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등에 불 떨어진 영화계 "미투 넘어 性 문제 근절하자" 성폭력 토론회 개최
  • 영화진흥위원회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 :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유성엽 국회 교문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호영 기자
    ▲ 영화진흥위원회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 :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발표 및 토론회를 진행했다. 이날 행사에 참석한 유성엽 국회 교문위원장이 인사말을 하고 있다. ⓒ뉴데일리 정호영 기자

    한국 사회 전반에서 '미투'(#Me Too·나도 당했다) 운동이 거세지면서 성폭력 관행이 드러난 영화계 내부에서도 자성의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영화진흥위원회(위원장 오석근)은 12일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에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개소 기념행사: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발표 및 토론회'를 개최했다.

    이날 토론회는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장 유성엽 민주평화당 의원과 영화진흥위원회·여성영화인모임이 공동주최했고 문화체육관광부가 후원했다.

    개회사를 맡은 유성엽 의원은 "요즘 분위기에 비춰 대단히 무거운 마음으로 이 자리에 섰다"며 "최근 여성 영화인들을 대상으로 한 성폭력이 사회 문제로 대두되고 있는데, 우리나라 문화산업의 근간인 영화산업의 지속적 성장과 정의로운 사회 구현을 위해 이러한 비정상적인 행태가 반드시 개선돼야 한다"고 말했다.

    오석근 영화진흥위원장은 "우리 위원회는 일찍이 영화산업 내 성폭력 문제의 중대성을 인식하고 성범죄 근절을 위한 노력을 지속해왔고, 최근 그 일환으로 여성영화인모임과 든든을 개소했다"면서 "영진위는 '든든'에 무거운 책임을 갖고 지원할 것이며, 이를 통해 성폭력을 예방, 근절하고 나아가 성평등 실현까지 이뤄지길 바란다"고 했다.

    임순례(영화감독), 심재명(명필름 대표)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 센터장의 인사말도 이어졌다.

    임 센터장은 "저희들도 놀랄 만큼 지속적이고 끔찍한 성폭력에 노출돼서 소리 없이 영화계를 떠났던 피해자들이 상처를 치유하고 편안한 마음으로 현장에 돌아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것이며, 현장 동료들도 그런 환경에 노출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강조했다.

    이어 "개인적인 견해로 이 미투 운동이 무언가를 덮기 위한 공작이라는, 혹은 진보진영 분열을 위한 것이라는 잡스러운 이론들이 나오고 있는 현실에 대단히 우려스럽게 생각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꼼수' 멤버 김어준이 지난달 24일 미투 운동의 본질을 흐리며 "타깃은 결국 문재인 정부와 진보 지지층"이라고 한 것에 이어 지난 9일에도 자신이 진행하는 팟캐스트 방송에서 "미투를 공작으로 이용하고 싶은 자들이 있다"고 주장한 것을 꼬집은 것으로 해석된다.

    심 센터장도 "우리 센터는 성폭력·성희롱 예방 뿐만 아니라 관련 내용 홍보와 피해자 보호, 나아가 한국 영화계 성평등 조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든든에 앞으로 많은 지원과 관심 부탁드리고, 앞으로 보다 성평등한 한국영화, 한국사회가 되길 희망한다"고 했다.

    한국영화성평등센터 든든(이하 든든)은 한국 영화산업 내 성희롱·성폭력 문제의 근본적 해결을 위해서는 궁극적으로 성평등이 실현돼야 한다는 취지로 지난 1일 개소했다.

    든든은 △영화산업 내 성희롱·성폭력 사건에 대한 상담 및 피해자 지원 △영화현장의 특수성을 반영한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콘텐츠 개발 및 국내 실태조사 및 해외 성평등 영화정책 연구 △영화산업 내 성희롱·성폭력 예방교육 진행 등의 활동을 펼쳐나갈 예정이다.

    행사 2부에서는 이나영 중앙대 교수의 '2017 영화계 성평등 환경조성을 위한 성폭력·성희롱 실태조사 결과 발표'와 김혜정 한국성폭력상담소 부소장, 원민경 변호사, 문소리 배우 등 5인의 '영화산업 내 성폭력 근절 및 성평등 환경조성을 위한 토론회'가 이어졌다.

    영화계 실태조사는 지난해 7월11일부터 9월13일까지 영화계 종사자 749명을 대상으로 진행됐다. 조사 내용은 △성폭력·성희롱 인식 △본인의 성폭력·성희롱 피해 경험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방안 등으로 구성됐다.

    설문 대상자 749명 중 성비는 여성 467명(62.3%), 남성 267명(35.6%), 그외 15명(2.0%)이었다. 나이별로는 20대 327명(43.7%), 30대 263명(35.1%), 40대 116명(15.5%)이었다. 직군별로는 배우 205명(27.4%), 연출 116명(15.5%), 촬영·조명 107명(14.3%) 순이었다.

    설문 결과 성폭력·성희롱으로 가장 높이 인식되는 행위로는 △원하지 안하는 성관계 요구(94.3%) △원치 않는 신체접촉 및 신체접촉 강요(93.9%)였다. 인식 정도가 낮은 행위로는 △사적 만남이나 데이트 강요(77%) △특정 신체부위를 쳐다봄(81.8%)로 나타났다.

    연구진은 "인식 정도가 낮은 행위는 실제 피해 비율이 높은 행위로, 비교적 자주 발생하는 성폭력·성희롱 행위를 문제로 인식하지 못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성폭력·성희롱 본인 피해 경험'으로는 전체 응답자의 46.1%가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여성 61.5%, 남성 17.2%로 여성의 피해 비율이 월등히 높았고, 피해자는 20대(45.9%)와 30대(48.3%), 비정규직(50.6%·정규직 29.9%)에 집중됐다.

    피해 유형으로는 △외모에 대한 성적 비유나 평가·음담패설(28.2%) △술을 따르거나 옆게 앉도록 강요 또는 원치 않는 술자리 강요(23.4%) △가슴·엉덩이 등 특정 신체부위를 쳐다봄(18.8%) 순이었다.

    피해자들의 대처 방식으로는 △문제라고 느꼈지만 참았음(44.1%) △모른 척하면서 살짝 피함(30.7%) △그 순간 자리에서 나와 가해자로부터 벗어남(16.2%) 순으로, 응답자의 90% 이상이 성폭력·성희롱 피해가 발생했을 때 적극적인 문제 제기를 망설였다.

    즉각적인 문제 제기 및 공론화를 꺼린 이유로는 △넘어가는 것이 제일 나은 방법으로 생각돼서(34.1%) △업계 내 소문, 평판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31.0%) △대처방법이나 도움받을 곳을 잘 몰라서(26.7%) △캐스팅이나 업무수행에서 배제될까봐(25.9%) 순이었다.

    '영화계 성평등 환경 조성을 위한 방안'으로는 △가해자에 대한 확실한 처벌 및 징계(81.2%) △성차별적 노동조건 및 조직 문화 개선을 위한 집단적 노력(62.3%) △피해자 보호 및 대책 마련하는 내부 전담 기구 마련(56.1%) 등이 높게 나타났다.

    토론에 나선 원민경 법무법인 원 변호사는 "강제추행에 대해 법에서 강한 형벌을 명시하고 있음에도, 지금까지 많은 피해자들이 내린 판단을 보면 변호사 입장에서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다"고 했다.

    원 변호사는 "피해자들이 업무상 위력에 의해 강제추행을 호소하더라도 가해자들이 실형을 받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며 "이 과정에서 피해자들은 절망하게 되고, 오히려 피해자들이 가해자들이 있는 집단에서 떠나 다른 삶을 살게 되는 게 아닌가 싶다"고 지적했다.

    영화배우 문소리 씨도 "국민 여러분들이 최근 문화예술계의 안 좋은 소식을 접하면서 분노와 배신감으로 굳어지면 어떡하나 걱정스럽기도 했다"며 "이제라도 든든이 개소한다는 소식을 듣고 정말 반가웠다. 여성 영화인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영화계 성평등 문화를 정착시키고 성폭력·성희롱이 근절되는 데 보탬이 되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