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회 이승만포럼,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 강연 하와이 한인기독학원 설립·운영...폐교 후 건물 매각대금, 인하대 개교 마중물로 쓰여
  •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열린 제87회 우남(雩男)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이 '이승만 하와이 30년'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열린 제87회 우남(雩男)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이 '이승만 하와이 30년'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이승만 전 대통령에게 하와이는 제2의 고향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전 대통령은 1913년 2월부터 미국 워싱턴 D.C.로 떠난 1939년 11월까지 25년 동안 하와이에서 활동했으며, 대통령직을 내려놓은 1960년부터 생을 마감한 1965년까지 5년2개월을 하와이에서 보냈다. 이승만은 하와이를 새 독립국가 설립 준비를 위한 전초기지로 여기고, 그의 계획을 단계적으로 밟아나갔다.

    15일 오후 서울 마포구 자유아카데미에서 열린 제87회 우남(雩男) 이승만(李承晩) 포럼은, 이덕희 하와이 한인이민연구소장을 강사로 초청해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학문적 측면에서 조명했다. 

    1941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덕희 소장은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UC버클리에서 사회학 석사, USC에서 도시계획학 석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30여년 이상 하와이에서 활동하며 <하와이 이민 100년, 그들은 어떻게 살았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 100년사> 등을 펴냈다.

    강연은 △이승만의 하와이 활동 25년 △이승만 하야 후 하와이 5년 등 크게 두 단락으로 나뉘어 진행됐다.

    1913년 2월 3일 하와이에 도착한 이승만은 하와이 감리교회 연회에 참석하면서 한인 목회자들과 관계를 다졌다. 그 인연으로 이승만은 그해 8월 한인기숙학교 교장으로 임명된다. 당시 한인기숙학교는 남학생 65명과 교사 5명으로 구성된 남학교였다.

    이 소장은 "이승만 박사가 교장이 되면서 한인중앙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여학생을 입학시켰다"며 "그런데 당시 많은 자금을 지원했던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반발해 감리교 돈을 받지 않고 한인 성금으로만 여학교를 지었다"고 했다.

    당시 감리교 여선교회에서 여학생 교육을 도맡고자 했기 때문에, 한인기숙학교에서는 '여학생 교육을 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달았다. 이승만은 감리교 여선교회의 지원을 포기하고 한인 후원만으로 1915년 한인여학원을 설립한다.

    1918년 가을에는 한인여학원을 남녀공학으로 전환하면서 이름을 '한인기독학원'으로 변경한다. 이 소장은 "이듬해 임시정부 대통령이 됐을 때 축하 공연을 한인기독학원에서 했다"며 "이때 이 박사는 호놀눌루에서 이미 교육자로 알려져 있었다"고 설명했다.

    1921년 첫 졸업생을 배출한 한인기독학원은 1947년 문을 닫는다. 이 소장은 "그때는 굳이 한인만을 위한 학교를 운영하지 않아도 되던 시기였다"며 "당시 학교 부지를 판 대금 15만 달러는 이 박사의 요청에 의해 인하대학교 개교를 위한 자금으로 쓰였다"고 덧붙였다.

    인하공과대학(현 인하대학교)은 1954년 문을 연다. '인하'는 인천의 '인'과 하와이의 '하'를 합친 이름이다. 이승만은 "한국에 MIT와 같은 공과대학을 설치해 대한민국의 공업 수준을 끌어올려야 한다"는 일념으로 하와이 한인기독학교 처분 대금과 교포들의 성금을 통해 인하공과대학 개교를 위한 재원을 마련했다.

  • 1941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덕희 소장은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사회학 석사, 남가주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1941년 평양에서 출생한 이덕희 소장은 1963년 이화여대 사회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에서 사회학 석사, 남가주대학교에서 도시계획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1924년 이승만은 한인선교부를 조직해 자립에 나선다. 이 소장은 "당시 미국 감리교 선교부에서 자금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이승만 박사는 교회부터 독립해야 나라도 독립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고 했다.

    이미 이승만은 3년 전인 1921년 동포들의 연대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취지로 동지회를 출범했다. 이승만은 이를 바탕으로 동지식산회사를 설립(1925년 12월), 동포들의 경제력 향상과 활동기금 확보를 위해 노력했다.

    다음은 이덕희 소장의 설명. 

    "이승만 박사는 건실한 재정이 마련되지 않으면 정치적 활동을 하기 어렵다는 것을 앞서 깨달았다. 동포 경제력을 일정 수준으로 올린 이후 정치활동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행동으로 옮겼다."

    1960년 4·19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은 아내 프란체스카 여사의 부탁으로 그해 5월29일 하와이 호놀룰루로 거처를 옮겼다. 이덕희 소장에 따르면, 이승만 박사는 1962년 3월 한국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귀국을 한국정부가 원치 않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쌌던 짐을 다시 풀어야만 했다. 

    하와이에 발이 묶인 이승만 박사는 1965년 6월 뇌출혈 증상을 보이며 퀸즈 병원에 입원했다. 입원 후 몸 상태가 급격히 악화된 이 박사는, 하와이에 도착한 지 5년 2개월 만인 1965년 7월 19일 서거했다. 

    하와이 지역신문 '더 퍼시픽 커머셜 애드버타이저'는 1965년 7월 20자 사설 'Syngman Rhee'를 통해 이승만 박사의 서거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1950년대 이승만과 대한민국은 미국 반공산주의의 심볼이었다.  이승만은 2차 대전 후 아시아에서 가장 뛰어난 지도자였고, 미국 정부는 그에게 모든 협조를 다 했다. 아마도 그가 너무 오랜 나이에 너무 오래 정권을 잡고 있었다고도 생각할 수 있지만, 그는 단순한 미국의 꼭두각시가 아니었다. 무엇보다도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애국자였다."

    이 소장은 '이승만의 하와이 30년'을 새로운 대한민국을 준비하기 위한 발판이었다고 평가했다.

    "새로운 국제 정치사가 쓰여지고 있었던 워싱턴에서 이승만이 새 나라 건립을 위한 날개를 펴게 되기까지, 모든 분야에서 경험을 쌓을 수 있었던 곳이 바로 하와이였다. 하와이는 이승만이 건국 준비 과정 속에서 상처, 좌절, 실의를 겪을 때 그를 위로하며 다시 일으켜 세운 제2의 고향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