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명게시판에 노조 비판글 올린 직원, “노조 간부가 전화 걸어 삭제 요청했다”
  • ▲ 지난 20일 한국전력 직원 A씨(닉네임 강철의파이터)가 노조 익명게시판 '전력 아고라'에 올린 글. ⓒ 제보자
    ▲ 지난 20일 한국전력 직원 A씨(닉네임 강철의파이터)가 노조 익명게시판 '전력 아고라'에 올린 글. ⓒ 제보자
    직원들을 대상으로 한 공공상생연대기금 '기부 강요'로 논란이 됐던 한국전력이 이번엔 직원 개인정보 유출 문제로 내홍을 앓고 있다. ☞[단독] 한국전력 '기부 강요' 논란

    지난 20일 한국전력노조(이하 전력노조·위원장 최철호)가 운영하는 익명게시판 '전력 아고라'에는 '홍보국장님의 소통방식에 대해 해명을 요청한다'는 글이 올라왔다. 자신의 개인정보 노출에 항의하는 글이었다. 사정은 이렇다. 

    직원 A씨(닉네임 강철의파이터)는 '기부 강요' 의혹과 관련해 익명 게시판인 '전력 아고라'에 노조의 행태를 비판하는 글을 올렸다. 그런데 글을 올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전력노조의 홍보국장 B씨가 A씨에게 글의 삭제를 요청하는 전화를 수 차례 걸어왔다. '익명 게시판'인데도 불구하고, 글을 올린 직원의 신원이 고스란히 노출된 것이다. 

    A씨는 "홍보국장 개인의 일탈 여부와 상관없이 조합원 전체를 기만한 현 집행부의 잘못이다. 노조위원장은 게시판 운영의 진실에 공식 입장을 밝히길 바란다"며 해당 글을 통해 B 국장과의 통화내역을 공개했다. 이를 지켜본 한전 직원들은 "익명 게시판에 올린 직원이 누구인지 어떤 경로를 통해 알아낸 것이냐"며 반발하고 있다. 
  • ▲ A씨에게 걸려온 B 국장의 전화. ⓒ제보자
    ▲ A씨에게 걸려온 B 국장의 전화. ⓒ제보자

    타인에게 알리지 않으면 익명성 훼손이 아니다?

    익명성이 보장된 게시판에 노조를 반대하는 비판 글을 올린 작성자에게, 노조 간부가 전화를 걸어 해당 글의 삭제를 요청했다는 A씨의 폭로 글에 직원들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노조 간부가 전화를 걸었다는 것은, 노조가 게시판 이용자들의 신원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는 위치에 있음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직원들은 "이 기회에 실명(게시판)으로 전환하라", "아고라에 (노조에 대한) 부정적 댓글을 단 게 후회스럽고 소름끼친다", "노조가 조합원을 우롱하고 있다"며 진상을 밝힐 것을 요구했다.

    논란이 거세지자 전력노조 홍보국장 B씨는 게시판에 "'강철의파이터'가 올린 글을 보고 전화드렸다"는 글을 남겨 A씨에게 전화를 건 사실을 시인했다. 한전 직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익명성'에 대한 B 국장의 입장이다. 

    B 국장은 올린 글에 "익명게시판의 익명성을 훼손한다는 것은, 그가 누구인지 타인에게 알리는 것", "최소한 저는 그가 누구라고 말한 적이 없기 때문에 안심해도 된다"고 썼다. 노조를 비판한 글을 올린 직원의 신원을 본인만 알고 있을 뿐, 타인에게 알린 적이 없기 때문에 익명성 훼손이 아니라는 식의 태도였다.  

    직원들은 "노조 홍보국장이 A씨의 연락처를 어떻게 알아냈는지 모르지만, 향후 조합원들이 노조를 어떻게 믿고 따르겠느냐"고 비판했다. 심지어 '블라인드' 한전 게시판에선 '사찰(査察)'이라는 단어까지 오르내리고 있다. 

    본지는 B 국장의 입장을 듣기 위해 내선번호과 개인번호로 연락을 시도했다. 수 차례 시도 끝에 연락이 닿은 B 국장은 "다음에 말씀드리겠다"며 즉답을 피했다. 이후 그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26일 전력노조는 공식 사과문을 게시했다. 위어량 전력노조 사무처장은 "최근 빚어진 익명성 훼손 행위에 대해 책임을 통감하고 정중히 사과드린다"며 "게시자를 찾아내 통화를 시도한 행위는 절대 용납될 수 없다. 어떠한 변명도 하지 않겠다"고 했으나 B 국장이 어떻게 번호를 알아 냈는지는 밝히지 않았다.

    대신 전력노조는 향후 B 국장을 비롯해 노조 상임위 누구도 관리자 권한을 갖지 못하게 조치하고, 게시판 관리자인 B 국장의 보직이동과 함께 익명성 보장 방안을 강구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 ▲ 지난 26일 전력 아고라에 게재된 전력노조 공식 사과문. ⓒ제보자
    ▲ 지난 26일 전력 아고라에 게재된 전력노조 공식 사과문. ⓒ제보자

    "강압 분위기 속에서 동의는 했지만..." 직원들 '기부 동의 취소' 이어질듯

    한편 노조는 22일, 공공상생연대기금 기부에 동의한 직원들의 6월치 성과연봉에서 약정금액을 공제했다. 이는 '기부 약정 동의서'에 명시된, "18년 6월부터 6회에 걸쳐 분할 공제한다"는 내용에 따른 것이다. 한전 급여일은 매월 22일이고, 성과급은 1년에 4차례(3,6,9,12월) 지급된다.

    그러나 '동의' 절차가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직원들의 반발은 계속되고 있다. 한 직원은 "사실상 강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동의한 것이라, 누군 기부하고 누군 기부하지 않는다는 것이 직원들 사이에서는 처음부터 말이 안 된다는 분위기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그는 "7월부터 인사 이동이 시작된다"며 "혹시 모를 불이익 때에 지금은 다들 입을 다물고 있지만, 인사이동이 끝나면 많은 직원들이 취소를 요청하지 않겠느냐"고 귀띔했다.

    '기부 동의'가 진행된 시점이 직원들에게 민감한 '인사 이동' 직전이었기 때문에, 현실적으로 평직원들이 상사들의 기부 동의 요청을 거부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기부 동의 취소'와 관련해 한전 관계자는 "각 사업소별 급여 담당자에게 구두 혹은 문서로 요청하면 기부 취소가 가능하다"면서 "다만 이미 공제된 6월 기부금은 환급이 어렵고, 취소를 신청하면 9월부터는 공제되지 않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이달 5일 한국전력은 전 직원을 상대로, '사회적 연대 동참을 위해 재단법인 공공상생연대기금에 성과연봉 36%를 기부한다'는 내용의 동의서를 배포했다. 이 과정에서 한전 직원들은 "노조와 회사 노무처가 손을 잡고 직원에게 기부를 강요하고 있다"는 의혹과 불만을 잇따라 제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