취해 기적의 시대, 축복의 시대, 감동의 시대를 살면서 감사할 줄을 모릅니다. 배신의 시대를 살면서 우리처럼 흥청망청 대는 국민은 지구상에 대한민국국민밖에 없을 것입니다. 오늘의 모든 국가적 적폐는 여기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인류역사에서 과거를 회고하며 주어진 현실(축복)에 감사할 줄 모르는 국가와 민족이 계속 번영을 이어간 예(例)를 우리는 보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역사의 순리고 하늘의 이치입니다. 그래서 “민족의 서사시(敍事詩)를 기억 못하는 민족은 언젠가는 반드시 망한다”는 역사의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민주주의냐, 공산주의냐의 선택을 강요받으며 천국과 지옥을 넘나들던 8.15해방정국에서 자유민주주의 선택으로 대한민국 탄생의 기적을 이루어낸 가슴 벅찼던 순간(축복)을 기억해야 합니다. 역사의 기억은 그 민족, 그 국가가 번영의 길을 가느냐, 멸망의 길을 가느냐를 가늠하는 바로미터입니다.

    대한민국이 언제부터 영양(營養)이 넘쳐나 다이어트를 고민하고, 그처럼 화려한 국내골프장도 마다하고 해외골프여행을 즐기고, 언제부터 연휴가 되면 해외가족여행을 선택해가며 즐기고, 쌀이 남아돌아 보관을 고민하는 부자나라가 되었습니까?

    시골마을까지 자가용이 홍수를 이루고, 미국식, 프랑스식, 독일식, 남미식 식당을 골라 다니며 외식을 즐기는 고급 문화인이 되었습니까? 가난에 찌들어 숨도 제대로 못 쉬던 그 처절했던 과거, 복종만을 강요당하며 엎드려 지내던 암울했던 역사(일제식민시대)의 기억을 어떻게 그렇게 쉽게 잊을 수 있습니까?

    “음수사원(飮水思源), 물을 마실 때는 그 물이 어디서 나왔는지 그 근원을 생각하며 감사하라!”고 했습니다.

    대한민국건국이 축복이 아닌 재앙이었어도 이런 고급문화생활을 즐기며 흥청망청 댈 수 있다고 생각하는지 묻고 싶습니다. 이런 엄청난 축복 속에 자유와 부(富)와 고급문화를 마음껏 즐길 수 있는 터전을 만들어준 조국을 암울하고, 절망적이고, 희망이 없는 세계인 디스토피아(Dystopia)에 빗대 '헬 조선‘을 외치는 배신의 조국에 화가 납니다.

    부정적 사고(思考)에 젖어 ‘헬 조선’에 매몰돼 있는 젊은이들에게는 냄새나는 꼰대의 말로 들릴지 모르나 ‘헬 조선’은 한마디로 분에 넘치는 자유와 갑자기 주어진 부(富), 다시 말해 물질적 풍요와 정신적 가난(조갑제 기자의 표현)의 충돌이 빚어낸 산물이며, 종북, 공산이념이 덧씌워진 지옥의 언어’입니다.

    버려야할 과거청산은 빠를수록 좋다고 생각했던 조지 산타야나는 과거를 기억하지 못하는 자는 그 과거를 되풀이해야하는 저주를 받는다”고 했습니다. 우리를 향한 경고 메시지가 아닌지 고민해야할 것입니다.

    국가와 국민의 기본 가치관이 이처럼 뒤죽박죽이 된 데는 물론 여러 가지 원인을 들 수 있겠지만, 무엇보다도 지식인들과 사회지도층의 책임이 제일 무겁다고 생각합니다.

    더욱이 중고등학생들이 북한의 홍위병처럼 양성되는 교육현장의 시대적 책임에서 지식인들은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습니다. 죽은 지식인의 사회엔 봄이 오지 않는다는 엄중함을 지식인들은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이런 암담한 현실을 보면 지식인 최고의 덕목은 ‘아닌 것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라며 진실 속에 양심이 있다고 일러준 2천 년 전 후한(後漢)의 사상가 왕충(充)을 떠올립니다. 우리나라 지식인 들은 지식인 최고의 덕목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지 궁금합니다.

    대한민국 해체작업이 한창 진행 중인 조국의 현실은 한마디로 1938년 뮌헨협정의 사기문서가 가져온 유럽의 참상과 1975년 월남패망의 비극이 혼합된 최대의 국가위기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때, 지식인, 사회 지도자는 어때야 하는가를 생각해봅니다.

    어린 중학생과 학부모가 공산빨치산 추모제에 동원되고, 여고생들 입에서 ‘프롤레타리아 레볼루션’이 아무렇지 않게 튀어나오고, 광화문 네거리에서 ‘김일성 만세’까지 불러대는 이념적 혼란으로 국가가 요동칠 때, 난동꾼들 편에 서서 박수 치며 합세하는 좌경지식인의 목소리는 크게 들렸지만, ‘아니다’고 말하는 양심적 지식인들의 목소리는 별로 들리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우리시대의 슬픈 자화상입니다.

    저는 거창한 학술적 이론이나(그런 실력도 없지만), 자기이익에 따라 변질되는 싸구려 정치논리가 아닌, 평범한 시민의 생각과 말로 대한민국거국에 대해 생각해보고 싶습니다.

    우선 대한민국 건국이 1919년이냐, 1948년이냐를 놓고 논쟁을 벌이며 정치적 사상적 싸움을 하는 부끄러운 행태는 역사 문제가 아니라 이념 문제라는 데에 사태의 심각성을 느낍니다.

    소박한 소시민의 임장에서 한 번 생각해봅시다. 해방, 광복, 건국에 대해 일반 국민이 똑바로 이해하도록 개념정리만 제대로 해주었어도 오늘과 같은 참담한 현상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묶여있던 상태에서 벗어나는 것이 해방이고,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되찾은 것이 광복이고, 없던 나라를 새로 세우는 것이 건국인데, 이런 간단한 이야기가 왜 이렇게 복잡하게 꼬여졌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1945년 8월 15일은 일본식민지로 묶여있던 조선이, 그것도 남의 힘으로 풀려난 단순한 해방이었지, 잃었던 나라와 주권을 되찾은 광복은 아니지 않습니까?

    표현이 광복이든 독립이든 1948년 8월 15일 자정을 기해 미군정으로부터 통치권을 이양 받은 그 시점이 법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대한민국 건국의 출발점이라는, 갈릴레오의 지동설보다 더 과학적인 역사의 진실을 어떻게 아니라고 생떼를 부릴 수 있습니까?

    미치지 않고서야 어떻게 주권과 나라를 송두리째 빼앗긴 일본의 식민지상태에서 벗어나려고 독립투쟁을 벌이던 1919년에 대한민국이 건국되었다고 억지를 부릴 수 있습니까?

    1919년에 이미 대한민국이 건국되어 있었다면 1919년 상해임시정부를 중심으로 1945년 8월 15일 해방될 때까지 해외에서 목숨 걸고 싸웠던 독립운동은 도대체 무엇이었나를 묻지 않을 수 없습니다.

    아쉬운 것은 1945년 11월에 귀국한 임정요인들이 말한 것처럼, 상해임시정부는 건국운동을 위한 하나의 공구(工具), 다시 말해 건국 준비 기구였지, 영토, 국민, 주권, 정부를 갖춘 정식 국가가 아니었다는 역사적 진실을 목숨 걸고 교육하는 기관이나 지식인, 사회지도자가 별로 없다는 것입니다.

    종북, 친북 선동꾼들은 거짓을 가지고도 역사를 제멋대로 재단하며 나라를 저들 마음대로 끌고 가는데, 진실을 가지고도 거짓에 짓눌려 제목소리를 제대로 내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지식인, 사회지도자, 정치인들의 비굴함에 참을 수 없는 분노를 느낍니다.

    대한민국 건국의 의미를 올바로 인식하지 못하면 역사교육이 바로 설 수 없고, 역사교육이 제대로 서지 않으면 국가에 대한 애정이 생겨나지 않습니다. 역사교육은 이래서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과거에 겪은 고난의 역사 속에서 미래의 교훈을 얻어가며 공산세력과 싸워 여기까지 왔는데, 겨우 70년을 한계로 조국이 이렇게 어이없이 무너져 내리리라고 누가 감히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역사의 고난을 극복하려는 의지는 곧 국가에 대한 사랑으로 이어진다고 합니다. 우리는 역사에서 미래를 배우기 전에 역사의 고통을 먼저 경험한 민족입니다. 그래서 지금 조국이 겪고 있는 혹독한 시련은 국민의 의식이 조금만 깨어나도 능히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픈 역사는 잊어버려야할 대상이 아니라 아픈 역사를 기억할 때 위대한 미래를 열어갈 수 있는 지혜와 힘과 용기가 생겨난다고 생각합니다. 역사는 시련을 통해 진화한다는 말처럼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던 70년이라는 고난의 역사를 뒤돌아보고 미래의 자산으로 삼아야 하겠습니다. 20세기 지구촌의 신데렐라라고 불리던 대한민국이 이렇게 무너질 수는 없는 것 아닙니까?

    지금처럼 축복의 열매만 차지하겠다면 고난의 짐은 누가 지고 갑니까? 고난의 짐을 같이 지고 가겠다는 책임의식이 국민정서를 지배할 때, 지금의 시련은 축복이 되어 돌아올 것입니다.

    양동안 교수는 건국이란 인간의 출생에 비추어 생각할 수 있다며 이렇게 간결한 해석을 내리고 있습니다.

    “건국이란, 태아(胎兒)의 전신(全身)이 노출되는 것이 출생인 것처럼 국가구성요소들을 완비한 정치결사가 출현한 것이 건국이다”라는 양동안 교수의 해석을 근거로 우리는 1919년은 대한민국이라는 생명체가 상해임시정부라는 모체에서 자라나기 시작하던 시기고, 모체에서 자라고 있던 태아가 완전한 생명체의 모습으로 세상밖에 나타난 1948년이 그 생명체의 생일, 즉 건국이라는 역사적 사실을 자신 있게 말해야 합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국가의 정체성이 변질되는 수모를 언제까지 겪어야 합니까? 고희를 맞고도 고희잔치 하나 제대로 치르지 못하는 대한민국의 슬픈 현실은 대한민국 치욕의 날로 영원히 역사에 기록될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의 전환점은 이런 시련을 통해 이루어지기도 합니다. 오늘의 이 수모가 대한민국역사발전의 전환점이 되기를 바라며, 1948년의 대한민국 건국은 재앙이 아니라 엄청난 ‘축복’이었다는데 끝없는 감사를 느낍니다.

    건국 70주년을 기념하면서 염치없게도 우리국민에게 진실을 듣는 귀, 거짓과 진실을 분별하는 지혜, 선과 악을 가려내는 냉철한 이성이 주어지는 축복을 빌어봅니다.

    끝으로 “대한민국의 평화를 위해서는 공산주의들이 완전히 제거돼야 한다”는 이승만 건국대통령의 기본정신이 우리의 시대정신으로 자리매김 되기를 바라며 대한민국 건국 70주년을 축하합니다.


    2018년 8월 2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