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필 2004년 정계 은퇴후 최초 인터뷰(2005년)
  • 金鍾泌과 한 마지막 인터뷰.

    趙甲濟  /조갑제닷컴 대표

    오늘 별세한 金鍾泌 전 국무총리와 나의 마지막 인터뷰는 2005년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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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는 이대로 사라진다. 정치는 虛業이다. 金大中에게 속았고 李會昌에게 실망했다』  
      
     
    週中엔 골프, 週末엔 독서로 소일한다는 JP는 의외로 『나서지 않았어야 했던 全斗煥이지만 잘한 면이 있다』면서 『盧武鉉 정부는 포퓰리즘과 아마추어리즘이 겹쳤다』고 평했다. 그는 『들쥐 근성이 있다는 우리 국민이지만 당하면 강해지기 때문에 이 정도의 위기는 극복할 것이다』고 낙관했다.

    趙甲濟 月刊朝鮮 기자〈mongol@chosun.com

    정리 : 李根美 月刊朝鮮 객원기자〈www.rootlee.com
     

     

  •  『韓日수교 때 총대 메었다가 두 번 국외로 추방 신세』
       

     金鍾泌 前 자민련 총재는 정치 입문 43년 만인 2004년 4월19일에 정계를 은퇴했다. 정계를 은퇴한 후 국내 언론과의 인터뷰를 사양하다가 月刊朝鮮과 처음으로 만났다.
     

     2005년 7월10일 오전 10시30분,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서 만난 만 79세의 金鍾泌 前 총재는 혈색이 아주 좋았으며 목소리에 힘이 있었다. 週5일제 시대를 맞았지만 자신을 보좌하는 사람들을 쉬게 하려고 週末에는 집에서 중국 古事集을 읽고 있다고 했다. 

     

     ―지난 6월 韓日수교 40주년 행사로 일본 여행을 많이 하시면서 일본의 나카소네 前 총리와 같은 자리에서 연설하시는 등 의미 있게 보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韓日수교를 맺을 때 총대를 메신 분으로서 어떤 소회가 있는지요.

     

     『나는 「金-오히라」 合意로 막힌 걸 뚫는 역할을 했습니다. 내가 뚫어 준 것을 갖고 외무부에서 매듭을 지었죠. 1951년 9월 샌프란시스코 조약 이후로 韓日 대표들이 현안 문제 해결을 논의하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1961년까지 아무 진전을 못 봤어요.

     

     「한국을 36년간 괴롭혔으니 代價를 치러라」 그게 소위 얘기하는 청구권 요구였는데 일본도 戰後 복구작업이 한창 진행될 때라 여유가 없었어요. 함부로 액수를 내놨다가는 비난을 받을 가능성이 있어 서로 말을 안 했어요. 말꼬리를 잡고 그걸 문제삼아 열었다 중단했다를 10년이나 했습니다』

     

     5·16 후, 혁명적인 결단과 희생 없이는 韓日문제가 해결 안 된다고 생각한 朴正熙 최고회의 의장이 金鍾泌씨에게 나서라고 지시했다. 당시 국내에서는 청구권자금으로 100억, 36억, 12억 달러 등 별 근거없는 액수들이 운위되고 있었다. 朴대통령은 8억 달러 정도를 생각하고 있었다.

     

     『兪鎭午 고려大 총장이 마지막 韓日회담의 한국 측 수석대표였습니다. 이분을 최고회의에 초빙해서 「선생께서는 現 상황을 봐서 일본에서 얼마를 받아 낼 수 있을 걸로 예상하느냐」고 했더니 「2000만 달러 받으면 많이 받고, 3000만 달러만 받으면 대성공이다」라고 그러더군요. 그러던 분이 나중에 청구권 자금으로 「3억+2억+1억+α」를 확보한 것을 놓고 나라 팔아먹은 행위라고 비난할 때 아연했지요』

      
     
     

  • 한국 분단은 일본의 책임
     
     ―1953년 韓美동맹조약이 체결되고 1965년에 韓日수교가 이뤄지면서 우리나라는 확실하게 미국·일본 등 해양문화권과 손을 잡아 「남방 3각 동맹」이라는 말까지 생겼습니다. 최근에 盧武鉉 정권이 대륙도 중시해야 한다면서 일종의 균형자 역할을 내세웠습니다.
     
     지난 6월3일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로 도쿄에서 열린 세미나에서 나카소네 前 총리는 盧정권이 기존의 대한민국 노선과 크게 다른 국가 진로를 선택한 것에 대해서 상당히 우려를 표현한 것으로 압니다. 해양 지향적인 전략을 채택하는 데 큰 역할을 하신 金총재께서는 盧武鉉 대통령의 이런 정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글쎄요, 미국·일본과 전통적인 돈독한 협력관계를 견지하면서 대륙과 접촉해야지요. 우리가 5000년 동안 유형·무형, 직접·간접으로 수많은 재난을 당했으니 대륙을 소홀히 취급할 수는 없지요. 盧武鉉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어느 정도 갖고 있는지 잘 모르기 때문에 평할 수는 없지만, 해양과 대륙 세를 대립적이라고 생각하면 잘못된 거죠』
     
     ―일본 국가 지휘부에 있는 분들이 「한국의 노선이 脫해양 쪽으로 가면 우리도 한국 정책을 수정하겠다」는 움직임을 보이는 것 같습니까.
     
     『그 정도는 아니지만 우려를 표명하는 것은 많이 들었어요. 외교적인 면에서나 협력 면에서 우려를 없애기 위한 배려를 해야지요. 「무얼 어떻게 생각하고 그러는지 모르겠다」는 극단적인 얘기를 하는 사람도 있습디다. 그건 우리 외교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다는 얘기죠』
     
     金총재는 다음과 같이 독특한 역사관을 자주 피력하여 일본 사람들을 놀라게 한다.
     
     「1945년 7월26일 독일 포츠담에 모인 미국·영국·소련 수뇌부는 對日항복촉구 선언을 발표했다. 일본 지도부는 이 선언에 대해서 강경론과 유화론으로 갈라져 適期에 대응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미국은 8월6일 히로시마에, 9일엔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소련은 8월8일에 참전해 만주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천황의 결단으로 항복을 결정했고 8월15일 항복방송이 있었다.
     
     만약 이때 미국이 원폭을 투하하지 않았더라면 전쟁이 오래 지속되어 소련군은 한반도 전체를 점령했을 것이고, 그 뒤 한반도 전체가 공산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미군의 일본상륙戰은 미군 측에 엄청난 전사자를 냈을 것이고, 일본 측은 그 몇 배의 전사자를 냈을 것이다. 소련도 일본 본토에 상륙하여 북해도는 물론이고 아키다-센다이線까지 내려와서 일본 열도의 분단이 이뤄졌을 것이다. 만약 일본이 원폭 투하 이전에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여 항복했다면 소련의 참전 명분이 없어져 한국은 미군 점령期를 거쳐 통일되었을 것이다」
     
     ―金총재께서 한반도 분단의 책임이 일본에 있다는 말씀을 하셔서 일본 사람들이 역사를 되돌아보는 계기를 가졌다고 하는데, 반응이 어땠는지 궁금합니다.
     
     『1962년 오다하라에서 열린 국제 MRA(도덕재무장) 회의에서 이케다 총리와 내가 스피치를 했어요. 스피치가 끝나고 담소할 때 그 얘기를 했지요. 포츠담 선언 이후에도 일본 지도부가 바로 결단을 못 내려 일본은 원자폭탄에 30만 명이 희생되고, 한국은 덩달아 양단되고 동족이 피흘리는 전쟁이 있었다고 얘기했죠』
     
     ―일본의 패전 당시 민간 정치인들 중에 군대를 누르고 결단할 인물이 없었던 모양이지요.
     
     『없었어요. 8월15일에 포츠담 선언을 수락한 뒤 해외에 나가 있는 300만 명의 군사를 누르려면 누군가가 책임을 져야 됩니다. 이때 阿南 陸相(육군장관)이 자결하지요. 천황의 결단도 있었지만 阿南 육군대신이 자신을 희생시켜 군부의 반발을 제지했어요』
     
     
     
  • 『민비 시해가 일본 황실에서 일어났다면?』
     
     ―지난 6월3일 요미우리 신문사 주최로 열린 세미나에서 金총재께서 「민비 시해사건이 일본 황실에서 일어났다면 어떻게 했겠느냐」고 말한 것은, 아직도 천황을 숭배하는 일본인들에게 상당히 이례적이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이 너무 아픈 비교를 했다는 얘기는 안 했습니까.
     
     『그런 얘기는 안 하고 「거의 뇌리에서 사라졌던 아픔을 우리에게 주었다」고 하더군요. 젊은 사람들은 그런 史實(사실)을 전혀 몰라요. 세미나가 끝난 다음 「그런 일이 있었냐」고 묻는 사람들도 있었어요』
     
     ―올해 연초에 우리 외교부에서 외교문서를 공개했는데, 1974년 8월15일 在日동포 文世光에 의한 陸英修 여사 암살 사건이 난 직후 韓日관계가 나빠졌을 때 시이나 특사가 9월19일에 한국에 와서 朴正熙 대통령에게 사과했습니다. 일련의 과정을 보니까 韓日관계가 겉으로는 좋았으나 뒤로는 계속 문제가 있었더군요. 金大中 납치사건은 우리 쪽에서 수사협조를 안 했고, 文世光 사건은 일본에서 협조하지 않았더군요. 두 사건 다 金총재께서 관여하여 해결을 보았는데 어떻게 처리된 겁니까.
     
     『文世光 사건 때는 다나카 총리와 아주 친한 NHK 회장 마에다가 중간역할을 많이 해주었어요. 「1895년에 황후를 죽인 데 이어 두 번째다. 두 번에 걸쳐 국모를 시해한 거다. 文世光이 갖고 있던 권총은 너희 경찰들 거다」라고 추궁했지요. 마에다는 자기가 중재를 해서 결정적인 사죄를 하도록 하겠다며 두 번 왔다 갔다 했어요. 결국 시이나 자민당 부총재가 왔습니다. 朴대통령이 「그 진의를 내가 산다」고 해서 해결된 겁니다』
     
     ―朴대통령은 陸여사를 죽인 사실상의 배후 조종자를 일본 경찰이 구속하지 않아 마음에 응어리가 지지 않았을까요.
     
     『朴대통령이 그 말을 한 적이 없어요. 슬픔을 참고 계신 모습을 지금도 떠올릴 수 있는데, 朴대통령이 하고 싶은 말씀을 일본 측에 내가 대신 전했어요』
     
     ―이번에 공개된 문서를 보니까 朴대통령이 시이나 특사한테 「일본 청년이 미국에 가서 포드 대통령을 쏘려고 하다가 빗나가서 포드 대통령 부인을 죽였다고 할 때 일본의 책임이 없다고 할 수 있느냐」 이런 표현을 했더군요.
     
     『일본은 文世光이 일본에 와 살던 조선계라는 걸로 피해 갔죠. 깊이 관여하면 할수록 입장이 어려워진다고 생각했는지 아주 발뺌을 했지요』
     
     이 대목에서 金鍾泌씨는 江澤民(강택민) 중국공산당 총서기와 만났을 때의 일화를 들려주었다.
     
     『江澤民 사무실에 갔는데 큰 매화 그림이 있었어요. 그 그림에 「枯木逢春」(고목봉춘)이라고 써 있었어요. 江澤民에게 「공산주의下에서 시장경제를 하자는 뜻 아니냐. 저것이 중국의 방향을 제시한 鄧小平의 생각이냐」고 했더니 「여기에 수많은 사람이 왔지만 저걸 지적한 사람은 당신밖에 없다」고 하더군요. 그는 굉장히 유쾌한 사람이에요. 말을 몇 마디 할 때마다 영어 단어 한두 개를 꼭 집어넣어요. 원래 30분간 만나기로 했는데 거의 두 시간 정도 얘기했어요』
     
     ―중국은 원만한 사람이 지도자가 되는 모양이지요.
     
     『어디나 그래요. 알고 보면 모자란 듯한 사람들이 지도자가 돼요. 우리는 어떻게 할 도리가 없는 사람들이 돼요』
     
     
     
  • 『아마추어리즘에 포퓰리즘이 보태졌다』
     
     ―정계 은퇴 후 정치에 일부러 관심을 안 두시려고 합니까.
     
     『그래요, 일절 관여 안 합니다. 내 나라 정치인데 관심이야 없을 수 없지. 그러나 표현하거나 누구에게 의견을 얘기하는 건 극히 삼가고 있습니다』
     
     ―요즘 나라 돌아가는 거 보고 위기감은 안 느끼십니까.
     
     『위기감까지는 안 가져요. 일본 NHK와 대담할 때도 그런 질문이 있었어요. 그때 「난 밖에 나와서 내 모국을 좋은 일이건 아니건 평하지 않는다. 물으니까 한마디 한다. 지금 걱정하는 건 아마추어리즘에 포퓰리즘까지 보태져서 걱정한다」 그러고 말았어요』
     
     ―여러 사람들이 「이것은 경제위기도 총체적 위기도 아니다. 거의 나라의 정체성이 뒤집어지는 반역의 과정이 천천히 진행되는 중이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걱정을 하는 사람이 있겠죠. 저로서는 「老兵은 죽지 않는다. 조용히 사라질 뿐이다」 이 말을 이제 이해할 수 있는 심정입니다. 걱정스럽지만 지켜보는 도리밖에 없어요. 「아마추어리즘에 포퓰리즘까지 보태져서 걱정이 없지 않다」 그렇게 표현하는 도리밖에 없어요』
     
     金鍾泌 前 총재는 盧武鉉 대통령이 지난 7월5일 「연립정부」案을 꺼낸 것과 관련해 秘話를 소개했다. 그는 盧대통령이 당선된 지 얼마 안 되어 與野 지도자들을 초청한 자리에서 「임기 끝나기 1년 전에 내각책임제적 변화를 일으키겠다」고 했다면서 聯政이 아닌 내각책임제로 가는 게 옳다고 말했다.
     
     『내가 1991년부터 줄기차게 내각책임제로 가자고 했는데 모두들 나더러 정권 욕심이 있어서 그렇다며 비난을 했어요. 지나온 과정과 이 나라의 내일을 생각하면 독일式 내각책임제가 바람직하다고 생각해서 주장한 겁니다.
     
     이제 뭘 느끼는지, 한계에 다다랐는지 聯政 운운하면서 「지역적으로 해결되면 권한 이양한다」고 하는데, 다 쓸데없는 소립니다. 대한민국을 진정 사랑한다면 때움질하지 말고 대담하게 내각책임제로 바꿔야 합니다. 우리 국민들이 자기 앞길을 헤쳐 나갈 수 있는 고도의 民度를 가지고 있으니 내각책임제는 충분히 할 수 있어요』
     
     金鍾泌 前 총재는 일본의 某 신문사 특파원이 한 얘기를 들려 주었다.
     
     『그 친구에게 「머리 아픈 일 있느냐」, 「지내는 데 불편한 게 없냐」 했더니, 피식 웃으면서 「물으시니까 대답하겠는데, 盧대통령이 얘기한 걸 기사로 송고할 수 없다」는 겁니다. 그 다음날은 딴소리를 하니까.
     
     그 얘기를 듣고 보통이 아니구나 싶었어요. 대통령이 하는 얘기를 외국 기자가 송고하기 어려울 정도로 혼란스럽다고 하면 문제 아니에요?』
     
     ―경찰이나 공권력이 左派정권下에서 좌경화되어 버렸습니다. 국민들이 맨손으로 경찰의 감시下에 左派와 싸워서 나라를 지켜야 하는 판이 되었습니다. 결국 왜 이렇게 되었느냐 짚어 보면 1997년 12월 大選 때 金총재께서 金大中이라는 左派 지도자의 신원보증자로 손을 들어 줘서 左派정권이 들어섰습니다. 그 연장선상에서 盧武鉉 정권이 들어서서 左派정권이 10년을 가게 되었고 15년을 가게 될지도 모릅니다. 1997년의 일에 대해 국민들에게 보고를 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난 그동안 여러 번 심경을 얘기한 바 있어요. 남북으로 갈라진 것도 슬픈데 동서로 갈라지지 않았습니까. 영남과 호남, 이걸 봉합할 방법이 없겠느냐? 호남이 똘똘 뭉쳐서 金大中씨를 지지한 것은 호남 사람들이 진보적인 생각을 갖고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지역감정이었어요. 거기 金大中씨가 올라탔어. 「이걸 해소하기 위해서는 호남 사람을 하나 대통령으로 만들어 영·호남의 벽을 허물어야 한다」 그렇게 생각했어요』
     
     
     『나는 金大中씨에게 속았다』

     
     金大中씨는 그때 金鍾泌씨에게 두 가지 약속을 했다고 한다. 하나는 「내각책임제를 하겠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朴正熙 대통령 기념관을 짓겠다」는 것이었다.
     
     『두 가지 다 속은 건데… 글쎄 金大中씨를 대통령으로 만드는 걸 도와서 오늘 이런 나라가 되었다? 날 비난하려면 하라지. 본심은 그게 아니었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렇게 된 걸 탓할 테면 하라지. 역사는 지금도 진행 중이고 겪을 과정을 겪는 중이에요. 功過(공과)를 감정으로 운운하는 것은 곤란합니다. 결과는 역사가 증명하게 될 것입니다』
     
     ―객관적으로 봐서 내각제도 관철되지 않고 좌경화도 막지 못했습니다. 그러면 金총재께서 오판하신 건가요, 金大中 대통령이 金총재를 속인 건가요.
     
     『그 사람이 날 속였지. 난 그 사람을 속인 일도 없고. 金大中씨 밑에서 장관·총리 지낸 사람들이 저녁 먹는다고 해도 난 가지도 않거니와 초청도 않더라고. 그런 전말에 대해 좋지 않게 생각하는 걸 그쪽에서도 아니까』
     
     ―한반도에서는 정치를 하든 뭘 하든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으로 먼저 彼我를 갈라야 하는 것 아닐까요. 이념이야말로 가장 큰 전략입니다. 金총재께서는 金大中 대통령이 그동안 갖고 있었던 左派的 이념을 상당히 가볍게 보신 거 아닙니까.
     
     『뭐라고 해석해도 도리 없는데, 난 그 사람이 공산주의자다, 그래서 북쪽과 짝짜꿍해서 조건이 어떻게 됐든 간에 하나 돼봐야겠다, 그런 극단적인 생각까지는 안 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보안법 같은 것도 아주 없애자」고 했지만, 「그거 무슨 소리냐, 왜 저쪽은 가만히 있는데 여기서만 변하나」 하고 내가 반대해서 못 했지. 난 굉장히 견제한 거예요.
     
     국민들이 그런 걱정이 있다면 나 같은 사람을 내쫓는 건 안 해야 해. 그런데 무자비하게 나를 내쫓았어. 그래서 아무 말 않고 나와서 있는 거요. 위컴 유엔군 사령관이 본국 국회에 가서 「한국 사람들은 들쥐 같다」고 보고했습니다. 우리도 반성해야 됩니다. 민주주의는 국민들이 주관을 갖고 선택해야 해요. 주관이 흐리멍텅해. 누가 하나 떠들면 쏠려 버리고. 들쥐가 그런 성향이 있다고 해서 거기 비유한 걸로 해석합니다. 누가 깃대를 들고 앞에 서면 덮어 놓고 따라가요』
     
     ―2000년 總選에서 자민련 의석이 줄어든 것은 1997년에 내각제를 하겠다는 對국민 약속을 자민련이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2004년은 左派정권인 盧武鉉 정권이 들어서는 데 자민련의 역할이 없었고, 오히려 도와주는 역할을 했다, 여기서 보수층이 자민련 지지에서 이탈했다고 봅니다.
     
     『보수든 진보든 간에 자민련이 주체성을 잃었다는 평으로 2004년 총선에서 결딴난 겁니다. 내 생각과 다른 해석이지만 결과를 달게 받아요. 이유여하를 불문하고 유권자들도 이런 정권을 선택했어. 그래놓고 책임은 엉뚱한 데 붙이려고 해. 자민련이 그때 몇 명입니까? 원내 교섭단체도 못 되었는데 무슨 힘이 있어. 국민들은 저질러 놓고 책임은 다른 데 갖다 붙이려는 성향이 있어요. 지금 언론이 견제합니까? 목탁 노릇을 못 하잖아』
     
     ―2000년 6·15 공동선언이 나온 뒤에도 金大中씨는 左派가 아니라고 생각했습니까.
     
     『거기서부터 「끝이 왔구나」 싶었어. 내가 간단하게 속았구나, 그래서 나왔잖아요. 그대로 있을 수도 있었지. 「왜 나가려고 그러냐?」 그 사람들도 그럽디다만』
     
     ―1999년 9월호 月刊朝鮮에 실린 金총리의 인터뷰 기사를 다시 읽어 보니까 이때 너무 쉽게 내각제 개헌을 포기했더군요.
     
     『나는 국민에게 약속한 거니까 국회발의라도 해 달라고 대통령에게 졸랐지만 어쩔 도리가 없었지』
     
     
     『거짓말한 李會昌과 손잡을 수 없었다』
     
     ―그때 李會昌씨와도 만나 그쪽 의중을 떠본 일이 있었죠.
     
     『있지요. 「나하고 내각책임제를 한다면 협력할 생각이 있냐」고 했더니 일언지하에 무시하드만. 그 사람은 대통령이 다 되었다고 생각했을 때니까』
     
     ―金총재의 정치 노선은 金大中씨보다 李會昌씨와 더 가까운데 연대가 안 된 건 李會昌 총재에 대한 불신 때문입니까.
     
     『그 사람이 거짓말을 했어. 나한테』
     
     ―2000년 여름, 골프장에서 만났을 때 20석 이하의 교섭단체도 가능하도록 해달라고 부탁했을 때 李會昌씨가 승낙했습니까.
     
     『예스도 노도 안 하고 黨에 가서 상의하겠다고 했어요. 우리는 그때 17명이었어요. 일본은 세 사람 있는 黨도 동등하게 취급해 주고 발언도 할 수 있어요. 「이번 기회에 국회의 非민주적인 요인을 없앴으면 한다, 교섭단체 최소 인원수를 좀 줄이면 안 되나」 했더니 검토해 보겠다고 했어요. 그러더니 돌아가서는 「그런 얘기를 한 일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고 하더라고. 그래서 「참말인지 거짓말인지 우리가 믿는 하나님이 아신다」고 말하고, 더 이상 추궁은 안 하겠다고 했어요』
     
     
     『2002년 大選 때 투표 안 했다』
     
     ―李會昌씨에게 「왜 金총재와 손을 잡지 않았냐」고 했더니 「金총재는 반드시 대통령이 되고 싶은 야망이 있는 분이어서 그랬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그게 얼마나 모르고 하는 말이냐고. 내가 언제 대통령 하겠다고 했어요. 그것도 거짓말이란 말야. 알지도 못하면서 그런 소리를 하고. 우리 당사에 와서 자기도 내각책임제에 찬성한다는 얘기를 한번 했어요. 가서는 딴소리하고 그러더라고. 총리할 때 정부청사에서 새마을운동 깃대를 다 내리라고 한 사람이야. 자기가 대한민국에 기여한 게 뭐가 있다고. 저 시골의 농민까지 한번 해보자는 의욕을 불러일으켰던 운동을 말살하려고 했어. 「겉다르고 속다른 사람이 대통령 되어서는 안 되겠다」 그래서 지지를 안 한 거요. 내가 지지를 안 해서 그 사람이 안 됐나? 천성적으로 할 사람이 못 돼서 안 된 거요』
     
     ―2002년 12월18일 대통령 선거 때 기권하셨죠? 그것은 정치하는 분으로서 직무유기 아닙니까? 次善이나 次惡이라도 선택해야죠.
     
     『직무유기라고 해도 할 수 없어. 거기 가서 무효표를 내는 거나, 안 가고 기권하는 거나 마찬가지지. 「이런 거짓말쟁이는 안 되고, 다른 하나는 의심스럽고 그래서 기권한다」 그렇게 했어요』
     
     ―金총재는 「金正日이 핵 가지고 공갈치는 것은 핵무기를 개발하지 않은 상태에서 뜯어먹기 위해 공갈치는 거다」 이런 생각을 갖고 계신 거 같은데요.
     
     『그런 생각도 있고, 의외로 갖고 있으면서 진짜로 그러는 건지도 모르겠어요. 연료봉을 8000개나 빼냈다는 걸 보면 있는 거 같기도 하고. 우리를 놀리고 있어요. 6者회담 한다는데, 한 번 말대로 해본 일이 없어요. 이것도 두고 봐야 알아요. 核을 폐기하고 성의 있는 나라들의 원조를 받으면서 평화공존하겠다는 건 믿을 수 없어요. 두고봐요. 또 시간 연장이야. 일본에서 연설할 때 차일피일하다가 어느 날 중대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는 불행을 자초하고 있다고 말했어요』
     
     ―우리가 주체적으로 전략을 선택하는 게 아니라 북한이 우리에게 강요해서 동맹국들이 어려운 선택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몰려간다는 뜻인가요.
     
     『결국 이렇게 가면 어느 위험 한도까지 다다를 거야. 그러면 「예스」냐 「노」냐 두 가지 중의 하나를 선택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그전에 유엔 안보리에 가져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아무리 6者회담 운운하지만 저 사람들은 미국을 상대합니다. 미국하고 짝짜꿍해서 끝나면 따라가는 수밖에 없어. 뭘 우리가 주도적으로 해. 북쪽은 남쪽을 하나의 수단으로 생각하지』
     
     ―金正日 정권이 오래갈 거 같습니까.
     
     『그렇게 간단치 않을 거요. 북한은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의 위기관리 기능이 있어요. 어떤 경우든 어떤 상대든 고통을 줄 만한 힘은 아직 갖고 있어요. 북한에 변화가 있으려면 궁정혁명이 일어나야 하는데, 그들이 공동운명체인데 다른 짓을 하겠어요? 같이 간단 말입니다. 결국은 지금처럼 자꾸 시간 연장이 불가피하지』
     
     ―최근 만난 북한 要人 이야기가 노동당의 과장급 이상, 군대의 영관급 이상은 金正日과 공동운명체라는 생각을 한답니다.
     
     『그럴 겁니다. 「식량 달라, 전기 달라, 비료 달라」 한다고 명운이 내일 모레 달린 게 아닙니다. 金日成이 죽었을 때 이북이 결딴나서 수십만의 피란민이 내려오고, 일본으로도 간다고 했는데,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이 넘겨짚었지만, 하나도 맞지 않았어요』
     
     
     『나는 국민들을 믿는다』
     
     ―1961년 5·16의 공약 제1조가 「反共을 국시로 한다」는 것이었고, 당위성은 「나라를 좌경화에서 구출한다」는 것이었는데 1960년에 좌익들이 나와서 횃불시위도 했지만 당시 張勉 정부는 反共정부가 확실했습니다. 지금은 左派들이 권력을 장악하고 있습니다. 1960년의 한국과 지금의 한국을 비교하면 어떤 시기가 더 위험하다고 보십니까.
     
     『나와 해석이 좀 다릅니다. 張勉씨는 反共사상을 갖고 있다고 하지만 위기관리도 제대로 못 하면서 총리가 됐어요. 매일매일 데모로 나날을 보냈어요. 사람들이 국회에 비집고 들어가서 국회의사당 테이블 위에 올라가 호령을 하고, 경찰관이 데모를 하는 세상이었어요. 그때 우리 국력은 북한에 비해 열등했습니다. 우리는 이 정권 갖고 안 되겠다, 이걸 막으려면 철저한 정신을 갖고 세상 다시 만들어야겠다는 데서 출발한 겁니다』
     
     ―지금이 그때보다 더 안전하다고 보십니까.
     
     『그때는 기초가 없어서 金日成이 쳐들어오면 제대로 막을 수 없었어요. 국민들의 생각도 그랬지만 정신적으로나 정치·사회적으로나 뭐 하나 택할 게 없을 정도로 허물어졌어요. 6·25 전쟁 때 생명을 내던지고 공산군 침략과 맞서 싸운 사람들이 위기감을 느끼고 안 되겠다고 생각했죠.
     
     지금은 우리 국력이 북쪽의 20배는 돼요. 위컴이 허튼 비유를 했지만, 그래도 우리 국민은 당하면 강해집니다. 당하면 선택도 제대로 해요. 아직 덜 당했어. 지금은 각자가 생활을 꾸려갈 수 있는 고도화된 民度를 다 갖고 있어요.
     
     당하면 잠재하고 있던 옳은 생각이 나올 정도로 되어 있어, 그렇게 위험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당시에 4500명 갖고 나라를 위한 혁명을 했지만 지금은 左든 右든 혁명을 하려고 해도 안 되는 사회가 되었어요. 1960년처럼 위험하진 않아요』
     
     ―聯政이라곤 하지만 열린당과 민노당은 사실상 聯政 관계입니다. 그래서 국방장관 해임안이 부결됐어요. 민노당 강령은 「북한 연방제 통일 방안도 수용할 수 있다」고 되어 있습니다. 駐韓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도 주장하고 있죠. 민노당이 7월 말에는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사회민주당과 협상한다고 합니다. 사회민주당은 對南공작기관인 통일전선부 제4국입니다.
     
     『그러니 우습다는 거예요. 민노당과 聯政을 안 해도 하고 있는걸. 코드가 맞는 사람들과 하는 게 聯政이야. 그거 안 해도 자기네 손을 들어 주는데 그게 무슨 聯政이야』
     
     ―金총재께서는 낙관을 하지만 저는 장기적으로는 낙관, 단기적으로는 비관적으로 봐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左派的인 세력이 공권력을 잡고 있고, 저항해야 할 야당인 한나라당은 金文洙 의원의 설명을 빌린다면 「웰빙族이 되어서 對北정책에 완전히 투항한 꼴」이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언론도 같이 무력화되고 있는 상황입니다. 무슨 힘이 있어서 한국의 보수세력이 대한민국 헌법 정신을 지켜 갈 수 있겠습니까.
     
     『국민들을 믿습니다. 이 나라 국민들의 성향은 뭐가 일어나야 움직인다니까. 여차하면 택할 것을 어김없이 택하는 슬기가 있어요. 난 그걸 믿는다는 얘깁니다. 權不十年(권불십년)이야』
     
     
     『군대가 또 나올 이유는 없었다』
     
     ―요즘 방영하는 5共 드라마 보십니까.
     
     『안 봐요. 처음에 집사람이 보고 얘기해주었어요. 난 그런 거 안 봐요. 작가에게 미안하지만 재미 위주로 대부분 픽션을 집어넣으니까. 외국에서는 20~30년간 전부 알아낼 대로 알아낸 다음 그래도 사실에서 어긋나는 거 있으면 지적해 달라, 이러면서 방송합니다. 우리는 그런 거 합디까? 픽션도 전부 사실처럼 하는데, 그걸 뭘 봐』
     
     ―5공화국에 피해를 당하신 金총재는 인정하기 힘드시겠지만 5공화국을 긍정적으로 볼 면이 있다고 봅니다. 5共은 1980년대에 세계 최고의 경제성장률인 연평균 10.1%를 달성하여 그 바탕 위에서 올림픽도 치르고, 6·29 선언으로써 민주화의 길을 열었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朴正熙 대통령 시절이 높게 평가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全斗煥 대통령 시절, 특이했던 점은 朴대통령을 격하하지 않았다는 겁니다. 그들은 언론이 朴대통령을 비판하려는 것을 안기부·문공부를 동원해 막았습니다.
     
     『5共이 「수출입국」 한 건 朴대통령이 1970년대에 해놓은 게 저력이 된 겁니다. 나는 그동안 5공화국을 평한 일은 없어요. 다만 그때 군대가 나와야 할 이유가 없는데 나왔어요. 그건 냉정하게 알아야 해. 난 그때 새 헌법에 의해 대통령이 선출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는 당시 군대가 나올 필요가 없었던 이유를 이렇게 들었다.
     
     『朴대통령이 공업화·산업화하기 위해 위기관리 수단으로 유신체제로 돌려 놓은 겁니다 그 시대를 해결해 나가는 하나의 방법이었어요. 朴대통령이 세상을 떠났으니 그 헌법은 거기서 종지부를 찍어야 돼요. 崔圭夏씨에게 「과도정부니까 헌법개정을 해서 공정한 선거를 치러 새로운 정부 발족시켜야 한다. 그렇게 된다면 6년간 대통령을 한 거보다 평가받을 거다」 그랬더니 「하겠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申鉉碻씨가 뒤에서 자꾸 「이건 정식으로 된 정부지 과도정부가 아니다」 이러면서 국회에서 개헌작업을 하고 있는데, 정부가 또 개헌작업을 시작해서 혼란이 일어나기 시작한 겁니다』
     
     ―金泳三·金大中 등 민간정치인들이 분열되어서 군인들이 나올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한 면이 있지 않나요.
     
     『그때 그렇게까지 분열되진 않았어요. 그 사람들도 「새 헌법에 의해서 하겠다」고 하고선 속셈으론 각자가 다 대통령이 되는 걸로 생각하고 있더라고. 이런 모습을 보면서 내가 春來不似春이라고 일종의 경고를 해주기도 했지. 하지만 그게 분열을 일으킬 정도로 표면화하진 않았어요. 다만 국회와 행정부가 헌법을 만드는 과정에서 이견이 있었죠. 정부에서 자꾸 한다고 하고 국회는 이미 시작했고, 하지만 그게 무슨 군대가 나올 만한 이유까진 아니었죠』
     
     
     『全斗煥이 하긴 잘했어요』
     
     ―12·12 사건 때 全斗煥 합수본부장이 유혈사태 없이 鄭昇和 장군을 연행했으면 아마 대통령이 될 수 없었을 겁니다. 그날 유혈사태가 있었기 때문에 돌아갈 수 없는 다리를 건너게 된 거 아닙니까. 全斗煥 대통령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평가를 해주시죠.
     
     『종합적으로 20년이 지났는데, 그때 나왔어야 될 이유는 없었어요. 나온 다음에는 안 할 도리가 없는 거지. 하긴 잘 했어요. 나카소네가 총리가 되더니 돈을 잔뜩 갖다 줬어. 40억 달러 경협자금을 갖고 한국이 움직였습니다. 「한국을 중요시해서 그렇게 했다」는 말을 나카소네(당시 총리)가 합디다. 그가 총리가 된 뒤 가장 먼저 찾아간 게 한국이고, 그 다음이 미국이었다고. 이유는 어떻든 그렇게 해서 잘 갔어』
     
     ―5공화국을 평가하신 최초의 말씀입니다.
     
     『5共이 나를 부정축재자로 만들었어요. 장학재단인 「운정재단」을 만들어서 내가 계획했던 대로 학교재단에 재산을 다 주었어요. 1973년에 제주도에서 수확이 나오기 시작해서 재단에 넣고, 목장은 1979년에 재단을 만들었어요.
     
     사회에 다 환원했는데 그걸 갖고 나더러 축재했다고 몰았어요. 나무를 많이 심어서 한 그루에 몇천원씩 계산하고 그랬어요. 「허튼짓 하고 있는데 내가 뭐라 해봤자 소용없으니 마음대로 해봐라. 다만 어느 날인가 국민들의 심판을 받지 않을 일을 해라」 그렇게 얘기했지』
     
     ―1987년 6·29 선언 이전에 민주화 운동이 대세를 이룰 때 金총재도 거기 동참했으면 좋았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난 안 했어요. 남이 한다고 괜히 쫓아다니는 거 싫어하니까』
     
     
     
  • 『朴槿惠는 金正日의 朴대통령 칭찬에 놀아나』
     
     ―한나라당 朴槿惠 대표에 대해 충고할 얘기는 없을까요.
     
     『충고라기보다는 리더십이 서 있는 것 같지 않아요. 그때 그때 조건반사적으로 반응을 보이는 것 같은데 그래가지고서는 유일한 야당이 힘을 발휘할 수 없어요. 야당이 잘해야 정치가 제대로 움직여 나가는 건데. 그렇지 않아도 與黨 만능인데, 말로는 與小野大라고 하지만 野大도 아니에요』
     
     ―朴槿惠 대표가 2002년 초에 金正日을 만나고 난 다음에는 金正日을 일절 비판하지 않습니다. 그러다 보니 한나라당의 對北정책 견제는 거의 불가능한 것 아닌가 생각합니다.
     
     『金正日이 朴대통령 치적을 칭찬한다는데, 그게 생각이 있어서 그러는 것이거든. 정말 朴대통령을 위대한 지도자였다고 말한다면 몰라도. 한나라당이 여당과 너무 변별을 심하게 하지 못하게 하는 이중적인 계산이 있어서 그러는 듯한 인상을 받아요. 거기에 왜 놀아나느냐 말에요』
     
     ―1945년 8월15일에 어디 계셨습니까.
     
     『그때 초등학교 선생이었는데 방학이 끝날 때까지 여행을 하려고 했어요. 서울과 원산까지 갔다가 돌아다니기 싫어서 부여 집에 와 있었어요. 일본 천황이 중대방송 한다고 해서 라디오를 틀었는데 찍찍거려서 못 알아들었어요. 내용을 당최 알 수가 있어야지. 읍내에 갔더니 정말 빠릅디다. 일본이 항복했다는 소리가 나왔어요』
     
     ―그때 심정은 기뻤습니까, 아니면 걱정이 앞섰나요.
     
     『걱정은 없었고 기쁨도 별로 없었어요. 뭔가 형용하기 어려운 심정이었어요. 하도 갑자기 일어나서』
     
     ―부여에 살던 일본 사람들은 보복을 안 당했습니까.
     
     『남한에서 보복당한 일본인은 없습니다. 특히 부여에서는 우리들이 중심이 되어서 「깨끗하게 보내 주자. 이 사람들이 무슨 죄가 있나」 해서 아주 깨끗하게 보내 줬습니다』
     
     ―패전국이 식민지국가로부터 당하지 않은 유일한 사례가 아닐까요.
     
     『다치지 않고 돌아간 건 남한이 유일할 겁니다』
     
     ―독일이 패전한 후 체코슬로바키아와 폴란드 등에서 독일인 300만 명이 맞아 죽었다고 하더군요. 이런 부분에 대해 일본 사람들이 고맙게 생각합니까.
     
     『60년 전을 몰라요. 100년 전은 더 모르고, 민비 사건이 난 110년 전은 전혀 몰라. 얘기를 하면 멍하니 앉아 있어요』
     
     ―일본인과 얘기하면 아무리 친하더라도 근본적으로 시각이 다르다는 걸 느낀 적이 있습니까.
     
     『있지요. 우리에게 우월성을 갖고 있어요. 지금도 한국을 얕잡아 보고 쓸데없는 소리를 하잖아요. 우리를 만나면 안 그러지만 자기들끼리 있을 때 얕잡아 볼 거예요』
     
     
     『우리 국민은 당하면 강해진다』
     
     ―올해가 광복 60년인데, 총재께선 이 60년을 청년기부터 황혼기까지 사셨고, 60년의 역사적 사건 때마다 중요한 자리에 있었는데 대한민국 60년을 총체적으로 정리하신다면.
     
     『우리 국민들은 위대하다고 봐요. 가끔 주체성이 모자란 점이 지적되어야 할 경우도 있지만 아무것도 없는 데서 공산침략을 막아 낸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戰後의 혼란상은 겪어 보지 않은 사람은 상상도 못 해요.
     
     아무튼 좌익판이었으니. 그걸 李承晩 대통령이 누르고 공산군 침공을 막아 내고 나라를 건국하고 지탱했어요. 3·15 부정선거로 건국의 대통령을 폄하하지만 업적을 보면 부정선거를 커버하고도 남을 정도의 功이 있다고 봅니다』
     
     ―李承晩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남한까지 좌경화되었을 것으로 봅니까.
     
     『역사에 「가령」, 「이후」는 있을 수 없다지만 李承晩 대통령이니까 막아 냈어요』
     
     ―광복 직후 사회풍조가 좌경화로 가고 있었습니까.
     
     『좌경되지 않으면 어디 가서 행세 못 했어. 무식한 놈이라고. 무슨 세상이 그래. 그걸 막아 내고, 전쟁을 막아 내고, 어려움 속에서도 미국과 방위조약을 맺어서 北으로부터의 침공을 막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그 다음에 어렵게 생각했던 韓日 국교정상화를 이룩하고, 그걸 계기로 조국 근대화가 진행되어서 오늘날 경제규모가 세계 11번째 국가가 된 거 아닙니까. 이렇게 되기까지 지도력과 리더십도 중요했지만 결국은 우리 국민들의 힘입니다』
     
     20~30년 만에 한국처럼 일어선 나라가 없다고 말하는 金鍾泌씨는 극빈상태에서 24시간 침략위협을 받으면서 이룩했기에 더욱 대단하다고 말했다.
     
     『대단한 나라, 대단한 국민들이여. 아까 진담 반 농담 반으로 「우리 국민은 당하면 강해지고 당하면 선택하더라」고 했지만 지난날을 회고하면서 실감합니다. 나는 믿어요. 지금 별짓을 해도 어느 날 「우리가 바라는 세상이 못 되는구나」 할 때는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몰라요.
     
     그래서 어느 정도 낙관을 하는 거지요. 너무 걱정하지 마시오』
     
     
     『정치는 虛業이다』
     
     ―李承晩 대통령을 직접 만난 적이 있습니까.
     
     『두 번 있어요. 전쟁 나서 육군본부가 후퇴할 때 대전에서 뵈었어요. 主力들이 후퇴하는데 언제 여기까지 올지 모르니까 아주 대구쯤 가 계시라고 했어요. 조금 있다가 딘 소장이 납치당했잖아요. 그런데 李대통령께서는 「내가 왜 가. 나 여기 있어」 그러시더군요. 내가 브리핑 장교였는데 거기 상황설명을 드리니까 확고부동하게 「안 간다. 난 여기서 귀관들과 같이 싸운다」 그러셨지요.
     
     두 번째는 1962년에 그분의 망명지인 하와이에서 뵈었지요. 「나 서울 가」 그러다가 침대에서 낙상하셔서 두 팔이 다 부러졌어요. 내가 갔을 때 팔을 병원 천장에다 매달고 계셨어요. 사람을 못 알아보시더구먼. 프란체스카 여사에게 2만 달러를 전했어요. 朴대통령이 「좀 더 해드리고 싶지만 나라가 어려워서 이것만 보낸다. 적지만 보태쓰시라」고 했다고 하니까 프란체스카 여사가 눈물을 막 쏟았어요.
     
     병원장에게 李대통령께서 환국하고 싶으면 언제든지 환영할 준비가 되어 있는데 신체상으로 어떠냐고 물으니 안 된대. 고공에 올라가면 거기서 돌아가실지도 모른다고. 결국 세상 뜨신 뒤 환국했지요』
     
     ―6·25 남침 기습을 받고도 국군이 무너지지 않고 후퇴하면서 싸웠는데 그때 국군이 희망을 가진 근거는 뭡니까.
     
     『국제연합군이 온다는 데 희망을 가졌죠. 「美 24사단이 왔다. 우린 망하진 않겠다」고 생각했죠. 낙동강변에 가니까 유엔군이 일부 왔고, 부산에서 장비가 올라오기 시작했어요. 대포·바주카·탱크가 올라오고 일본에서 도요타자동차와 닛산자동차가 대포 견인차로 왔어요』
     
     ―좌익들은 맥아더가 안 왔으면 한국이 미국 식민지가 안 되었을 거라면서 인천에서 맥아더 동상을 무너뜨린다고 합니다.
     
     『얼마나 모르면 그렇게 미련해. 미국 장군이 맥아더밖에 없어? 맥아더 없으면 다른 장군이라도 했어』
     
     ―정치는 은퇴했지만, 국민으로 사시면서 앞으로 뭘 하실 겁니까.
     
     『이대로 사라지는 거지, 앞으로 뭘 하나. 다만 나라가 안 되겠다 하면, 늙은이 몸으로 해야 한다면 주저하지는 않을 거요. 79세지만 아직 젊은 사람에게 지지 않을 패기는 있어요』
     
     ―좌우명이 여러 개 되죠.
     
     『몇 개 있어요. 「笑而不答(소이부답: 웃기만 하고 대답하지 않음)」도 있고, 「五十以之非四十九」라는 것도 있어요. 쉰 살이 되어 돌아보니 49년을 헛되이 살았더라는 의미입니다. 이제는 「八十以之非七十九」가 좌우명이지』
     
     
     내 뼛가루를 하늘에 뿌려 달라고 했다
     
     ―묘비명에 대해 미리 생각하신 것 있습니까.
     
     『나는 묘를 없애라고 얘기했어요. 아들이 공군 출신인데 「내가 죽거든 화장한 뒤 세스나기를 대절해서 전국에 조금씩만 뿌려 달라. 그리고 묘 쓰지 말아라」 그렇게 얘기했어요. 모르지. 죽은 다음 그대로 해줄지. 비석이라도 하나 세워서 아무개 묘지다 이럴지』
     
     金鍾泌씨는 5·16 혁명 이전에 집을 두 채나 지어 본 경험이 있다고 했다. 땅을 사서 미장이 한 명을 데리고 퇴근 후 집을 지었는데 한 채 완성하는 데 6개월씩 걸렸다고 한다. 두 채 다 짓고 있는 도중에 사고 싶다는 사람이 있어서 이윤을 많이 남기고 팔았다.
     
     『내가 실업인으로 갔으면 돈관이나 모았을 텐데 정치가는 虛業입니다. 實業은 움직이는 대로 과실을 따니까 실업이지요. 경제하는 사람들을 왜 실업가라고 하냐면 과실을 따먹거든. 정치하는 사람은 이름은 날지 모르지만 속은 텅텅 비었거든. 나도 2~3년 후에는 어떻게 살까 걱정이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