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제 퇴직당한 전직 요원들 증언 "호남인사로 구성된 순화조가 581명 제거...피해자 47%가 영남출신"
  • ▲ 국가정보원 청사 전경.ⓒ연합뉴스
    ▲ 국가정보원 청사 전경.ⓒ연합뉴스

    "DJ 정부는 안기부(국정원)를 장악하기 위해 호남출신 직원을 중용하고, 총 581명의 국정원 직원을 아무 기준없이 불법적으로 강제 퇴직시켰다. 당시 강제로 퇴직당한 직원들의 출신지는 영남 47%, 수도권 23%, 충청 17%, 호남 3%, 기타 10% 순이었다."

    대공(對共)수사를 담당했던 전직 국정원 직원들이 "DJ 정부 때 진행된 안기부 직원 수백명의 강제 퇴직 조치를 수사해달라"고 문재인 정부에 요청했다.

    '국정원 강제퇴직 진상규명 투쟁위원회(이하 국강투)' 측은 "특정 직원들을 강제 퇴직시킨 것은 심각한 인권유린을 자행한 적폐 중의 적폐로 가장 먼저 청산해야 될 사안"이라며 최근 청와대와 국정원 개혁위 등에 탄원서를 제출한 것으로 알려졌다.

    국정원 직원 대량 해직 사태는 DJ 정부 시절인 1998~1999년 국정원 정보관 581명이 해직된 사건으로 잘 알려져 있다. 강제 퇴직자들은 "아무 기준없이 쫓겨났다"고 반발하며 국정원을 상대로 민사 소송을 제기했으나 2008년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국정원의 손을 들어주며 일단락됐다.

    그러나 이후 2009년 국정원의 자체조사에서 강제퇴직 과정의 문제점이 드러났다. 이에 국강투 측은 증거와 증언들을 추가적으로 수집해 2015년 다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김만복 전 국정원장 역시 지난해 7월 항소심을 앞두고 과거 국정원의 위법을 시인하는 진술서를 법원에 제출하기도 했지만 국강투는 패소하고 말았다. 대법원 판결은 현재까지 계류 중이다.

    특히 강제 퇴직 직원들은 문재인 정부가 제주 해군기지 건설을 지연시켜 손해를 끼친 시민단체에 제기한 구상권 소송을 철회한 사실을 두고 "사회 분열을 종식시키는 차원에서 소송을 철회한다는 정부는 지난날 DJ 정권 하에서 자행된 국정원 강제퇴직 적폐도 청산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뉴데일리>가 국강투 측으로부터 입수한 △1998 강제퇴직 진상조사 결과보고 △국정원 자체 진상조사 후 청원에 대한 회신 공문(2009) △김만복 전 국정원장의 진술서 등 증빙자료 등에 따르면 국정원은 2008년 11월부터 2009년 1월까지 80일 간 '98강제퇴직 조사 실무 테스크포스'를 구성해 해당 사건을 자체조사했다.

    조사 보고서에서는 "일부 호남출신 직원들에 의한 자의적인 대기발령자 선정, 명예퇴직 과정에서의 회유 및 강압, 소송시 증거자료 위변조 및 위증 등 당시 면직 과정이 위법 부당하게 처리된 사실이 있다"고 적시하고 있다.

  • ▲ 1981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명칭을 바꾼 뒤부터 사용한 엠블럼. 1998년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될 때까지 사용됐다.ⓒ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 1981년 중앙정보부가 '국가안전기획부'로 명칭을 바꾼 뒤부터 사용한 엠블럼. 1998년 안기부가 '국가정보원'으로 개편될 때까지 사용됐다.ⓒ온라인 커뮤니티 캡처

    ▶ 강제퇴직 유도한 '순화조', 타깃은 영남 출신 직원들

    국강투 측은 "DJ 정부 출범 후 국정원에서는 호남 인사가 주축이 된 '순화담당조'를 구성해 살생부를 만들고, 해당 인사들에게 명퇴를 유도했다"고 주장했다.

    실제 2009년 국정원이 작성한 '98 강제퇴직 진상조사 결과보고서'에서는 "대기발령자들의 자발적 퇴직이 저조하자 순화담당관을 구성해 회유 및 강압, 직권면직 강행방침 통보 등으로 강제적으로 퇴직을 유도한 사실이 확인됐다"고 했다.

    국정원 자체 진상조사 후 청원에 대한 회신 공문(2009) 자료에 담긴 내용도 같은 문제점을 지적했다.

    "국정원이 당시 합리적 선정기준 없이 일부 직원들에 대해 퇴직절차에 착수, 소위 '순화조'를 운영하며 특별격려금 지급 회유, 직권면직 압박 등을 통해 퇴직을 유도했고 적법성을 위장하기 위해 인사 관련 문건을 사후에 위조해 법원에 입증자료를 제출하고 관련 직원이 증인으로 출석해 위증한 사실을 확인했다."

    당시 국정원은 "3급 이상 대기발령자 중 영남출신이 47% 달하는데 반해 호남 출신은 3%에 불과하고 그마저도 정년에 임박한 인사 외에는 사후 구제 되는 등, 이는 영남출신 직원 제거 방편으로 악용됐다"고 인정했다.

    반면 강제퇴직이 진행된 시기 동안 3급 이상 발탁자 중 호남 출신은 51%에 달하는 것으로 확인됐다. 2009년 국정원은 보고서에서 "99년도 강제퇴직자들의 소송 재판에서 법원으로부터 '대기발령자 및 발탁자 출신지 분포자료' 제출을 요청 받았으나 보안을 이유로 거부했다"고 밝혔다. 강제퇴직 과정에서의 문제점을 의도적으로 숨겼음을 확인한 대목이다.

    가장 주목할 만한 점은 국정원 관계자로서는 처음으로 김만복 전 국정원장이 '순화 협박조'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1974년 중앙정보부에 입사한 김만복 전 원장은 국정원 강제퇴직 사건이 있던 1998년부터 1999년 사이 해외차장실 산하 부서에 근무했다. 2004년 기획조정실장, 2006년 1차장을 지냈고, 2006년 11월 국정원 출신으로는 최초로 국정원장에 올라 34년 간 국정원에 재직했다.

    "1997년 12월 DJ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 1998년 2월 초 영동 소재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에 김홍일 전 민주당 의원 등 2명이 상근하면서 안기부 특정 지역 출신 간부들과 함께 도태 대상자를 선정 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1998년 3~4월 간 안기부는 아무 기준 없이 살생부에 거명된 특정지역 출신 간부들을 포함한 580여명을 재택근무 명령을 내어 놓고 이들을 강제퇴직 시키기 위해 '순화 협박조'를 동원해 직권면직과 명예퇴직 중 택일하도록, 갖가지 방법으로 총동원 퇴직을 종용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김만복 전 원장이 지난해 7월 '국강투-국정원' 간의 2심 재판을 앞두고 법원에 제출한 진술서 내용이다.
     
    김만복 전 원장에 따르면 당시 안기부에서는 특정 지역 출신 간부들을 도태시켜야 한다는 5종의 살생부가 유포됐고, 살생부에 본인도 이름을 올렸으나 해외 파트에 있던 관계로 살아남았다.

  • ▲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뉴시스
    ▲ 김만복 전 국가정보원장.ⓒ뉴시스

    ▶ '퇴직자 vs 국정원' 소송 과정에서 위증 있었다

    DJ 정부 때 강제 퇴직 당한 국정원 직원들은 현재까지 국정원을 상대로 소송을 벌이고 있다. 2004년 1심 소송 국정원 패소, 2005년 항소심 국정원 승소, 2008년 대법원 최종심에서 국정원이 최종 승소하자 국강투는 지난 2015년 다시 손해배상청구 소송을 냈다.

    '98 강제퇴직 진상조사 결과보고서'에서 국정원 측은 "강제퇴직자들과의 소송에서 승소하기 위해 법원에 허위자료를 제출하고 인사 실무자의 허위증언을 통해 승소를 견인했다"고 밝히고 있다.

    강제 퇴직이 위법한 처분임을 알고도 국정원의 우월적 지위를 남용해 퇴직원들의 행정소송 등 구제수단을 조직적으로 차단했다고 인정한 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김만복 전 원장은 진술서에서도 거듭 확인할 수 있다.

    "본인이 2004년 4월 국정원 기조실장으로 부임한 이후 2004년 강제퇴직자 모임인 '국강투'가 1심에서 승소하게 되자 당시 고영구 국정원장이 '국정원 패소 시 소요예산 과다 등 문제점이 있으니 무조건 항소심에서 승소하도록 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에 따라 승소를 위한 대책회의를 수차 개최했다."

    "서울대 법대 동기생이면서 국정원 직권면직을 당한 이OO의 소송을 변론해 승소한 양OO 변호사를 변호사법에 위배됨에도 국정원 측 변호사로 새로 선임하는 등 국정원이 승소하는 데 유리하게 만들었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당시 고영구 국정원장과 김만복 기조실장이 2005년 국강투 항소심에서 승소하기 위해 서류를 위조해 법원에 제출하고, 순화조 운영으로 인한 강제퇴직 압박 사실을 부인하도록 지시했다는 부분이다.

    국정원은 2009년 자체조사를 끝낸 후 "1998~1999 강제퇴직 조치는 국가와 조직이 저지른 범죄행위로 위법한 것"이라고 확인했다. 또한 "피해 당사자인 원고들 대부분은 강제퇴직 당시 고교생과 대학생 자녀를 둔 가장으로 경제적 타격이 매우 컸을 것"이라며 관련자 2명을 형사고발 조치했다고 밝혔다.

  • ▲ 지난 2013년 송영인 전 국정원 직원이 채널A에 출연한 모습.ⓒ채널A 화면 캡처
    ▲ 지난 2013년 송영인 전 국정원 직원이 채널A에 출연한 모습.ⓒ채널A 화면 캡처

    ▶ 국가가 저지른 범죄에 '공소시효'가 어딨나

    29년 간 국정원에서 국가보안 정보 업무를 담당했던 송영인 국정원 강제퇴직 진상규명 투쟁위원회 회장은 9일 <뉴데일리>와의 통화에서 "언론에 보도자료를 배포해도 보도도 안하고 신경도 안 쓴다. 현재 소송건은 대법원에 계류 중"이라고 말했다.

    송 회장은 "문재인 정부가 국정원 적폐청산을 하겠다고 하니, 강제 퇴직 문제도 정부가 나서서 밝혀주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강제 퇴직 직원들의 요구와는 달리, 현재 해당 사건과 관련한 수사는 전혀 이뤄지지 않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 '공소시효가 지났다'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해 송 회장은 "2009년 국정원은 자체조사 후 명백히 이 사안을 두고 '국가가 저지른 범죄'라고 자인했다"며 "국가가 저지른 일에 공소시효가 어딨느냐"고 반문했다.

    송 회장은 "국가가 저지른 사건에도 공소시효가 존재한다면, 100여년이 지난 위안부 사건은 왜 현재진행형인가? 공소시효라는 건 개인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고 성토했다.

    국강투의 또 다른 관계자는 "1998년 DJ가 대통령으로 취임한 지 한달 여 만에 강제 퇴직 당했다"며 "국정원 전문정보수사요원 581명과 대공경찰 2,600여명, 기무사 대공수사요원 600여명, 검찰 전문 공안검사 40여명을 일시에 짤렸다"고 언급했다.

    그는 "문재인 정부 출범 후 각종 기관에 탄원서를 제출했고, 여러 언론에도  보도자료를 배포했지만 아무런 움직임이 없다"며 "전직 국정원장까지 인정한 비상식적인 사안에 대해 조사조차 하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들다. 이게 적폐가 아니면 무엇이 적폐인가"라고 비판했다.

    강제 퇴직 직원들의 소송과 관련해 지난 2009년 9월 국정원은 "사건 발생 후 10년이 지나 조사에 한계가 있다. 공소시효가 남아있는 관련 직원들의 위증 등 범죄 혐의에 대해서는 검찰에 고발했다. 지난 정권 하에서 귀하께서 입으신 물질적·정신적 피해에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명예회복을 위해 법이 허용하는 가능한 범위에서 최대한 협조할 것임을 약속드린다"고 전한 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