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예술가들의 대부' 나누고 또 나누고…예술의전당에 2억 객석 기부 이어 공연예산 3000만원 지원
  • "우리 문화에 대한 자긍심을 갖지 못한다면 혼을 잃어버리는 것과 다름없다. 문화는 혼줄이고 생명줄이며, 우리가 아름다워질 수 있는 미래다. 문화예술안들이 마음껏 예술혼을 발휘하고 창작의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지원하겠다."

    지난달 30일 서울 서초구 예술의전당 모짜르트 카페. 권오춘(81) 초허당(草墟堂) 후원기금 회장이 단정한 옷차림에 호쾌한 웃음을 지으며 등장했다. 권 회장은 문화계에 아낌없이 후원을 해 오랫동안 '가난한 예술가들의 대부'로 불린다.

    "눈부신 경제성장에 비해 문화예술의 발전은 더디다. 자동차 앞바퀴는 문화·예술이고 뒷바퀴는 경제·과학이며, 중심은 홍익인간의 정신이다. 국가라는 자동차가 뒤에서 씽씽 가는데 앞이 약해서 비틀거린다. 바퀴와 힘의 크기가 같아야 자동차가 잘 달리고 균형잡힌 국가발전을 이룬다."

    어려운 경제적 여건에서 개인사업을 이룬 그는 생활고를 심하게 겪고 있는 화가 부부의 싸움을 우연히 목격한 이후 1980년 초허당 창작지원기금을 출연해 주변의 예술인들을 지원하고 있다. 2004년 1억 원을 후원해 예술의전당 무궁화 후원회원으로 가입하며 예술의전당과 인연을 맺었으며, 총 4억 원을 기부했다.

    "2004년 예술의전당 음악당에 자주 왔는데, 청소하는 아주머니들이 쉴 곳이 없어서 복도에 앉아있더라. 해외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사장을 찾아가 저들을 위해 휴게실을 만들어달라며 쾌척했다. 그게 인연이 돼 후원을 시작했다."
  • 권오춘 회장은 지난 3월 예술의전당에 2억 원 상당의 객석 40석과 공연 예산 지원금 3000만 원을 기부했다. 객석기부의 예우사항으로 제공되는 객석 명판에 자신의 호(초허당)와 이름만을 명기하고 별다른 수사는 표기하지 말아줄 것을 당부했다.

    "교통사고로 건강이 나빠져 쉬고 있었다. 작년 가을 예술의전당에 와보니 문화기부의 침체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었다. 콘서트홀 1층 C블록 비어있는 객석기부석을 전부 달라고 했다. 많은 분들이 문화예술 활성화를 위해 지갑을 열고 나서는데 마중물이 되고 싶다."

    이름난 클래식 애호가로 알려진 권 회장은 공연 이야기를 하며 소년처럼 눈을 반짝였다. 자신이 내놓은 구상에 신이 나 있기 때문이다. 앞서 그의 제안으로 2005년 토월극장에서 정통연극 '아가멤논'을 선보여 호평을 받았다. 희랍비극의 세계적 권위자인 그리스 출신의 미하일 마르마리노스가 연출을 맡아 화제를 모으기도 했다.

    "얼마 전 고학찬 사장을 만나 이탈리아에서 공부하고 온 성악가들이 고국 무대에 서지 못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다. 이들이 출연하는 이탈리아 5대 오페라 작곡가의 작품을 기획해 달라고 제안했는데 예술의전당이 흔쾌히 수락해 3000만 원을 후원하게 됐다."

    1961년 동국대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한 권 회장은 지금까지 27억1000만 원의 초허당 기회장학금을 출연해 후배를 도왔다. 2004년 서울 양재동 시가 12억원 상당의 오피스텔 5채를 학교에 기증했으며, 동국대는 여기서 나오는 임대수익으로 형편이 어려운 지방 출신 이공계 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급해왔다.

  • "고학을 했다. 그때 '누가 조금만 도와줬어도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기회 장학금에는 조건이 있다. 가난해야하고 지방학생들이어야 한다. 기초과학이 튼튼해야 나라가 강해진다는 생각에 인문계를 졸업했지만 이공계 학생들에만 주겠다고 했다. 성적은 D학점 이상이다. D학점이 A까지 올라갈 수 있지 않느냐. 이러한 논리에 총장이 설득을 당했다."

    올 4월에는 동국대 개교 112주년을 맞아 11개 단과 대학에서 각 1명씩 선발해 1인당 100백원 씩 지급하기로 하고 1100만원을 기부했다. 또, 350여 명의 예술가들에게 82억 원을 후원하면서 수집한 미술품 300여 점을 기증했으며, 작품들은 동국대 일산 바이오메디캠퍼스에 전시된다.

    "장학생들이 나중에 성공해 저처럼 뒤에서 학생들을 돕겠다는 편지를 받을 때 큰 보람을 느낀다. 기부의 씨앗을 뿌리는 기분이다. 제가 이 세상에 없더라도 그 씨는 열매를 맺고 또 다른 씨로 이어져 우리 사회를 풍요롭게 만들지 않겠나."

    지난 2월 모교로부터 명예철학박사학위를 받은 그는 사회 곳곳에 거액을 후원했지만 정작 본인을 초허당 후원기금의 일꾼이라며 겸손함을 보였다. 권 회장은 "인간탐구론 27강을 만들어 다양한 강연을 하고 있다. 아무리 이론과 철학이 좋아도 행동하지 않으면 필요 없다. 실천하지 않는 지식은 지식이 아니다"며 실천하는 삶을 살 것을 강조했다.

    2017년 11월 국제 자선단체인 영국자선지원재단(CAF)이 발표한 '세계기부지수 2017'에 따르면 우리나라는 OECD 35개국 중 하위권인 21위를 기록했다. 전체 139개 조사 대상국 중에선 62위에 그친다. 우리나라의 개인 기부는 주로 자선단체와 종교단체를 통해 이뤄지는 경우가 많다. 특히 문화예술 분야에 대한 기부는 아직도 미미한 실정이다. 

    "그 동안 장학금과 예술가들을 꾸준히 후원했지만 불우이웃돕기는 많지 않았다. 앞으로 사랑의열매 등 단체에 1년 단위로 기부할 계획이다. 예술창작지원금도 기획이 좋으면 단체와 프로젝트에 기회를 줄 생각이다. 예술을 사랑하는 민족의 불은 꺼지지 않는다. 온 사회에 문화와 예술이 아름답게 꽃피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