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시장 사과문 게재 “당시 사건 몰랐다”, 피해자 “이것도 김어준이 말한 노림수인가”
  • ▲ 시인 ‘시랑’이 2014년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 캠프에서 겪은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페이스북 글.ⓒ 화면 캡처
    ▲ 시인 ‘시랑’이 2014년 박원순 서울시장 후보 선거 캠프에서 겪은 성추행 사실을 폭로한 페이스북 글.ⓒ 화면 캡처
    “2014년 저 포함 다른 여성이 박원순 캠프 내 총괄 활동가에게 성추행을 당했습니다”로 시작되는 한 시인의 페이스북 글이, 서울시장 3선 도전을 준비 중인 박원순 시장을 난처하게 만들고 있다.

    28일 새벽에 올라온 이글을 작성한 이는 ‘시랑’이란 필명을 쓰는 시인이다. 그녀의 과거 게시물을 보면 시집 ‘발칙한 섹스 슬픈 쾌락주의자의 정직한 엉덩이’을 낸 사실을 알 수 있다. 이 시집에 대해 작가 이외수씨는 “시랑의 흥미롭고 고혹적인 이야기”라고 한줄 평을 남겼다.

    그녀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당선을 ‘끔찍했다’고 표현하면서도, jtbc 등의 ‘박근혜 비아그라’ 보도에 대해서는 비판적 시각을 나타냈다. 안태근 검사장의 성추문 논란에 대해서도, 그녀는 “주변에 이런 놈들 많은데, 주변 사람들은 못 까고 괜히 가진 놈들 까면 더 정의롭다고 여기는 게 더 병신같다"며, 지식인들의 위선을 원색적으로 비판했다. 최근 문단 내 성폭력에 대해서도 그녀는 상당히 비판적이다. 이런 그녀의 모습은, 방송인 김어준이 말한 것처럼 ‘공작’ 혹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추행 사실을 폭로하지 않았음을 반증한다.

    그녀는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여성 혹은 약자를 상대로 한 성폭력에 놀라울 만큼 관대한 우리 사회의 위선에 염증을 느낀 한 명의 힘없는 글쟁이’에 가깝다.

    그녀의 고백이 있고 나서 불과 하루도 안 돼, 박원순 시장은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올렸다. 과거 자신의 선거 캠프에서 벌어진 성추문에 박 시장은 비교적 신속하게 대응했다. 박 시장은 ‘시랑’의 폭로 사건을 국가인권위원회 등 국가기관에 조사 의뢰할 것이라고 했다. 이 사건이 자신의 3선 출마에 장애가 되지 않도록, 조기 진화에 나선 것으로 풀이된다.

    ‘시랑’이 밝힌 2014년 서울시장 선거 당시 박원순 후보 캠프에서 벌어진 성추행 사건은, 다시 한 번 남성들의 비뚤어진 성인식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정치인 박원순의 ‘약속 불이행’ 역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다.

    ‘시랑’이 밝힌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박원순 후보 선거를 돕기 위해 선거캠프에 합류한 ‘시랑’과 다른 한명의 여성은, 캠프 총괄활동가에서 성추행을 당했다. 사건 직후 ‘시랑’과 동료는 그 사실을 가해자보다 ‘나이 많은 분’에게 알리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대답은 상식을 벗어났다. “뭐 남자가 그럴 수도 있는 거 아니냐”. 여자들이 말할 때는 듣는 척도 안 하던 ‘나이 많은 분’은, 캠프 내 다른 남자 활동가들이 항의를 하고 나서야 태도를 바꿨다.

    박 시장은 선거가 끝난 뒤 변호사를 통해 ‘미안하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게 하겠다’고 약속했다. ‘시랑’의 주장에 따르면, 박 시장은 더 이상 성추행은 없도록 지시하겠다는 뜻을 변호사를 통해 전달했다. 선거 백서를 만들어 다음 캠프에 참여할 선거운동원들을 어떤 식으로든 성폭력으로부터 보호하겠다는 방안도 제시했다. 그러나 박 시장은 4년이 지난 지금까지 무엇을 어떻게 하겠다는 구체적 답변을 ‘시랑’에게 전하지 않았다.

    ‘시랑’은 “정치가 쑈이긴 하지만 시장님 돕겠다고 활동한 선거운동원들은 눈에 안 보이시나보다”며, 박 시장의 행태를 꼬집었다.

    그녀는, ‘미투가 진보진영에 해를 가할 수도 있다’는 취지의 ‘공작 음모론’을 들고 나온 김어준의 주장을 의식한 듯, “박 시장님 들먹거리면 이것도 김어준이 말한 노림수인가”라고 반문했다.

    ‘시랑’은 4년 전 있었던 성추행 사실을 이제야 폭로하게 된 이유를 이렇게 밝혔다.
    “오랜만에 박원순 시장 (페이스북) 타임라인 들어갔더니 위안부 문제 떡 하니 올려놨길래 한심에서 한마디 쓰네요.”

    지금도 박 시장 페북에는, ‘한국인 위안부 학살 영상 공개’ 기사와 함께, 그의 심경을 담은 글이 올라와 있다.
    “너무 처참해서 차마 제대로 보기가 힘들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직시해야 합니다. 조국을 잃은 여성들이, 소녀들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고통스럽더라도 똑똑히 바라보아야 합니다.”

    4년 전 박원순 후보 선거 캠프에서 성추행을 당한 ‘시랑’은, 박 시장의 위 글을 보면서 과거의 고통을 다시 떠올린 것으로 보인다. 위안부 문제를 비롯해 누구보다 여성 평등과 인권을 강조한 박원순 시장이, 과거 자신의 선거 캠프에서 벌어진 성추행에는 입을 닫고 있는 모습에 배신감을 느낀 것으로 풀이되는 대목이다. 실제로 ‘시랑’은 페이스북에 두 번째 올린 글에서, “싸움을 더 이상 하지 않았던 이유도 박원순 시장님 측에서 확답을 하셨기 때문이지만, 본인 캠프에서 성추행 당한 여성 활동원에 대한 예의가 결국 4년간 묵묵부답이냐”고 따져 물었다.

    “이번에도 서울시장 출마 하시나요? 그래서 여성들에 대한 발언을 요즘 자주 하시는 건가요?”라는 그녀의 물음에는, 박원순 시장을 넘어 위선에 젖은 정치인과 지식인, 우리 사회의 권력자들을 향한 분노가 담겨 있다.

    박 시장은 ‘시랑’의 글이 올라온 당일 늦은 밤이 돼서야 자신의 페이스북에 사과문을 올렸다. 다음은 박 시장이 올린 사과문 주요 내용.

    “피해자가 안전하고, 안심하며, 최종적으로 해결될 수 있도록 모든 조치를 다 하겠습니다. 
    너무 마음이 아픕니다. 오늘 오전에 2014년 시장선거 캠프 강남지역 사무소에서 인연을 맺은 분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당연히 알았어야 했는데 그 사실을 몰랐던 것도 불찰입니다. 챙기지 못했던 저의 큰 잘못이고 부족함입니다. 
    당시 피해자는 힘든 일을 겪었고, 지금도 힘든 일을 겪고 있습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다른 동료들이 이런 일을 겪지 않도록 기록으로 남겨달라는 요청을 했습니다. 
    그러나 지방선거 백서가 발간되지 않아 피해자의 요청을 담아내지 못했습니다. 이 또한 저의 책임입니다. 
    해당 사건에 대해 국가인권위원회 등 관련 공적기관에 엄정한 조사를 요청합니다. 
    동시에 어떻게 이런 상황이 됐는지, 왜 당시에 문제제기가 되지 않고 무마되었는지 모든 것을 철저히 조사하겠습니다. 
    늦어서 미안합니다. 피해자와 함께하겠습니다.“

    사과는 신속했지만 내용에 대해서는 아쉬움이 남는다. 위 글에서 주목할 부분은, 박 시장이 당시 사건을 인지하지 못했다는 내용이다. 박 시장은 “오늘 오전에 2014년 시장선거 캠프 강남지역 사무소에서 인연을 맺은 분의 이야기를 들었다”며, 당시에는 사건을 전혀 알지 못했음을 간접적으로 밝혔다.

    박 시장의 발언은 ‘시랑’의 주장과 배치된다. 박 시장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당시 ‘시랑’을 찾아와 대신 사과의 말을 전하고, 재발 방지를 약속한 변호사는 누구의 지시를 받았는지 밝혀야 한다. 캠프 내 성추행이란 중대 사건이 벌어졌는데도, 이런 사실을 선거에 나선 후보가 전혀 알지 못했다는 사실도 액면 그대로 믿기 쉽지 않다. 박 시장의 승인을 받지도 않은 상태에서, 선거 백서에 관련 내용을 넣겠다는 말을 변호사가 했다는 것은 현실성이 없기 때문이다.

    박 시장이 이 사건을 경찰에 ‘수사’ 의뢰하지 않고, 국가인권위에 조사를 요구하겠다고 한 사실도 개운치 않은 뒷맛을 남긴다. 성추행 사건을 뒤늦게 안 것이 사실이라면, 박 시장이 취해야 할 태도는 국가인권위 조사가 아니라, 경찰에 수사를 의뢰하는 것이다.

    박 시장의 사과문 게재를 요구하면서, 내용이 충분하다면 관련 글을 삭제하겠다고 밝힌 ‘시랑’은, 1일 정오 현재 글을 내리지 않았다. ‘시랑’은 이 글에서 “사과문이 대충 상황만 넘어가는 것에 그친다면, 기자들에게 지금 상황과 당시 상황을 전달하겠다”고 했다. ‘시랑’의 폭로에 박 시장이 ‘당시에는 내용을 몰랐다’고 해명하면서, 이제 관심은 누구의 말이 사실인지에 모아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