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의 불특정 군중이 피해자의 마음을 오지랖 넓게 대신""공식적 애도의 표현과 공유..몇 주, 몇 달이면 충분하다"
  • 우파의 목소리를 전하는 만화가 윤서인이 그린 조두순과 김영철 패러디 만화가 최근 사회적 이슈가 된 적이 있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윤서인 처벌을 요구하는 사람들이 20만을 넘으면서 급기야 만화가가 사죄를 하는 형편에 이르렀다. 물론 우파 만화가를 비난한 청원자들의 상당수가 좌파성향임을 추측하기는 그리 어렵지 않다.

    만화는 대통령이 천안함 폭파의 주범인 김영철을 초대하여 46명 순직자 가족들에게 상처를 입혔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청원내용의 핵심은 한마디로 윤서인이 성폭행 사건 피해자의 가족이 느낄 고통에 공감능력이 부족하므로 처벌해 달라는 것이었다. 자유가 촛불집회로부터 시작된 떼거지 정의에 의해 위협당함과 동시에 반이성속으로 추락해 가는 대한민국의 모습을 다시 한번 볼 수 있었다.

    물론 성폭행 피해자가족이 이 만화로 인해 고통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만화가와 그 사건피해자가족간의 문제다. 만일 피해자가족이  개인적으로 문제를 제기한다면 그때는 만화가가 사과를 할 수도 있고, 사안의 심각성에 따라 법적 절차를 밟으며 그 죄과를 심판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직접적 이해관계가 없는 제3의 불특정 군중이 피해자의 마음을 오지랖 넓게 대신해서 추측하고 그 감정을 대신 느껴 줌으로써 만화가의 표현자유를 직접적으로 제한하는 것은 오히려 헌법에 보장된 표현의 자유를 침해하는 심각한 위헌행위다. 도덕적 비난과 개인의 자유에 직접적 제한을 가하는 처벌은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것이다.

    이 만화는 오히려 성폭행피해 가족의 고통에 깊게 공감하는 만화다. 이 만화에서 만화가의 의도는 분명하다. 나영이는 천암함 46명의 순직자들 가족이고, 조두순은 김영철이고, 범인을 피해자당사자에게 소개하는 아빠는 대통령이다.

    이 만화에서 성폭행피해자 가족이 느끼는 고통이 어마어마하게 크다는 전제가 깔리지 않으면 만화의 기본적 논리가 허물어진다. 그 가족의 고통이 아무 것도 아니라면, 그로 인해 은유되는 천안함 순직자 가족들의 고통도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면 조두순으로 은유되는 폭파주범 김영철의 죄과는 없어지고, 그를 한국으로 초청한 대통령의 실책도 문제가 안 된다. 그런데 이 만화의 초점은 천안함 순직자들의 고통은 안중에도 없는 대통령의 잔인함과 실책을 지적하는 데에 있다. 따라서 이 만화는 전적으로 성폭행 피해자가족의 고통이 얼마나 큰지를 가정해야만 성립되는 만화다.  피해자가족의 고통을 손톱만큼도 느끼지 못하면서 어떻게  작가가 그런 논리적 가정을 할 수 있겠는가.

    이 만화는 윤서인이 피해자가족에 대한 공감능력이 없는 게 아니라, 오히려 공감능력이 넘쳐나고 있음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만화다. 다만 그가 흘리는 그 눈물이 표층에 드러나지 않고 심층에 논리의 형태로 숨겨져 있기 때문에 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 만화가 윤서인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거침 없이 당당하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세월호 사건에서처럼 좌파는 모두가 다 보는 앞에서 공감의 눈물을 흘린다. 그것도 부족해서 노란 리본을 다른 사람이 가장 잘 보이는 가슴에 자랑스럽게 달고 다닌다.  그들이 진실로 세월호 가족들과 고통을 같이 했다면, 그들은 아무도 모르는 골방에 들어가 혼자 통곡했을 것이다. 노란 리본은 영원토록 떨어지지 않도록 가슴속 마음에 달았을 것이다. 공식적 애도의 표현과 공유는 몇 주, 몇 달로 충분하다. 그 이상은 위선이며  선동이다.

    만일 골방에서는 아무리 해도 나오지 않는 눈물이 많은 사람 앞에 서기만 하면 줄줄 흐르고, 가슴속 마음에는 달기 싫은 리본이 버젓이 가슴 앞 상의에서는 자랑스럽게 여겨지면 그것은 이 세상에서 가장 부도덕한 연기이며, 가장 추악한 가식이다. 마찬가지로 진실로 성폭행피해자 가족의 고통도 느꼈다면, 그 눈물은 국민청원 게시판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각자의 깊은 가슴속에서 흘렸어야 한다. 

    이번 만화건을 계기로 이루어진 청와대 국민청원과 작가의 사과는 촛불시위 이후 좌파정치의 골격을 이루는 두 개의 전통이 점차 하나의 정치적 규범으로 정착되어 가고 있음을 보여 준다. 하나는 세월호에서 시작된 위선과 가식의 전통이다. 또 하나는 광화문 촛불시위에서 시작된 떼거지 정의의 전통이다.

    공감능력이 부족한 사람들은 처벌받아야 한다는 목소리가 아무런 절차적 심의 없이 곧바로 공적 정의로 추인되는 사회는 더 이상 희망이 없다. 우선은 ‘아픔의 공감’과 같이 소중하게 마음속에서 도덕의 영역에 머물러야 할 양심이 위선의 비단옷을 차려 입고 밖으로 나와 버려, 그 사회 전체의 영혼이 황폐해졌다. 또한 이젠 공감능력의 결여를 이유로 누구나 떼거지를 만들면 누구의 배에서도 곧바로 창자를 후벼 파낼 수 있는 반자유와 폭력의 사회가 되었다.

    기억해야 할 것은 죽창을 든 그들이 시대에 따라 좌左가 될 수도 있고, 우右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이다. 
  • 지영해
    옥스포드대학교 동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