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9회 이승만포럼 열려... 이주천교수 ‘하지와 이승만, 해방정국의 견원지간’ 주제 강연
  • 24일 오전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진행된 '제89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주천 원광대 교수가 이승만과 하지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이기륭기자
    ▲ 24일 오전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진행된 '제89회 이승만포럼'에서 이주천 원광대 교수가 이승만과 하지에 대해 강연하고 있다. ⓒ 이기륭기자

    “공산주의자들과의 합작은 결국 공산화로 가는 길이다.” 

    해방 후 미군정의 친소정책을 온몸으로 막아 나선 이승만 대통령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고 미국에 경고했다. 그의 옆에, 일제 패망 후 3년간 무정부상태나 다름없었던 남한지역을 통치한 미군정의 존 리드 하지 중장(John Reed Hodge,1893-1963)이 있었다. 위기의 한국 역사 앞에서 두 사람은 협력과 갈등을 반복했다.   

    24일 오후 서울시 중구 프레스센터 19층 매화홀에서 제89회 이승만포럼이 열렸다. 이날 포럼은 '하지와 이승만, 해방정국의 견원지간(犬猿之間, 개와 원숭이처럼 서로 으르렁거리는 사이)'이라는 주제로 이주천 자유민주학회 회장이 강연했다.  

    강연에 앞서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70년 전 오늘 오전 10시 이승만 박사가 제헌국회 의사당 앞 광장에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취임식을 거행했다”며 “이승만 대통령이 초지일관의 일념으로 남한 땅에 최초의 자유민주주의공화국을 끝내 건국해냈다”고 포럼의 의미를 설명했다. 

    강연자로 나선 이주천 회장은 1945년 일제 패망 후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탄생하기까지 3년 간의 미군정 통치 기간 동안, 이승만 박사와 하지 중장을 대표로 하는 미국 정부 사이의 갈등과 협력의 역사에 대해 설명했다. 

    이 회장은 “2차대전에서 패전한 독일이 국토가 네 토막 난 것과 마찬가지로 태평양 전쟁 이후 패전국 일본은 최소한 세 토막이 나야 하는데 엉뚱하게도 한국이 두 토막 나버렸다”며 “일본에 대한 독점의지가 강했던 미국이 한반도의 전략적 가치에 대해서는 큰 의미를 두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하지중장은 한국이 어딘지도 모를 정도로 한국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었으며, 용감한 야전 사령관이었지만 정치적 감각은 결여했다는 게 이 회장의 설명이다. 

    그렇게 한반도에 대한 아무런 지식 없이 남한에 입성한 하지는 일본 총독부로부터 국내에 창궐하는 공산주의 세력에 대한 얘기를 들었다. 남한지역에 상당히 위압적인 포고령이 내려진 데는 그런 이유가 있다. 마치도 한국이 패전국인 듯한 느낌을 받을 정도로 한국 국민들의 정서가 무시된 것이다. 반면 북한지역에 진주한 소련군은 심리전 차원에서 주민들을 잘 달래는 전술을 구사했다.

  • 1946년 만들어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는 하지(왼쪽)와 연해주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
ⓒ 사진출처 : 주간조선
    ▲ 1946년 만들어진 미소공동위원회 회의에서 대화하고 있는 하지(왼쪽)와 연해주관구 군사위원 슈티코프 ⓒ 사진출처 : 주간조선

    반탁·반공의 이념 투철했던 이승만

    하지는 남한에 들어와 일본 총독부를 그대로 유지하면서 기능주의적이고 실용주의적인 차원에서 친일파들을 그대로 기용했다. 그 후 친일파 등용에 대한 남한 민심이 나빠지자 친일파를 배제하기 시작했다. 이 회장은 건국 후 남한이 친일청산을 제대로 하지 못한 것에 대해 “3년 동안 미군정이 일제시대의 경찰 등을 활용하는 과정에서 시스템이 형성되어 버린 점”을 들었다.

    일본에 가장 강력하게 저항했던 세력이 공산주의 계열의 남로당 좌익세력이었기 때문에 일본 총독부는 경찰을 동원해 국내 공산주의 세력을 소탕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했고 미군정의 입장에서는 공산주의세력을 잘 알고 있는 일제 시기의 경찰이 필요했다는 것이다.

    이승만은 1945년 10월 16일 남한 입성 때 건국에 대한 의지와 목표가 뚜렸했다. 그는 △한국독립당에 대한 지지를 유지하되 김구를 견제하는 것, △김규식과 여운형의 좌우합작을 물리치는 것, △미 국무성 지원을 확보해 신탁통치를 막는 것, △한반도에서 소련 공산주의를 몰아내는 것 등의 4가지 목표를 공고히 하고 있던, 준비된 리더였다. 

    이 회장의 설명에 따르면 이승만은 1917년 일어난 소비에트 볼셰비키 혁명이 얼마나 무자비한 것인지 미국의 언론매체를 통해 접하면서 공산주의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게 되었고 유럽에서의 좌우합작으로 공산화가 되어가는 나라들을 보면서 '한국에서의 좌우합작과 신탁통치도 결국 공산화로 가는 길'이라고 확신했다. 

    이승만은 하지와 미국의 좌우합작 노선을 격렬하게 반대하면서 미묘한 동상이몽적인 상호 협력관계를 유지했다. 이승만은 전국을 다니며 소련과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반공 강연을 진행했는데 당시 좌우합작을 원했던 미군정의 심기를 매우 불편하게 했다는 것이다. 

    좌우합작 기도 무력화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 

    하지는 이승만에 대해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눌 때에는 매우 유쾌하고 좋은 사람이지만 공식 화합에서는 아주 난폭한 사람이 되어 소련과 한국 공산주의자들을 비난함으로써 자기들의 직무를 더욱 난처하게 하고 있다”고 평가할 정도였다. 당시 미 행정부는 '소련과 좌우합작 합의가 가능할 것'이라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이 회장의 설명이다. 하지는 김규식과 여운형을 끌어들여 좌우합작위원회 구성을 꾀했다. 

    이에 대응해 이승만은 1946년 12월 7일 미국을 방문해 미군정의 좌우합작을 중심으로 한 정권인수 계획을 무력화하기 위해 치열한 외교전을 펼쳤다. 미국 대통령 트루먼과 미 국무부 고위층들과의 면담에 실패한 이승만은 미국의 언론매체와 정계, 일반 대중을 상대로 남한 정부 수립과 미군 철수 반대 등에 대한 본격적인 여론전을 펼쳐나갔다.

    이승만은 미국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방미 성명서를 발표해 미국정부를 압박했다. 이승만은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전쟁을 경고하면서 “일부 미국 관리들이 조선의 독립을 반대하고 공산주의에 기울고 있다”고 비판했다. 또한 “하지 중장은 좌익에 호감을 가지고 있으며 미군정은 조선의 공산당 건설과 이에 대한 원조를 계속하고 있다”고 꼬집었다.(동아일보 1947년 1월 26일자) 

    최후의 승자 이승만, 정직한 군인 하지중장

    1947년 2월 워싱턴으로 귀국한 하지중장은 트루먼에게 이승만의 주장을 다시금 확인시켰다. 이 회장은 "하지가 미 국무부의 친(親)공산주의적 지시에 의해서 할 수 없이 좌우합작을 추진한 것이지 그의 대공의식이 처음부터 잘못되었던 것은 아니었다"고 했다. 결국 하지는 이승만과 적지 않은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후 여운형 암살 사건으로 하지의 좌우합작 계획은 실패했다. 하지에 대해 이승만은 “하지장군의 실패는 그가 한국인들의 의사를 고려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는 훌륭한 군인이지만 명령 복종 습관에 젖어있었다.”고 평가했다. 

    이 회장은 끝으로 "북한은 1946년에 사실상 독립정부인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남한보다 먼저 결성했고 1947년에는 명칭에서 '임시'를 뺀 사실상 북한의 단독정권을 공식 선포했다"면서 "1947년 10월 21일 소련의 철수로 미소공동위원회가 해산되고 나서야 남한에서는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한 첫 자유민주정부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