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룹사운드'의 전설, 가수 윤항기를 만나다
  • "지금 목소리가 예전보다 더 힘이 있고 깊이가 있다는 얘기를 들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어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가 절로 나온답니다."

    어느덧 백발이 된 가수 윤항기(75)는 "30년 전보다 지금 목소리가 더 쌩쌩하다"며 "남들이 다 은퇴할 나이에 현역으로 뛰고 있는 지금이 너무나 행복하다"고 말했다.

    "칠십 중반을 넘어서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요. 이젠 쉬어야 할 때가 아니냐는 말들을 많이 듣게 돼요. 실제로 제 주변에 있는 선후배들이나 동료들도 이제는 거의 일손을 놓고 쉬는 분위기예요. 그런 면에서 저는 너무 감사할 수밖에 없죠. 이 나이에 은퇴를 하고도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요."

    1959년 미8군 무대를 통해 데뷔한 윤항기는 여전히 현역 가수로 활동 중이다. 87년부터 약 30년간 목회자로 외도(?)를 하긴 했지만 2014년 컴백한 뒤로 신곡도 내고 콘서트도 여는 등 여느 가수들과 다를 바 없는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2014년에 데뷔 55주년을 기념해 '걱정을 말아요'라는 곡도 발표했고, 작년엔 '완전 좋아 딱 좋아'라는 신곡도 냈어요. 그렇게 쉼없이 활동을 하다보니 어느새 올해도 반년이 훌쩍 지나버렸습니다."
  • 사실 윤항기가 신곡을 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불과 며칠 전이었다. 28일 '2018 낭만콘서트'에 출연하는 윤항기가 '완전 좋아 딱 좋아'라는 신곡을 들려준다는 기사를 읽고, '아, 선생님께서 오랜 만에 음반 취입을 하셨구나'라고 생각했던 것. 당연히 이날 공연을 윤항기의 '신곡 발표 무대' 정도로 생각했던 필자는 다짜고짜 그에게 전화를 걸어 인터뷰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공연 직전에 시간이 났고, 그가 총장을 맡고 있는 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 사무실에서 극적으로 인터뷰가 진행됐다.

    보통 유명 가수들의 사택이나 집무실에 가보면, 한쪽 벽면은 현역 시절 받았던 각종 상패나 상장들로 도배가 돼 있기 마련이다. 윤항기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보였다. 책상 앞에 놓인 응접 쇼파에 앉아 상단을 바라보니 숫자를 헤아리기 힘들 정도로많은 상패들이 책장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런데 가만히 상장에 써 있는 글자를 읽어보니 가수와 관련된 상이 아니었다. 대부분 교회와 관련된 것들이었다.

    "다 버렸어요. 미련이 생길까봐. 저거 치우는 데 정말 애 많이 썼어요. 한 트럭도 더 나왔을 거예요. 아마."

    윤항기는 자신이 가수 생활을 접고 '주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을 때 '세상 부귀 영화'의 상징인 상패들을 모조리 버렸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대단히 후회하고 있다며 너털 웃음을 지어보였다.

    "지금은 너무 후회돼요. 왜냐하면 제가 우리나라 그룹사운드 역사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메모리얼 센터를 기획 중이거든요. 그러면 그 안에 저희들이 한창 활동할 때 받았던 상패라든가 악기라든가 의상, 그런 것들을 다 전시해야되는데, 제가 상패들을 싹 다 버렸으니…. 저는 활동을 하면서 이런 상패들을 참 많이 받았거든요. 일년에 수십개씩 되는 상을 20년간 받아봐요. 엄청난 숫자가 나올 수밖에요."
  • 그래도 그가 과거에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보여주는 '흔적' 하나가 벽에 걸려 있었다.

    "저 사진요? 제가 '키보이스'로 활동하던 때 찍은 사진이에요."

    '키보이스(Key Boys)'. 1963년에 결성된 전설의 5인조 그룹. 윤항기가 드럼을 맡고, 일렉 기타는 김홍탁이 쳤다. 보컬은 유희백, 키보드와 베이스는 옥성빈과 차도균이 담당했던 국내 최초의 록밴드가 바로 키보이스다. '해변으로 가요(1969년)'라는 노래를 전국적으로 히트시키며 60~70년대 젊은이들의 '우상'이자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됐다. 윤항기는 이 그룹의 주축 멤버였다.

    "대단했죠. 그때 인기는 요즘 아이돌 가수 못지 않았어요. '키보이스'는 60년대 젊은이들의 해방의 분출구였어요. 신중현씨가 만든 '에드 포(Add 4)'와 양대 산맥을 이뤘죠. '연고전'보다도 열기가 더 뜨거웠을 거예요. 보통 라이벌이 아니었거든요. 대학 축제나 '쎄시봉' 등에서 연주 활동을 하면서 여학생 팬들이 부쩍 늘어났어요. 나중에 '해변으로 가요'가 공전의 히트를 치면서 전국구 스타가 됐죠."

    한국형 그룹사운드의 '효시'로 불리는 '키보이스'를 이끌다 솔로 가수로 변신한 윤항기는 여동생 윤복희와 함께 60~70년대 대중음악의 기틀을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렇게 부와 명예를 한손에 거머쥐며 남부러울 것 없는 삶을 살던 그가 하루 아침에 목회자가 됐다는 소식은 당시에도 충격적인 뉴스가 아닐 수 없었다.
  • ▲ 1979 서울 국제가요제 앨범 자켓. ⓒ 한국대중가요앨범 / 한국대중가요연구소
    ▲ 1979 서울 국제가요제 앨범 자켓. ⓒ 한국대중가요앨범 / 한국대중가요연구소
    "78년에 폐결핵에 걸려 쓰려졌어요. 폐결핵 말기라 약도 없었죠. 수술도 불가능한 상태였고. 그냥 죽을 날만 기다리는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었어요. 그때 아내와 여동생의 권유로 하나님을 믿게 됐고 기적적으로 완쾌됐어요. '기적'이라는 말밖에는 달리 설명할 길이 없어요. 당시 한참 사경을 헤맬 때 병만 낫게 해시주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겠다는 서원 기도를 했거든요. 다시 활동을 하면서도 그게 계속 마음에 걸리더라고요. 결국 '86아시안게임'을 끝으로 과감히 접었죠."

    MBC '나는 가수다'에서 임재범이 불러 화제가 됐던 '여러분'은 윤항기가 기적적으로 완쾌된 뒤 지은 노래다. 실의에 빠진 여동생을 위로하기 위해 자신의 신앙적 체험을 녹여내 만든 이 노래는 1979년 '서울국제가요제'에서 그랑프리(대상)를 수상했다. 그해 6월 20일 지구레코드에서 발매된 '서울국제가요제' 실황 앨범 자켓에는 가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한 후 윤복희·윤항기 남매가 격렬하게 부둥켜안고 오열하는 극적인 모습이 담겨 있다.

    1979년 6월 2일 MBC가 세종문화회관에서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가요제에는 세계 12개국을 대표하는 18명의 가수들이 나와 치열한 경연을 펼쳤다. 한국 대표로 출전한 윤복희는 오빠 윤항기가 작사·작곡한 '여러분'을 불러 영예의 그랑프리를 거머쥐었다.

    수상 직후 윤항기는 "윤복희가 외로울 때면 위로해줄 사람은 누구? 바로 여러분!"이란 인사를 건넸고, 윤복희는 눈물이 범벅된 얼굴로 앵콜송을 부른 것으로 전해진다. 폐결핵 말기 선고를 받고 절망 속에 몸부림 치던 윤항기는 자신의 동생 역시 이혼의 아픔으로 괴로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전해 듣고 '여러분'을 작곡했다. 동생을 위로하는 노래이면서 동시에 자신에게도 용기와 힘을 실어주고자 만든 노래였던 것.
  • ▲ 1979 서울 국제가요제 앨범 자켓. ⓒ 한국대중가요앨범 /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어느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레마로 성경 구절을 들려주셨어요. 그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인데요.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라고 시작하는 말씀이었죠. 그 말씀을 받고 깊이 묵상하면서 그 곡을 쓰게 된 거죠. 종교적인 말로 얘기하자면 제가 만든 곡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그 곡을 쓰도록 만드신 거예요."

    죽음의 문턱에서 '신'을 만나 건강을 회복한 그가 어떤 길을 걷게 되리라는 건 너무도 자명해 보였다. 86년 미국으로 훌쩍 떠나 신학도가 된 그는 현지 신학교에서 목사 안수를 받고 돌아와 국내 최초로 '음악목사'가 됐다. 1990년 '음악신학교'를 세우며 후배 양성에도 힘을 쏟았던 그는 30년간 '목회(牧會)'라는 한 우물만 팠다.

    그랬던 그가 다시 '가수'가 됐다.

    2014년 목회자로서 '은퇴'를 맞이한 그는 다시 마이크를 쥐고 노래를 부르는 '딴따라'의 길을 택했다. 올해 나이로 일흔 다섯이 됐지만, 컴백한 날짜부터 계산하면 이제 4년차(?) 가수에 불과하다.

    공연을 목전에 둔 그는 여느 '신인 가수'들처럼 들떠 보였다. 지난해 신곡을 내고 쉼없이 활동을 하다보니 어느덧 올해도 반년이 훌쩍 지나버렸다는 그. 70대 중반의 나이에 이처럼 정열적으로 뭔가에 꽂혀 있는 사람이 또 있을까?
  • ▲ 1979 서울 국제가요제 앨범 자켓. ⓒ 한국대중가요앨범 /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이 나이에 은퇴를 하고도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 너무 감사하죠. 어떤 목표를 갖고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갖고 일을 하는 자체가 나름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정신이 건강해지니까 자연히 육체적인 건강도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복장도 야구 모자에 청바지를 입은, 영락없는 '청년'의 모습이다. 근엄한 목회자에서 '원조 아이돌 가수'로 돌아온 그는 새로운 꿈을 꾸고 있다. 우리나라 대중음악의 뿌리인 '그룹사운드'의 역사를 기록한 기념관을 세우는 것. 예전 '키보이스' 멤버들과 함께 역사적인 프로젝트를 시작한 윤항기는 내년엔 데뷔 60주년을 기념하는 콘서트를 열겠다며 벌써부터 열의를 다지고 있다.

    윤항기는 젊은 작곡가로부터 곡도 받고 새로운 장르에도 도전해보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냈다. 또 한 가지, "콜라보가 요즘 대세 아니냐"며 누군가와의 '듀엣 작업'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그에게 이같은 '바람'을 잔뜩 집어넣은 장본인은 가수 최백호다. 최백호는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한 윤항기가 신곡에 대한 고민을 드러내자, '어린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았더니 의외로 반응이 괜찮았다는 경험담을 들려준 것으로 전해졌다.

    참고로 최백호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했던 가수는 '아이유'였다.

    그렇다면 윤항기는?



  • - 사실 윤항기씨께서 '신곡'을 내셨다는 사실을 이번 '낭만콘서트'를 통해 알게 됐는데요. 정확히 어떤 노래인가요?

    ▲'완전 좋아 딱 좋아'라는 노래예요. 사실은 이 곡이 나온지가 한 일년 됐어요. 나름대로 홍보는 했는데, 아무래도 우리가 홍보하는 방식이 요즘 젊은 사람들이 하는 스타일과는 많이 다른 것 같더라고요. 아직은 제가 아날로그적인 성향이 있어서 그런지, 우리는 그냥 라디오나 텔레비젼에만 신경을 쓰거든요.

    그런데 라디오든 텔레비젼이든 제가 출연하는 방송은 대부분 연령대가 좀 있으신 분들이 보잖아요. 40대만 돼도 잘 안보는 경향이 있어서…. 그래서그런지 젊은 층에선 전혀 모르더라고요. 인터넷이나 온라인 방송 등을 통해 이런 소식들이 쫙 퍼졌으면 젊은 사람들도 많이 접했을 텐데요. 반성을 좀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는 신곡이 나오거나 콘서트 계획이 잡히면 다양한 방식으로 홍보를 해볼까해요.

    - 2014년 목회자에서 은퇴하신 이후 신곡을 담은 55주년 골든 앨범도 발매하시고 공연 활동을 재개하셨잖아요? 그런데 아직도 제 주변에선 윤항기씨의 근황을 대신 여쭙는 분들이 많이 계시더라고요. 윤항기씨는 요즘 뭐하시냐고. 아마도 언론에 소개가 많이 안돼서 그런듯 한데요. 최근 몇년간 어떻게 지내셨는지 간단하게 근황을 좀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저는 30년간 목회 활동을 하다가 2014년에 정년 퇴임을 했습니다. 마침 그때가 제가 가수 데뷔를 한지 55주년이 되는 해였어요. 그래서 55주년을 기념하는, '걱정을 말아요'라는 기념 음반을 발매했죠. 그러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가수 활동을 재개했어요. 2014년은 사실상 가수 활동 재개를 위한 준비기간이었고요. 그해 늦은 가을에 간단히 '쇼케이스'만 갖고 이듬해 55주년 기념 콘서트를 열었습니다.

    '걱정을 말아요'라는 곡을 들고 나름 열심히 방송 활동을 했고요. 작년 5월에 좀전에 소개해 드린 '완전 좋아 딱 좋아'라는 신곡을 발표하면서 쉼없이 방송 활동과 공연을 병행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올해도 벌써 반년이 지나버렸습니다. 눈깜짝할 사이에….

    - 올해 나이가 일흔 다섯이신데요. 그러면 지난해 신곡을 발표하실 때가 일흔 넷이시고…. 이 정도면 국내 최고령 수준아닌가요? 현역 가수 중에서 일흔 넷에 신곡을 발표한 가수가 또 있을까요?

    ▲글쎄요. 제 주변에 또래 가수 중에서 신곡을 발표했다는 얘기는 아직 들어보지 못했습니다.

    - 아무래도 윤항기씨께서 신기록을 세우신 게 아닌가 싶은데요. 그만큼 가수 활동을 오래하는 게 힘든 일이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하는 '체력'이라든가 '감성'을 유지하는 일도 쉽지 않으리라 생각됩니다. 따라서 일흔 중반이 넘어서도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계신 점이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그런 차원에서 윤항기씨께선 어떤 자기 관리 비결을 갖고 계신지 여쭤보고 싶습니다.

    ▲저처럼 칠십 중반을 넘어서 팔십을 바라보는 나이가 되면요. 이젠 쉬어야 할 때가 아니냐는 말들을 많이 듣게 돼요. 실제로 제 주변에 있는 선후배들이나 동료들도 이제는 거의 일손을 놓고 쉬는 분위기예요. 그런데 이게 쉬고 싶어서 쉬는 게 아니거든요. 활동을 하고 싶어도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제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은퇴를 하는 거죠. 아직도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는 정신력과 체력을 갖고 있는 데에도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안되다보니…. 사실 저희 부모님 세대와 비교를 해보면 과거 50대 중후반 분들의 체력이 지금의 70대 연령층과 비슷한 수준일 거예요.

    그런 걸 봤을 때 저는 너무 감사할 수밖에 없죠. 이 나이에 은퇴를 하고도 다시 가수 활동을 할 수 있다는 자체가요. 내가 어떤 목표를 갖고 분명한 목적 의식을 갖고 일을 하는 자체가 나름의 건강 비결이 아닐까 싶어요. 정신이 건강해지니까 자연히 육체적인 건강도 따라오는 것 같더라고요.  

    - 평소에 운동은 좀 하십니까?

    ▲심한 운동은 못하죠. 제가 70년대 중부반에 폐결핵을 굉장히 심하게 앓았던 적이 있어요. 물론 결핵은 오래 전에 다 고쳤지만, 폐라는 건 한 번 손상이 되면 기능적으로 다시 복구가 안되거든요. 이렇게 폐가 손상된 상태에서 나이를 먹다보니 폐나 기관지 등의 기능이 약해질 수밖에 없죠. 그래서 격한 운동은 지금도 못하고요. 가벼운 운동, 이를테면 산보나 맨손 체조를 주로 하고 있어요.

    - 사실 목소리 관리를 어떻게 하고 계신지가 제일 궁금하거든요. 아무리 체력이 좋아도 목소리가 나오질 않으면 꽝이잖아요.

    ▲그건 타고난 것 같아요. 심지어 지금 목소리가 예전보다 더 힘이 있고, 예전에 불렀던 노래보다 지금 부르고 있는 노래들이 훨씬 더 듣기 좋다는 얘기들을 많이 듣고 있어요. 이런 말을 들으면 그 이상 더 행복할 수가 없어요. '나는 행복합니다'라는 노래가 절로 나오죠.

    - 이쯤되서 과거 얘기로 좀 돌아가볼까 합니다. 예전 윤항기씨의 기록이나 기사들을 찾아보면 인생역정이 참 험난함에도 불구하고 다 극복하시고 성공을 이루셨다는 점에서 많은 감동을 주고 있는데요. 그 어렵고 힘든 시대에 가수가 됐다는 것도 그렇고, 가수에서 목사가 되는 일은 더더욱 어려운 일이었다고 생각되는데요. 윤항기씨가 그런 길을 걷게 된 계기나 이유 같은 걸 여쭤보고 싶습니다.

    ▲가수가 될 수 있었던 것은 타고난 DNA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윤부길 선생님이 제 아버지신데요. 우리나라에 새로운 대중예술에 대한 기틀을 마련하고 정착시킨 일종의 선구자세요. 어머니(고 성경자)께서는 무용가 최승희씨의 제자로 잘 알려진 분인데, 연기자이면서 가수이고 또 무용가로 다재다능한 분이셨죠. 그런 점을 저희 남매가 잘 물려받은 거죠. 조금 비극적인 스토리는요. 천재는 단명한다고 하잖아요. 부모님께서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서른 살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마흔 둘에 돌아가셨어요. 어머니는 휴전되고 난 그 이듬해 54년에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57년에 돌아가시고…. 저희 남매가 한창 부모님의 사랑과 손길을 받아야 될 나이에 부모님을 모두 여의게 된 거예요. 자연스럽게 저희 남매는 생계 전선에 일찍 뛰어들었는데요.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한 덕분에 동생과 제가 미8군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그게 벌써 내년이면 60주년이 되는 겁니다.

    - 그때 '키보이스' 멤버로 데뷔하신 건가요?

    ▲아니죠. 59년도에 미8군에서 솔로로 데뷔했고요. '키보이스'는 63년에 제가 제대를 하고나서 바로 결성했어요. 제대하기 전부터 가끔 휴가나 외출을 나가면 미8군에서 음악을 하던 친구들을 종종 만났는데요. 음악감상실에 가서 우리나라에 없는 새로운 음악을 해보자는 얘기들을 많이 하면서 꿈을 키워갔죠. 그래서 제대하자마자 '키보이스'를 결성하게 됐어요. 그 이후 60년대 후반부터 70년대 초중반까지 우리나라에 그룹사운드 붐이 일어났죠.

    - 그룹사운드의 기원을 따져보면 '키보이스'가 우리나라 최초의 그룹 아닌가요?

    ▲최초의 그룹이죠. 데뷔년도는 음반이 언제 출시됐는지를 봐야 되는데요. 64년 6월에 '키보이스'의 첫 앨범, LP가 나왔는데요. '정든배'라는 노래가 타이틀곡이었어요. 그해 10월에 신중현씨가 만든 '에드 포(Add 4)'라는 그룹의 음반이 나 왔어요. 같은해 우리나라 양대 그룹의 앨범이 나온 거죠. 당시 두 그룹이 엄청난 라이벌이었어요. 대학가에서도 그렇고 극장가나 방송에서도 그렇고. 아무튼 두 그룹의 라이벌 관계는 '연고전' 저리가라였어요.

    - 당시 인기가 어느 정도였나요?

    ▲대단했었죠. 그때 당시엔 그룹을 직접 볼 수 있는 기회나 공간이 많지 않았어요. 처음엔 당연히 관객이나 팬들이 극소수였죠. 우리는 방송으로 음악을 시작한 게 아니라 라이브로 시작한 그룹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어요. 대학가 축제가 열리면 '키보이스'나 '에드 포'가 거의 단골로 제일 많이 출연했을 거예요. 또 저희는 낮에 '쎄시봉'이나 '아카데미 음악감상' 등에서 라이브 공연을 많이 했는데요. 여기에 오는 관객들 대부분이 여중고생들이었거든요.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저희 팬 중에 70~80%가 여학생이나 대학생들이었어요.

    지금으로 치면 아이돌 가수죠. 저희들이 다 20대 초반이었거든요. 일반 어들들이 보기에는 저희가 머리도 길고, 고레고레 소리나 지르고 하니까, 아마 미친 놈들처럼 보였을 거예요. 그래도 당시 젊은이들은 저희를 정말 좋아했어요. 아쉬웠던 건 초반엔 그런 문화가 일부 지역에만 국한돼 있었어요. 서울, 대구, 부산 등 대도시 몇군데에서만 그런 열풍이 불었고, 나머지 지역에선 저희 그룹의 존재조차 모르는 분들이 태반이었을 거예요.

    60년대 후반 라디오란 매체가 대중화 되면서 문화가 바뀌기 시작했죠. 지역 방송국이 생기고, MBC나 KBS 같은 지상파 방송국이 생기면서 지방 도시나 시골 구석구석까지 저희들의 존재가 알려졌어요.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건 '해변으로 가요'라는 노래였습니다.

    - '해변으로 가요'가 키보이스의 노래였다고요?

    ▲그렇죠. 이 노래가 나오면서부터 본격적으로 그룹사운드 시대가 열렸다고 봐야죠. 신중현씨의 '에드 포'는 특이하게도 객원 가수 시스템을 도입했는데요. '펄씨스터즈(배인숙·배인순)'나 박인수씨 같은 걸출한 보컬들과 함께 콜라보레이션 활동을 많이 했어요. 그때 '커피 한 잔'이나 '미인'같은 노래들이 큰 인기를 끌었죠. 나중에 저는 '윤항기와 키브라더스'라는 그룹을 다시 만들었는데요. 그전까지만해도 '윤항기'란 이름보다는 '키보이스'라는 이름으로만 활동하다가 나도 뭔가 내 이름을 세상에 알려야겠다는 생각에….

    - 혹시 멤버들 간에 불화가 생긴 건 아니었나요?

    ▲불화는 없었어요. 아무래도 그룹 활동을 하면 경제적인 문제에 부딪힐 수밖에 없는데요. 그룹이라고 해서 사람 숫자대로 출연료를 주는 게 아니거든요. 젊을 때엔 서로 의지하면서 참고 잘 지냈지만, 차츰 나이를 먹고 장가들을 가다보니 그 문제가 걸리는 거예요. 그래서 저도 60년대 후반에 탈퇴를 하고 새 그룹을 결성하게 된 것이고요. 70년대 초엔 제 이름으로 솔로 음반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윤항기'란 이름으로 가수 활동을 하게 됐어요.

    그렇게 승승장구를 하다가 70년대 후반에 갑자기 폐결핵으로 쓰러졌어요. 저는 항상 피곤하니까 과로해서 그런 줄만 알았는데요. 병원에 가보니 제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알게 됐어요. 그래서 거의 1년 동안 아무런 활동도 못했어요.  

    - 그때가 전성기셨죠?

    ▲최전성기였죠. 78년도니까. 투병 생활을 하면서도 제가 폐결핵에 걸렸다는 사실을 외부에 알릴 수가 없었어요. 애들이 옮을까봐 같이 있지도 못했고. 누가 병문안도 올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죠. 이 사실이 알려지면 신문이고 방송이고 온통 대서특필 될 것 아니겠습니까? 그래서 꼭꼭 숨겨가면서 치료를 받았어요. 아내와 둘이서 설악산으로 시골로 다니면서, 폐병에 좋다는 약이란 약은 다 먹었던 것 같아요. 개소주나 복어탕, 뱀탕 같은 것들을요.

    - 교회에 나가시게 된 것도 이 무렵부터죠?

    ▲그때 제 아내와 동생은 아주 열심히 신앙 생활을 할 때였어요. 그래서 저에게도 '믿음을 한 번 가져보라'고 계속 권유를 했어요.

    - 원래 윤항기씨는 "내가 교회를 다니면 개항기다"라고 말할 정도로 크리스천을 극도로 싫어하셨던 분이었잖아요?

    ▲그랬죠. 제 아내와 동생이 저 때문에 구박을 참 많이 받았어요. 그런데 제가 정신적으로 너무 피폐해지고 힘들어지니까 '살아야겠다'는 절박한 심정이 들더라고요. 그래서 지푸라기라도 잡아보자는 심정으로 하나님을 믿게 됐어요. 그때 너무 절실하다보니 "만일 하나님의 은혜로 치료를 받고 회복이 되면 정말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되겠습니다"란 서원 기도를 하게 됐어요.

    사실은 제가 폐결핵 말기였거든요. 병원에서는 6개월이나 1년 이상 생존이 불가능하다고 했어요. 암으로 치게 되면 말기 암환자였죠. 생존 가능성이 거의 없는 상태였어요. 병원에서도 손을 놨어요. 약을 먹어서 고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수술을 하려고 해도 폐를 잘라내거나 폐이식을 할 수도 없는 그런 상태였어요.

    그런데 정말 기적적으로 완치가 됐어요. 몸이 회복되고 처음으로 섰던 무대가 바로 79년 6월에 열린 '서울국제가요제'였어요. 그때 '여러분'이라는 노래로 대상을 타게 됐죠.  

    - 저는 '여러분'이라는 노래가 동생(윤복희) 분을 위해 쓰셨다고 알고 있었는데요. 지금 말씀을 들어보니 윤항기씨가 병마를 이겨내면서 직접 몸으로 겪었던 '감사함'이나 '감격'들을 담아낸 노래가 아닌가 싶은데요. 이 노래는 어떻게 쓰시게 된 겁니까?

    ▲제 동생도 79년 1월경 가정적으로 아주 안좋은, 힘들었던 시기가 있었어요. 그래서 서로 의지하고 위로하면서 기도해주고 할 때거든요. 어느날 기도를 하는데 하나님께서 레마로 성경 구절을 들려주셨어요. 그게 이사야 41장 10절 말씀인데요. "두려워말라 내가 너와 함께 함이니라"라고 시작하는 말씀이었죠. 그 말씀을 받고 깊이 묵상하면서 그 곡을 쓰게 된 거죠. 종교적인 말로 얘기하자면 제가 만든 곡이 아니라, 성령께서 나로 하여금 그 곡을 쓰도록 만드신 거예요.

    그 곡을 만들었을 때 때마침 '서울국제가요제' 관계자로부터 전화가 왔어요. 오는 6월에 열리는 가요제에 우리 남매가 대한민국 대표로 와줬으면 좋겠다는 특별 초청을 받게 된 겁니다. 가요제에 나가기 위해 만든 노래가 아니라 동생을 위해 만든 노래인데, 마치 거기에 나가기 위해 만든 노래처럼 딱 준비가 됐던 거예요. 아무튼 그때부터 제 2의 윤항기의 삶이 시작된 겁니다.

    - 그러다가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셨죠?

    ▲투병 생활을 할 때 '서원 기도'를 올렸던 게 계속 마음에 걸렸어요. 그걸 차일피일 뒤로 미루면서 가수 활동을 이어갔죠. 그래도 마음 한 구석엔, '내가 하나님께 진 빚이 있는데…' 이런 생각을 계속 품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86아시안게임' 때까지만 활동을 하고 가수 생활을 접었어요. 86년 가을 학기에 미국으로 건너가 교회음악을 공부하게 된 거죠.

    사실 처음부터 목사가 되려고 교회음악을 공부한 건 아니에요. 공부를 하다보니 거기에 깊이 빠져들게 된 거죠. 그때가 신앙적으로 굉장히 뜨거울 때이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하나님께 내가 갖고 있는 것들을 다 드리자고 결단을 하고 신학 공부를 시작했어요. 거기에서 음악목사 안수를 받고 한국으로 들어와 90년 3월 국내 최초로 '음악신학교'를 세우게 됐어요. 그게 '성음음악신학원'입니다. 그렇게 음악목사나 교회 사역도 하고, 한국 교회 연합기관에서 봉사를 하다보니 30년이란 세월이 금방 지나가더라고요. 그리고 지난 2014년에 30년간의 목회 활동을 마무리 짓고 은퇴를 한 거죠.

    - 지금 총장으로 계신 '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와는 언제부터 인연을 맺으신 건가요?

    ▲이 곳은 제가 설립한 학교예요. '성음음악신학원'이 '한국예술사관실용전문학교'로 이름이 바뀐 것이죠. 중간에 한 번 '예음'으로 변경됐다가 다시 지금의 학교로 명칭이 바뀌었어요.

    - 내년에 데뷔 60주년 행사를 여실 때 기념 음반도 발표하시겠죠? 그렇다면 이번엔 새로운 장르에 도전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렇잖아도 얼마 전 후배 가수 최백호가 진행하는 라디오 프로그램에 초대를 받아서 같이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그 후배가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자신도 나이가 훨씬 어린 작곡가로부터 곡을 받아 음반을 취입한 적이 있다고요. 처음엔 젊은 친구가 쓴 곡을 잘 소화할 수 있을까 걱정이 앞섰지만, 막상 주변에서 너무 좋다는 반응들을 보내와 새로운 힘을 얻게 됐다는 얘기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내년에 제 아들(윤준호)한테 곡을 좀 받아볼까해요.

    - 아드님도 가수이시죠?

    ▲그렇죠. CCM 가수이자 작곡가인데요. 아무래도 나이가 젊다보니 제가 새로운 감성을 좀 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후배 가수들과 콜라보를 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 그나저나 윤항기씨께서 대한민국 '그룹사운드 기념관' 건립을 준비 중이시라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룹사운드'라는 뿌리가 있었기 때문에 오늘날의 '케이팝(K-POP)'이 존재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키보이스'나 '에드 포' 같은 그룹사운드가 나온지도 벌써 56년이란 세월이 흘렀어요. 이수만씨나 양현석씨 박진영씨 같은 분들도 다 뿌리는 그룹이거든요. 가왕으로 불리는 조용필씨도 그룹에서 출발했고요. 다 그렇게 연결이 돼요.

    아무리 세상이 바뀌어도 바뀌지 않아야 할 것들이 있는데요. 저는 그게 '근본', '뿌리'라고 봅니다. 키보이스 초창기 때 저희와 함께 했던 김홍탁씨라는 분이 있는데요. 나중에 그룹 '히식스'를 만드신 분이죠. 저보다는 그 분께서 아주 열심히 앞장서서 기념관 건립을 추진하고 계세요.

    '윤항기'라는 사람을 알리고자 하는 게 아니에요. '케이팝'이라는 게 하루 아침에 생긴 게 아니고, 선배들이 이렇게 뿌리를 내려 열매를 맺게 된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싶어요. 실제로 반세기 전에 저희들이 이루지 못했던 '세계화'란 꿈을 지금 후배들은 이뤄내고 있거든요. 그러한 웅대한 꿈이 세대를 거쳐서 결실을 맺고 있는 겁니다.
  • ▲ 1979 서울 국제가요제 앨범 자켓. ⓒ 한국대중가요앨범 / 한국대중가요연구소
    취재 = 조광형 기자
    사진 = 정상윤 기자
    영상 = 이기륭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