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지키는 홀대받는 영웅들… '파도의 춤-해경의 노래'

[인터뷰] '언론계의 파이터' 이동욱 기자… "172명이나 구한 사람을 감옥에 보낸 재판부와 정부, 국민은 역사에 남을 것”

이상흔 기자 프로필 보기 | 최종편집 2018.06.11 17:56:58
▲ 인터뷰 중인 이동욱 뉴데일리 논설고문. ⓒ 정상윤 기자

이동욱 기자(59·뉴데일리 객원 논설고문)는 언론계의 파이터다.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고야 마는 기자다. 그는 ‘정의(正義) 위에 세운 진실은 거짓’이라는 신념을 가지고 있다. 결론을 먼저 내려놓은 뒤, 거기에 사실을 구겨 넣으려는 일부 지식인들에 대한 질타다. 그는 그래서 ‘진실 위에 정의를 세워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그의 신념과 근성은 수많은 기사와 저서로 남아 있다. 그는 2015년 <울진-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백년동안)을 펴냈다. 1968년에 발생한 울진·삼척지구 무장공비 침투사건을 다큐멘터리로 구성한 책이다.

그가 <월간조선> 기자로 일하던 시절 좌파 성향 언론운동 단체들이 '이승복 사건 조작설'을 제기했다. 무장공비가 어린 학생의 입을 찢어 무참하게 살해한 사건이 일간지에 상세히 보도됨으로써 국민의 반공의식이 뿌리내리는 계기가 된 사건이었다. 이 사건은 평화, 통일을 앞세워 연방제 분위기를 만들어야 하는 종북주의자들에게는 눈엣가시였다. 

좌파들은 이 사건 보도가 오보요, 거짓이라고 조작했다. 당시 미디어오늘, 월간 말, MBC, 심지어 중앙 매체들조차 이같은 조작설에 동조하고 있었다. 이 사건의 진실을 단독 추적해 1998년 10월호 <월간조선>에 실은 사람이 이동욱 기자다. 

기사의 반향은 컸다. 이로 인해 좌파 단체들은 이승복의 죽음 자체를 폄하하려는 시도에 감히 성공하지 못했다. 이후에도 이동욱 기자는 20년간 이승복의 형 이학관씨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 사건의 진실을 알리기 위해 노력했다. 

▲ 공기통을 매고 세월호 잠수 취재를 준비중인 이동욱 기자. ⓒ 이동욱 제공


◆ 직접 공기통 매고 세월호 잠수 취재

진실을 추구하는 이런 그의 근성은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침몰 사건 때 여지없이 발휘됐다.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언론들이 ‘괴담’과 ‘헛소문’을 가리지 않고 기사를 쏟아내고 있을 때 그는 직접 공기통을 매고 26m 바다 아래 가라앉은 세월호 속으로 들어갔다. 

세월호 침몰 당시 그는 이미 언론계를 오랫동안 떠나있었다. 프리랜서 컨설턴트로 박정희 기념재단의 컨설팅을 맡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호 보도가 ‘엉망진창’으로 빠져들자 5월 중순부터 뒤늦게 취재에 나섰다. 2개월 정도면 끝날 줄 알고 시작한 취재는 끝이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재정적으로도 파산상태에 몰렸다(이 상처는 지금도 계속되는 중이다). 하지만 멈추지 않았다. 

이후 그는 8개월간 현장을 취재하고 방대한 자료를 분석해 2015년 4월 <연속변침>(조갑제닷컴)이라는 책을 펴냈다. 730페이지에 이르는 분량의 이 책은 세월호의 전복과 침몰, 구조의 전 과정을 담은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다.    

▲ <파도의 춤-해경의 노래>(자유전선)

이 책은 조직이 해체되어 사기가 극도로 침체되어 있던 해양경찰에 천군만마와 같은 힘이 되어 주었다. 세월호 침몰과 관련한 객관적인 자료를 통해 우리가 얼마나 이 사건과 해경에 대해 무지하고, 이들을 홀대해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기 때문이다. 

<연속변침>이 출간된 지 4년이 흐른 시점에서 이동욱 기자는 <파도의 춤-해경의 노래>(자유전선)라는 또 한 권의 해경 관련 책을 내놓았다. 이 책은 72명의 젊은 해경들이 쓴 수기(手記)를 모은 것이다. 그가 해경에게 가진 애착이 어느 정도인지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종로구 부암동 어느 카페에서 이동욱 기자를 만나 이 책과 세월호, 해경에 얽힌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제복입은 모든 사람들’(MIU)에 대한 애정

-<연속변침>에 이어 이번에 다시 해경 관련 책인 <파도의 춤>을 펴냈다. 어떻게 이번 책을 기획하게 되었나. 

“<연속변침> 출간 후 해경의 각종 강연 행사에 강사로 많이 초청되었다. 강연을 다니는 과정에서 어느 날 우연히 해경이 내부 교육용으로 모아놓은 해경들의 수기 원고를 발견했다. 원고를 처음 넘겼을 때 마치 초등학생이 쓴 꾸밈없고 투박한 일기를 보는 것 같은 감동을 느꼈다. 하나하나 읽으면서 가슴 먹먹한 ‘진짜 해경’들의 이야기에 눈시울이 붉어졌다. 이런 감동을 국민들과 나누고 싶어 책으로 펴냈다.”

<파도의 춤> ‘편저자의 글’에서 이동욱 기자는 원고를 편집하면서 느낀 소감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이 원고를 읽어가면서 비로소 해경의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땀과 눈물로 범벅된, 그러나 맑은 슬픔의 정수(精髓)가 내 가슴을 관통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끝은 언제나 삶을 긍정하는 미소로 마감되고 있었다. 천상 이들은 마음 넓은 바닷사람들인 것이다.>

-해경에게 애착을 느끼는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지.  

“해경 이전에 ‘제복입은 모든 사람들(MIU-Men In Uniform)’에 대한 애착이라고 해야 맞을 것 같다. 그런데 제복 중에서 해경이 유독 조직 해체까지 당하는 억울한 집단이라 이들에게 더 귀를 기울였다고 해야 할 것 같다. ‘숱한 오해와 능욕 속에서도 궂은 비 맞으며 묵묵히 행진하듯 뚜벅뚜벅 걸어가는 바다의 전사들.’ 이것이 내가 4년 동안 만난 해경을 한 문장으로 묘사한 것이다. 직접 만나 본 해경들은 자신들을 변호하는 데 능숙하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심지어 거짓말을 해도 어리숙하다. 그냥 묵묵히 자기 길만 걸어간다. 세월호 사건 때 그렇게 ‘동네북’이 되어 두들겨 맞아도 어느 누가 지켜주지 않았고 강한 항변조차 하지 못했다.” 

▲ 해양경찰이 불법조업 중인 중국 어선을 단속하고 있다. ⓒ뉴시스

◆ 해경이 ‘동네북’이 된 이유

-해경은 8800명을 가진 큰 조직이다. 이런 조직이 왜 그렇게 되었다고 보는가. 

“해경은 올해 창설 64년째를 맞는다. 그동안 47명의 청장을 배출했다. 이 중에 해경에 입직해 청장에 오른 이는 단 두 명뿐이다. 외부에서 온 청장 대다수는 선상 근무 경험이 전무하다. 바다를 전혀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1~2년 근무하다 떠나기를 반복했다. 해경을 좀 알만하면 떠난다. 바다를 모르는 사람들에 의해 해경의 모든 일이 결정되기 때문에 힘이 없고, 일이 터지기만 하면 난타를 당하는 것이다. 세월호 이후에는 더 심해져서 아예 지휘부가 정권과 언론의 눈치만 보는 듯하다.”

세월호 침몰 사고로 해경은 조직이 해체되는 수모를 당했다. 1953년 12월 내무부 치안국 소속 해양경찰대로 출범한 해경은 해무청, 경찰청, 해수부, 국토부, 국민안전처 등 무려 9번이나 소속처가 바뀌었다. 

이동욱 기자는 “정권과 정책이 바뀔 때마다 인사권자가 달라지니 스타급인 경무관 이상은 어느 줄에 서야 할지 고민이 많을 것”이라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월호 취재 중에 전반적으로 해경의 분위기가 너무 침울하다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하도 여론몰이를 당해서 그런 줄 알았다. 알고 보니 그런 침울한 분위기는 그 전부터 있었다. 해경은 창설 60년이 넘도록 사기진작을 위한 자신들의 노래 한 곡이 없었다. 제복을 입은 집단이 자기들 마음을 위안하고, 사기를 고무하는 노래가 한 곡도 없다는 것을 보고, 그동안 해경이 얼마나 관심 밖의 존재였는지 새삼 느끼게 되었다.”

그는 “중국어선 단속 중에 동료가 세상을 떠나도 그저 소리 없이 울기만 할 뿐이었다”며 “아마 그래서 세월호의 책임을 독박 쓰듯 뒤집어쓰고 ‘조직 해체’라는 수모를 겪으면서도 속으로만 울고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 일본 어선 막기 위해 이승만이 창설

세월호 사고 약 한 달 후인 2014년 5월 19일, 박근혜 대통령은 ‘세월호 관련 대(對)국민담화를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박 대통령은 ’해경 해체‘를 전격적으로 선언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박 대통령의 해경 해체 담화를 보면서 당사자인 해경 못지않게 충격을 받은 이가 바로 이동욱 기자다. 그는 자신이 쓴 <연속변침>에서 그때 “세 번의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대통령이 담화를 발표하던 그 당시까지 세월호의 침몰 원인이 정확하게 밝혀진 바 없고, 해경의 구조 실패 진위도 정식으로 가려진 바 없었다. 사고 원인과 구조 과정을 ‘진단’도 하기 전에 ‘해경 해체’라는 ‘처방’부터 내린 것이다. 이로 인해 60년 된 국가의 필수적 안보 조직 하나가 역사 속으로 침몰하게 됐다. 이럴 수는 없는 거 아닌가.”

조선시대 500년 동안 우리는 해금(海禁)정책과 공도(空島)정책으로 바다를 닫고 살았다. 일제때 우리 수산자원은 일본어부들의 소유물이나 마찬가지였다. 6·25 전쟁의 혼란을 틈타 일본 어선들의 한국 해안 침범이 빈번해지자, 이승만 대통령은 1952년 1월 18일 평화선(이승만 라인)을 선포했다. 조선왕조 이후 우리의 수자원과 독도를 보호하기 위한 최초의 조처였다. 이승만은 해경을 창설해 평화선을 넘어오는 일본 어선을 나포하는 등 외국선박의 불법어로행위를 강력하게 단속했다. 

해경은 330척의 함정으로 육지 면적의 4배 반(半)에 이르는 광대한 해역을 커버하고 있다. 불법조업 어선 단속은 물론, 해안경비, 수색구조, 안전관리, 수사, 정보, 보안, 외사, 오염방제 등 다양한 업무를 수행해왔다. 거기에 더해 동해와 서해의 NLL(북방한계선)과 독도 방위라는 영토수호 임무까지 맡고 있다. 

이동욱 기자는 <파도의 춤-해경의 노래> 편저자의 글에서 해경에 대해 다음과 같이 썼다. 

<해양경찰의 중하층을 메우고 있는 ‘진짜 해경들’에게는 국민의 한 사람으로 미안해지는 것이다. 그 ‘진짜 해경들’은 임무를 받으면 ‘진짜’ 열심히 달려가고, 헤엄치고, 잠수해서 국민의 생명과 재산을 지켜내고 있는데, 육지의 배운 바 많은 분들에 의해 오늘도 건국 대통령처럼 온갖 수모와 홀대를 받고 있는 중이다.>

▲ 사고 해역에 가장 먼저 달려온 P123정이 세월호 조타실의 선원들을 구조하고 있다.ⓒ해경촬영사진


◆ 세월호 172명 구하고 감옥간 김경일 정장

이동욱 기자는 “해경은 세월호 침몰 책임을 ‘독박 쓰듯 뒤집어쓰고’ 조직이 해체되었다”고 표현했다. 해경의 ‘독박’은 수없이 많겠지만, 압권은 사고 현장에 제일 먼저 달려와 172명의 목숨을 구하고도 감옥에 간 P123정의 김경일 정장의 경우일 것이다. 이 기자는 김 정장을 직접 인터뷰한 적이 있다.

“그분은 세월호 사고 당시 선체 진입을 하지 않고, 대피 방송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징역 4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중에 1년이 감형되어 3년 만기를 채우고 얼마 전 출소했다. 많이 배운 분도 아니고, 자기 입장을 변호할 능력이 충분한 분도 아니다. 평생을 바다에서 헌신해온 분인데 많은 사람의 목숨을 구한 사람을 결과에 끼워 맞춰 이렇게 대접하니까 우리나라가 조만간 벌을 받지 않을까 걱정된다.”

-김경일 정장의 구조 당시 상황을 조금 자세하게 설명한다면.

“김 정장은 세월호 침몰 당시 우연히 자신의 수색구역에서 최남단으로 향하고 있었다. P123정의 수색구역 중 북쪽 지역으로 향했더라면 아무리 빨리 도착했어도 아무도 구조할 수 없는 상황이었을 것이다. 그날따라 김 경장은 ‘오늘은 남쪽으로 한번 가보자’고 명령했다. 수색구역 최남단이 맹골수도 바로 위인데 평소 그쪽에서 수색활동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김 정장은 오전 8시부터 배를 남쪽으로 몰았다. 그 시간에 세월호는 맹골수도로 진입했다. 그래서 두 배의 거리가 가까워질 수 있었던 것이다.”

그날 김 정장은 구조요청을 받은 지 35분 만에 현장에 도착해 현장을 지휘하며 172명을 구조했다. 선체 밖으로 자력으로 빠져나온 이 중에 이미 익사한 1명을 제외하고 172명 전원을 구조한 것이다. 이 기자의 설명이다.

“바다는 육지의 도로와 다르다. 육지 면적의 4.5배에 이르는 바다 영역에 해경의 배 300여 척을 무작위로 띄워놓았다고 가정할 때 배와 배 사이의 거리가 평균 한 시간 반 이상 걸린다. 그것도 최고 속도인 20노트(시속 약 37km)로 달렸을 때가 그렇다. 세월호 침몰 당시 주변에 인원을 구조할 수 있는 배가 없었다. 아무 배나 간다고 구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대형 배는 갑판과 수면 사이가 높다. 더구나 맹골수도는 물살이 센 곳이라 갑판에서 밧줄을 내려 20~30m 높이로 사람을 끌어올릴 수 있을지도 의문이다. 김 정장이 그 시간에 현장에 도착한 것은 기적이라고 봐야 한다.”

▲ 이동욱 뉴데일리 객원 논설고문 ⓒ 정상윤 기자

◆ "도저히 구조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지시가 내려와"

-선체진입을 하지 않았다고 비난하는데.

“P123은 구조함이 아닌 100t급 경비정이다. 12명이 승선하는 굉장히 작은 경비정이다. 앰뷸런스가 아닌 순찰차란 얘긴데, P123은 현장에 도착하자마자 세월호 선체를 한 바퀴 돌았다. 어디에 배를 대야 할지 판단하기 위해 먼저 선체를 돌아본 것이다. 그런데 구조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 시각 조타실이 있는 선수 쪽에 갑판과 함정이 맞닿는 지점이 생겼고 거기에 접안했다. 그래서 조타실부터 올라간 것이다.”

그때 이미 선체의 기울기가 52도에 이르렀다. 해경은 조타실로 밧줄을 던졌다고 한다. 계속해서 이 기자의 설명.

“그 밧줄을 안에 있는 선원들이 창틀에 묶자 해경이 그 줄을 타고 오르려고 하는데 조타실에서 사람들이 탈출을 시작했다. 모두 탈출할 때까지 기다린 후 해경 대원이 조타실로 올라가 보니 너무 기울어서 발 디딜 공간조차 없었다. 이때 배는 이미 70도가 넘게 기울어졌고, 바닥은 사실상 절벽으로 변했다.”

-그때 구조된 학생들조차 해경을 비난하는 목소리에 합류했다.

“어른들이 그렇게 만든 것이다. 어른들은 학생들이 자신들의 목숨을 구해준 생명의 은인에게 고맙다는 말을 못 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저주하도록 부추겼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참으로 비교육적이고, 해경에게 못 할 짓을 했다. 이 사건은 역사적 사건이기 때문에 앞으로 100년이 지나도, 후손들은 오늘을 살았던 한국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어떤 행동을 했는지 지켜보며 판단하게 될 것이다.”

-김 정장이 대피 방송을 하지 않았다는 부분은? 이것 때문에 실형을 받았는데.

“퇴선 방송을 하지 않고, 요원들에게 ‘선체 안으로 진입하라’는 명령을 내리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실형을 받았다. 취재를 했던 내가 변호를 하자면, 당시 함정에는 녹화기능이 있는 카메라가 없었다. 그래서 휴대폰으로 상황을 찍었는데, 도착해서 처음 5분가량은 찍지 못했다. 그래서 그사이 대피방송을 했는지 안 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김 정장 본인도 사람 구하느라 정신이 없어 당시 상황을 제대로 기억하지 못한다.”

이 기자는 “그 와중에 윗선에서는 도저히 구조에 집중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지시가 내려왔다”고 말했다.

“대피방송을 하려면 먼저 무선으로부터 해방되어야 하는데 그럴 상황도 아니었다. 했는지 안 했는지도 불분명하다. 동료 승조원들의 증언도 갈렸다. 몇몇 승조원들은 대피방송을 들었다고 했다. 문제는 검찰이 동료 승조원들을 분리 심문하면서 서로 반목하게 만들고 결국엔 모두 ‘못 들었다’로 증언을 통일시켰다. 한 개인이 이 싸움에서 절대 이길 수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인양 후 전남 목표신항에서 직립작업을 마친 세월호. ⓒ뉴시스

◆ "검찰은 왜 기울어진 갑판을 직접 올라가보지 않나?"

이 기자는 “법원에서 김 정장의 형기를 4년에서 3년으로 1년 줄여준 것은 위에서 정신없이 내려온 지시도 현장에서 구조에 집중하지 못하게 한 일말의 책임이 있다고 본 것”이라며 “그 정도로 당시 상황이 급박했다”고 말했다.

“게다가 계란장수들이 사용하는 75와트짜리 미니 스피커로 대피방송을 한들, 두께 3cm의 두꺼운 유리창 속으로 그 소리가 들릴까도 의문이다. 파도소리, 기관소리, 구조헬기 소리. 특히나 거의 1분 간격으로 세월호 내부에서는 ‘움직이지 말라’는 안내방송이 계속되고 있었다.

더 중요한 점은, 구조대원이 침몰 중인 선체로 진입하는 경우는 전 세계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검찰 조사를 받던 대원들을 만나 보니 이런 말을 하더라. 검찰 조사관들에게 침몰 중인 배에 들어가면 죽는다는 사실을 설명하니 조사관이 '그러게 당신들이 죽었어야 했는데 안 죽었으니까 이렇게 조사를 받는 거 아니냐'고. 결국 구조대원을 사지로 몰아넣지 못한 것이 김경일 정장의 죄가 되었다.”

-이후에 김 정장을 만나보았는지.

“출소 후 조용히 있고 싶어 한다. 언론에 대한 불신이 극심해 모든 언론 접촉을 피하고 있다. 평생 해경에 몸 바친 이 분은 정년 2년을 남겨두고 감옥에 가고 직장에서 쫓겨났다. 그의 부인은 생계를 위해 할인마트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등 세월호 사건 이후 온 가족이 고통을 겪었다. 김 정장은 남을 해치려 한 것도 아니고, 그야말로 최선을 다해서 타인의 목숨을 구한 사람이었다. 미국 같았으면 그런 사람은 영웅이 된다. 하지만 우리는 감옥으로 보냈다. 172명을 구한 사람을 감옥에 보낸 재판부와 그 정부, 그리고 그 시대의 국민들은 역사에 남을 것이다.”

이 기자는 “인양한 세월호를 바로 세우는 과정에서 해경이 구조할 당시 선체의 기울어진 각도를 충분히 재현할 수 있었다”며 “그렇다면 모든 게 해경 잘못이라고 주장해온 검찰이 직접 그 각도에서 철제 갑판을 기어올라 실제로 사람을 구조할 수 있는지 시도를 해보는 것이 정상 아니냐”고 반문했다. 

◆ 세월호 이후에도 조금도 변하지 않은 언론 보도 태도

-2017년 12월 4일 발생한 인천 앞바다 영흥도 부근 낚싯배 전복 사고 때도 해경이 구조가 늦었다며 여론의 몰매를 맞았다.

“10t급 낚싯배가 300t급 급유선과 충돌하면서 전복된 사고다. 나도 현장을 취재했다. 몰려든 기자들은 ‘왜 빨리 구하지 못했냐’며 해경 구조대를 다그쳤다. 육지에서 사고지점까지 직선거리로는 평택 구조대에서는 약 12km, 인천 구조대에서는 약 22.5km 된다. 이 정도 거리인데 왜 현장에 도착하는데 1시간 23분이나 걸렸냐며 해경을 난타한 것이다. 그야말로 육지식 사고의 소산이다.

우리나라 연안 지역은 대부분 직선으로 달릴 뱃길이 없다. 수많은 양식장의 그물들이 구조정의 진로를 가로막는다. 게다가 조류와 파도의 변수가 더해지고 안개나 주야간의 시야 차이도 한몫한다. 해경이 설명에 나섰지만, 해경의 말빨은 독을 품은 기자들을 설득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기자들은 해경 브리핑 자료를 토대로 자기들 마음대로 전체 그림을 그려 해경을 매도했다. 언론 보도 태도와 취재 행태가 세월호 때와 조금도 다르지 않았다. 언론은 세월호 때처럼 모든 것을 해경의 구조실패로 돌리고 있었다.”

이 기자는 영흥도 낚싯배 사고 당시 직접 목격한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당시 인천 해경서에서 열리는 브리핑에 몇 번 참석했다. 그런데 한 기자가 데스크와 통화하는 소리가 들렸다. ‘부장님, 말씀하신 해경에 대한 부정적인 보도가 어렵겠습니다. 와서 보니까 해경들이 그렇게 하지 않은 다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러자 저쪽에서 다그치는 소리가 새 나왔다. 기자는 어쩔 수 없이 ‘예, 예’하면서 풀죽은 모습으로 자리로 돌아왔다. 어떻게든 돌려쳐서 쓰라는 거였다. 아닌 게 아니라 그날 저녁 뉴스를 보니 오보 천국이었다.”

이 기자는 “나는 인천구조대와 평택구조대 사무실을 전부 들렸다. 사고 난지 5일이 지났지만 기자가 아무도 오지 않았다”고 말했다. 프리랜서인 이 기자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이 시대의 언론사 직함이 부끄러운 순간이었다”고 말했다.

▲ 이동욱 뉴데일리 객원 논설고문 ⓒ 정상윤 기자

◆ 안전에 소홀한 나라는 안보가 제대로 될 리 없다

-언론은 물론이고, 국민들도 해양사고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것 같다.

“재난이 발생했을 때 구조가 가능한 상황과 가능하지 않은 상황이 있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예컨대 비행기가 추락해서 인명사고가 나면 그 누구도 ‘골든타임’ 같은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구조가 불가능한 상황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육지에서는 구조 가능한 상황이 더 많겠지만, 바다에서는 굉장히 가변적이다. 이런 기본적인 상황을 이해하려 하지 않고 원한에 찬 보도를 쏟아낸다. 이런 보도는 사회 발전이 아니라, 결국 공동체를 파괴하는 데 일조한다.”

-세월호 사건 후 위정자들은 ‘안전한 나라를 만들겠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진짜 안전한 나라를 만들려면 재난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졌는지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자세로 조사를 한 후 대처를 해야 한다. 지금은 결과에 끼어 맞춘 조사와 안전 대책을 내놓고 있다. 예컨대 ‘해경이 구조실패해서 사람이 죽었으니 해경의 구조실력을 높이자’면서 수영이나 라이프가드 같은 훈련을 대폭 늘렸다. 해경의 수영 실력이 모자라서 구조를 못 하는 것이 아니었는데 말이다. 그저 바다에 무식한 언론과 임명권자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엉뚱한 쇼를 21세기의 공무원 집단이 하고 있는 것이다.”

-해경 자체의 문제점을 지적한다면.

“해경 스스로가 세월호 사건에 대한 해양재난 구조집단으로서의 백서를 내놓아야 한다. 문제는, 임명권자의 눈치를 보는 수뇌부들이다. 이들은 세월호의 진실에 눈을 감은 채 ‘아랫것들’만 족치는 식이다. 세월호 같은 사건이 재발될 경우를 대비해서 해경이 보다 더 구조를 잘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알아야 하지 않는가. 그러려면 해경 스스로가 그 사건을 제대로 분석해서 무엇이 부족한지를 알아야 하는데, 어느 누구도 그런 노력은 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한동안 그럴 것 같다.” 

-우리 국민들의 재난에 대한 인식이 외국과는 좀 다른 듯하다.

“세월호 사고 1년 전에 일어난 미국 보스턴 마라톤 테러 사건에서 264명이 다치고, 3명이 숨졌다. 그 상황에서 미국 언론은 테러 대책기관의 책임자를 처벌하라고 요구하지 않았다. 대신 다음 날 ‘보스턴은 도시가 아닙니다. 보스턴은 가족입니다’라는 현수막을 걸어놓고, 복구에 전력을 기울였다. 선진국은 재난을 극복하는 과정에서 공동체가 이전보다 더욱 탄탄해지고, 강해지는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경우 아직도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다. 

“재난은 복구로 마무리된다. 그러나 우리는 복구에 소홀한, 아니 무지한 나라가 아닌가 생각한다. 제주 4·3사태, 5·18 광주사태 등을 포함한 세월호 재난사건에서 우리 사회는 복구를 등한시한 채 온갖 유언비어로 방송과 지면을 채우면서 2차, 3차 재난으로 번지게 했다. 세월호 사건을 시작으로 결국 정권이 무너졌다. 우리는 조선조의 당쟁을 답습하는 것 같다. 재난이 발생하면 복구를 우선시하는 게 아니라 책임자 처벌을 우선시한다. 실패 없는 책임자가 있을 수 없는데도 무조건 책임자 처벌을 우선시한다. 유능한 지휘관은 실패의 경험을 쌓은 지휘관이란 사실을 모르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안전이 소홀한 나라에서 안보인들 제대로 될 리 없지 않은가.”

이동욱 기자는 “흑연이 다이아몬드가 되려면 엄청난 열과 압력을 겪어야 한다”며 “해경이 지금은 비록 초라한 대접을 받고 있을지라도 시련을 겪고 나면 더욱 강해진 조직으로 거듭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승만 박사에 의해 해경조직이 만들어졌고, 이렇게 훌륭한 조직이 가동되고 움직이고 있다. 제복 입은 집단은 한 나라를 떠받치는 근간이다. 그들은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대한민국을 지킬 세력으로 존재할 것이다. 이들이 지켜온 용기, 헌신, 정직, 명예 같은 가치는 대한민국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진 가치관이다. 이런 가치관으로 우리 국민들이 뭉친다면 앞으로 어떤 위기 상황이 오더라도 대한민국호는 영원히 미래로 항진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펴낸 책은 대한민국의 희망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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