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자들 보기 싫어 성당엘 오래 전부터 나가지 않는다.

  • 성폭행 가해자, 그를 감싸는 또 다른 가해자

     인간은 다른 인간을 도덕적 경건주의에서 질타할 수 있을까?
    사람은 다 도덕적으로 불완전한 존재들이다.
    도토리 키 재기이지, 누가 누구보다 더 도덕적이라고 자임할 수 있을까?
    ‘미 투’ 운동을 통해 성폭행-성추행 가해자로 들통 난 사람들을 보자니,
    이들을 어느 각도에서 비판하는 게 가장 보편성 있을지 잠시 생각하게 하게 된다.

     그러나 이렇게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우선 그들은 갑(甲)질을 했다는 점에서 치사하기 그지없다.
    누가 문단에서 작품 활동을 하려면, 또는 누가 극단에서 배우노릇을 하려면
    그들이 하자는 대로 해야지 그걸 거절했다가는 출세 길이 영 막혀버리는 메커니즘을
    그들은 최대한 활용했다.
    교수라는 갑(甲)의 입장에서 학생이라는 을(乙)을 제 마음대로 농락한 것도 같은 사연이다.
    이건 일단 들통이 나면 그 치사함에 대한 세인의 몰매를 벗어날 길이 없다.

     성(性)의 문제를 상호성과 공명(共鳴)으로 담아내지 않고
    일방성과 강제력으로 '강행처리' 하는 방식도 처음부터 끝까지 범죄행위 그것이다.
    거기서 조금만 더 나가면 그게 바로 강간 아닌가?
    이 세상에 강간을 나무라지 않거나 처벌하지 않는 곳은 아무데도 없다.
    불륜과 매매춘도 일단 들키면 온 동네가 시끄럽거나 수군수군 하는 법인데,
    하물며 강간이랴. 강간범은 전기의자에 앉히거나 무기를 때리는 게 보통이다.
    성추행-성폭행은 다름 아닌 ‘좀 덜한’ 강간이다.

     별 것도 아닌, 그렇고 그런 ‘잡놈’ ‘잡배’라면 그냥 그렇게 생긴 대로 살아주면 누가 관심이나 보일까?
    ‘잡놈’이 ‘잡놈’으로 산다는 데야 더 이상 뭐라고 논란을 빚느냔 말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번의 주인공들이 그 동안 너무 거룩하고 높고 근사하게 행세 했다는 데 있다.
    문단 원로, 연극계 대부, 방송 노동자 투사, 성직자-그것도 ‘정의’깨나 ‘구현’ 한답시고
    온갖 지고지선(至高至善)한 소리는 다 하고 다닌 그리스도의 대리자(쫄따구지만) 등...
    이들을 정말 그렇게 스카이 지도급인 줄 알고 우러러보고 흠모한 순진한 백성들만 우습게 됐다.
    그러게, 구라 잘 친다고 해서 누굴 그렇게 쉽게 떠받들거나 매료당해선 안 된다.

     이런 폭로를 두고 어떤 친구는 “진보인사를 해치기 위한 공작에 이용당할 수 있다”고 했다.
    꽤 아팠던 모양이지? 그래서 피해자들더러 ‘미 투’ 고백, 하지 말라 이거야?
    지금 그 소리 하고 있는 거야?

     또 어떤 가톨릭 신부는 성폭행 신부를 감싸며 이렇게도 썼다.
    “어느 분의 말씀에 의하면, 그 신부님은 지난 7년간 피해자에게 용서를 구했지만 용서를 받지 못했던 것 같다고 합니다. 그 말씀을 들으며, 그 신부님이 그토록 열심히 사회 정의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해 헌신하고자 했던 까닭이, 7년 전 자신의 죄에 대한 보속(補贖,·지은 죄를 적절한 방법으로 보상하거나 대가를 치르는 것)의 의미는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하하하...
    그 짓을 만약 정의구현사제단 같은 것을 평소에 비판하는 신부가 저질렀더라도 이 제3의 신부란 친구는
    똑같은 변호를 해주었을까? 나는 이런 자들 보기 싫어 성당엘 오래 전부터 나가지 않는다.

     ‘미 투’ 운동은 결국 피해자들의 아픈 상처를 위주로 생각해야 할 일이다.
    진보 어쩌고 변명하는 것 다 웃긴다.
    “나는 너보다 하늘만큼 높다”고 자만한 가해자들의 손길에 당한 피해자들의 씻을 길 없는 마음의 상처-
    이걸 헤아리는 게 ‘미 투’ 운동을 바라보는 시선이 있어야 할 온당한 자리일 것이다.

    류근일 /전 조선일보 주필 / 2018/2/28
    류근일의 탐미주의 클럽(cafe.daum.net/aestheticismclu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