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천여 전문가 참여 원자력학회 성명 "국익 무시... 대통령 공약 실현에만 매달려"
  • ▲ 한국원자력학회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고 체계적 에너지 정책 수립을 요구했다. 왼쪽부터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김학노 한국원자력학회장, 김명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방광현 한국해양대 기계공학부 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 한국원자력학회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정부의 탈원전 정책을 비판하고 체계적 에너지 정책 수립을 요구했다. 왼쪽부터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김학노 한국원자력학회장, 김명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 방광현 한국해양대 기계공학부 교수. ⓒ뉴데일리 정상윤
    5천여 명의 산·학·연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국내 대표적 원자력 학술단체 '한국원자력학회'가 정부의 탈(脫)원전 정책에 대해 전면 반발하고 나섰다. 

    한국원자력학회(회장 김학노)는 9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탈원전 정책으로 인한 산업계 전반의 경쟁력 약화를 경고했다. 학회는 또 정부의 체계적 에너지 정책 수립을 촉구하며 '정치적 가치가 아닌 국가 실익이 우선'이라는 내용의 성명서도 발표했다.


    정부의 '탈원전 드라이브' 강행…산업 생태계 붕괴 현실로
    김학노 한국원자력학회장은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과정을 통해 신중한 탈원전 정책 시행이 요구됐으나, 정부는 최근 월성1호기 조기 폐쇄, 신규 원전 부지 고시 무효화 등 독선적이고 일방적인 조치를 강행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지난달 15일 한수원 이사진 의결로 조기 폐쇄가 결정된 월성 1호기의 경우, 10년 추가 사용을 위해 약 6,000억원의 정부 예산이 투입돼 핵심 부품과 설비가 전면 교체됐다. 김 회장은 “계속 운전을 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부품이 '압력관'인데, 모두 새 것으로 바꿨다”며, “전문가의 시각으로 보면 새 원전이나 다름 없다”고 강조했다.

    핵심 부품을 모두 교체한 월성1호기는 원자력안전위원회의 검증을 통과했다. 위원회는 월성1호기에 대해 2022년까지 운전해도 문제가 없다는 승인을 내렸다. 위원회의 결정은 불과 3년 전에 나왔다. 월성1호기 운전 주체인 한수원은, 안전성을 강조하던 기존 입장을 최근 번복했다. “월성1호기 노후화로 경제성과 안전성이 부족하다”는 것이 한수원의 설명이다. 한수원이 태도를 변경하면서 월성1호기의 운명도 바뀌었다.

    전문가들은 한수원 이사회 결의의 절차적 흠결을 지적했다.

    이들이 꼽는 가장 큰 문제는, 월성1호기 폐쇄 의결 당시 관련 공청회가 없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한수원의) 성급한 결정을 보면 (탈원전이라는) 대통령 공약을 위해 다른 모든 고려 사항이 무시된 게 아닌가 의심스러울 정도"라고 말했다.

    김학노 회장은 "지난 겨울 10회나 남발된 급전 지시, 원전 가동률 저하로 인한 한전과 한수원의 대규모 적자 및 전기료 인상 압박은 이제 현실이 되고 있다"며, 정부 정책의 방향 전환을 거듭 호소했다. 일각에서는 월성1호기 조기 폐쇄로 인한 손실액이 무려 1조원에 달할 것이라는 주장도 나온다.


    “주민 동의 얻은 원전 부지 결정, 해제할 때도 동의 받아야”
    학회는, 한수원의 신규원전 부지 무효화 및 건설 계획 백지화 결정에 강한 유감을 나타냈다.

    김 회장은 "주민 동의 아래 확보한 신규 원전 부지를 주민 동의 없이 일방적으로 해제해도 되는지 염려된다"며 절차적 하자를 꼬집었다. 그는 “탈원전 정책이 계속되면 양질의 일자리 고갈은 물론이고, 600곳이 넘는 원전 관련 중소기업의 산업 생태계 붕괴가 걱정된다”고 했다. 실제 원자력 학계에서는, 기 확보한 원전 부지를 취소할 경우, 같은 곳에 원전을 건설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다고 보는 시각이 많다.

    송종순 조선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신규 원전 부지를 한번 해제하면, 같은 곳의 부지를 다시 확보해 원전을 짓기까지 최소 20년 이상의 기간이 추가적으로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심형진 서울대 원자핵공학과 교수는 국회의 역할론에 무게를 둔 대안을 제시했다. 그는 “국회 차원에서 에너지 전문가가 참여한 특별위원회를 구성해야 한다”고 했다.

    방광현 한국해양대 기계공학부 교수는 “에너지 정책의 파급효과나 문제점은 시차를 두고 나타난다”며, “탈원전의 문제를 규칙적, 장기적으로 사회에 널리 알려, 에너지 정책이 올바른 방향으로 수정될 수 있도록 학회가 앞장서야 한다”고 조언했다.


    정부의 일방통행에 자괴감 느끼는 학자들…"대국민 소통에 최선 다할 것"
    학회는 지난해 신고리 5·6호기 공론화 숙의 과정을 통해 젊은 세대의 생각이 바뀐 사실에 주목하면서 '소통'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신고리 원전 공론화위에 참여한 20대의 건설 재개(원전 찬성) 의견은 처음 17.9%에서 최종 56.8%로 크게 달라졌다.

    차기 원자력학회 회장인 김명현 경희대 원자력공학과 교수는 “(원전 사고를 주제로 만든) 판도라 같은 영화를 보고 그 내용을 현실로 믿는다든가, 허황된 추측이 진실인 것처럼 회자되는 상황이 안타깝다”며, “학생들에게 올바른 정보를 전할 수 있도록 책자를 만드는 등 대국민 홍보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김명현 교수는 “신중하게 논의돼야 할 에너지 정책이 성급하게, 심지어는 비밀리에 진행되고 있는 일련의 과정을 보면서 학자들이 자괴감에 빠져 있다”고 했다. 그는 "학회의 부담은 커지고 있지만 회원 모두가 이 문제를 엄중하게 받아들이며 대책을 강구하고 있다”고 전했다. 김 교수는 9월부터 학회 회장 임기를 시작한다.

    학회는 기자회견을 마무리하며 △미래지향적 에너지 정책 정립을 위한 공론화의 장 마련 △한수원 이사회 결정 무효화 및 신규 원전 건설 재추진 △사우디 원전 수주를 위한 최대한의 지원 △에너지 전문가와 수요자가 함께 참여하는 위원회 구성 등 4개항을 정부에 요구했다. 한국원자력학회는 국내 원자력 분야 산·학·연 5천여 명의 전문가들이 참여하고 있는 국내 대표 학술단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