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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습적인 성폭력 사실이 드러나면서 국민적 지탄을 받은 고은 시인이, 일본 가사를 베껴 동요 등대지기의 노랫말을 만들었다는 의혹이 누리꾼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 초중고 교과서 가운데 일부가 등대지기를 소개하면서, 고은 시인을 작사가로 표기했다가 삭제한 사실도 드러나면서, 논란은 더 뜨거워지고 있다. 일부 누리꾼은 직접 자신이 모은 자료를 포털 블로그 등에 올리면서, 자치단체가 등대지기의 작사가를 고은 시인이라고 표기한 조형물 사진을 올리는 등 깊은 관심을 나타내고 있다.
취재결과 일부 검인정교과서와 포항시 등이 등대지기의 작사가를 고은 시인으로 오기(誤記)했다는 의혹은 사실로 밝혀졌다. 30대 중반 이상 국민이라면 대부분 따라 부를 수 있을 만큼 친숙한 동요 등대지기가 일본 가요를 번안(飜案)한 작품이란 주장도 사실로 드러났다. 다만 고은 시인이 일본 가사를 표절했다는 주장의 근거는 확인할 수 없었다.
◆번안인가 표절인가, 교과서 실려 증폭된 '등대지기 표절說'
'등대지기'는 대한한국의 3,40대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어본 ‘국민 동요’다. 이 노래는 유명세를 타고 초중고 교과서에 실리기도 했다. 그러나 수년 전부터 '등대지기'가 일본 시인이자 일본음악저작권협회장을 지낸 가츠 요시오(勝承夫)가 작사한 '등대수'(灯台守·등대지기)와 흡사하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이를 두고 단순한 번안(飜案)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는 반면, '표절이나 다름없다'고 성토하는 시각도 있다.
아래의 두 가사를 보면, 어렵지 않게 비교가 가능하다. 일본어 가사는 우리가 아는 동요 등대지기와 비교하기 용이하도록, 기자가 직역(일부 의역)한 것으로, 정확한 시의(詩意)를 담지 못할 수 있다는 점을 앞서 밝힌다.
-가츠 요시오(勝承夫), <등대수(灯台守)>
凍れる月影 空に冴えて 얼어붙은 달그림자 하늘에 선명하고
真冬の荒波 寄する小島 한겨울 거센 파도 다가서는 작은 섬
想えよ灯台 守る人の 생각하라 등대 지키는 사람의
尊き優しき 愛の心 존귀함 상냥함, 사랑의 마음을
激しき雨風 北の海に 거친 비바람 북쪽 바다에
山なす荒波 猛り狂う 산더미 같은 거친 파도 사납게 날뛰네
その夜も灯台 守る人の 이 밤에도 등대 지키는 사람의
尊き誠よ 海を照らす 숭고한 정성이여 바다를 비춘다.
-<등대지기>
얼어붙은 달그림자 물결 위에 자고
한겨울의 거센 파도 모으는 작은 섬
생각하라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하고 아름다운 사랑의 마음을
모질게도 비바람이 저 바다를 덮어
산을 이룬 거센 파도 천지를 흔든다
이 밤에도 저 등대를 지키는 사람의
거룩한 손 정성 이어 바다를 비춘다.
◆Korra, “2008년 이후 '등대지기'에 고은 이름 없어”
만약 고은 시인의 이름으로 '등대지기'가 교과서에 실렸다면 2008년 출범한 한국복제전송저작권협회(Korra)의 안내에 따라 저작권료를 지급받게 돼 있다. 전병헌 전 국회의원에 따르면 국정교과서에 적용되는 저작권 분야는 △어문 △음악 △미술 △사진 등으로 나뉘고, 요율표에 따른 저작권료 선정과 징수·관리는 모두 Korra에서 수행한다. 따라서 고은 시인이 Korra로부터 '등대지기' 저작권료를 받았는지 여부를 확인하는 것은, 의혹의 진상을 규명하는 좋은 대안이 될 수 있다.
Korra 관계자는 "'등대지기'의 작가로든, 작사가로든 고은의 이름이 전혀 없고, 따라서 고은으로 나간 저작권료도 없다. Korra는 발행되는 모든 교과서를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에게 없으면 정확히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어 "A씨(2011년 작고)가 2008년부터 '등대지기' 저작권료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공개하며 "'일본 가사를 번역한 사람'으로 수령했다"고 부연했다.
Korra 관계자의 설명에 따르면, 2008년 이후 교과서에 수록된 등대지기와 관련해 저작권료를 받은 사람은, 일본 가요를 번역한 A씨가 유일하다. Korra는 2008년 출범했기 때문에 그 이전 상황에 대한 사실 확인을 위해서는 추가 자료가 필요하다. 일부 누리꾼은 1980년대 4차교육과정 시행 당시, 등대지기의 작사가를 고은으로 표기한 교과서가 있다는 증언을 하고 있다. 교육부 관계자는 이런 의혹에 “30년 전 상황이라 구체적인 사실을 확인하기 쉽지 않다”고 답했다.
◆서둘러 사실관계 밝히고 시정했다면…아쉬운 고은의 행보
최근 고은 시인이 미투 운동으로 촉발된 성추문에 휩싸여 칩거 중인 사실을 차치하고라도, '등대지기' 논란이 제기된 세월을 뒤돌아보면 결코 짧지 않다. 1981년부터 수록됐다고 가정하면 무려 37년의 세월이다. 시간이 너무 흐른 탓에 당시 교육부(문교부) 편찬위 관계자에게 확인하기도 어려운 지경이 됐다.
그 사이 일부 교과서와 지자체, 지역 박물관 곳곳에서 '등대지기'를 인용하면서 ‘작사가 고은’이란 표현을 썼다. 2008년 이전 J출판사 '생활국어' 교과서에도 고은의 이름으로 등대지기가 수록된 사실이 확인됐고, 포항시청은 2014년 직원들의 계단 사용을 장려하기 위해 벽면 등대 그림 옆에 '등대지기(고은)'이라는 제목으로 일부 가사를 인용해 새겼다.
J출판사 관계자는 "당시에는 논란이 없었기에 수록한 것으로 알고 있다"면서 "오래된 일이고 당시 교과서 개발팀장이 지금 없어 경위에 대한 사실관계 확인이 쉽지 않다"고 밝혔다.
포항시청은 지난 9일 신청사 1, 2층 사이 벽면에 새겼던 '등대지기'를 페인트를 덧씌워 없앴다. 포항시 관계자는 "담당부서에서 등대 옆에 시가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게시한 것 같다"면서, "일본 번역본 논란도 있지만 최근 미투로 관련한 (성추문) 일도 있어서 지우고 다른 시인의 '등대'라는 시를 게시했다"고 설명했다.
2008년부터 경북 포항 소재 등대박물관에 설치된 가로 50cm 세로 30cm 조형물도 지난달 철거됐다. 등대박물관 관계자는 "미투 이후 (고은 시인의 작품을) 계속 두기 어려웠던 것 아니겠느냐"고 귀띔했다.
고은 시인이, 전국 곳곳에 자신을 작사가로 표기한 등대지기 상징물이 있고, 일부 교과서에 같은 내용이 포함된 사실을 알고 있었는지 여부는 여전히 베일에 가려 있다. 본지는 고은 시인 본인으로부터 사실관계 확인과 해명을 듣기 위해 고은재단에 수차례 연락을 시도했지만 끝내 연락이 닿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