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대표팀 경질·전남 드래곤즈 감독 사임…다사다난했던 박항서의 감독 인생
  • 대한민국 축구 신화를 새롭게 쓴 2002년 월드컵. 길거리로 쏟아진 시민들의 뜨거운 함성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4강 신화를 이룬 거스 히딩크 감독은 공로를 인정받아 정부로부터 체육훈장 청룡장을 받았다. 그로부터 16년이 흐른 2018년. 거스 히딩크와 호흡을 맞췄던 박항서 코치가 또 한 번의 신화를 보여줬다. 이번엔 한국이 아닌 베트남이었다. 지금 베트남은 '박항서 신드롬'으로 뜨겁다.
  • ▲ 미더필드의 '악바리', 박항서 선수

    박항서 감독이 축구 선수로서 데뷔무대를 가진 것은 1981년이었다. 당시 제일은행 축구단에 입단하면서 미드필더로서 짧고 빠른 패스를 선보여 눈길을 끌었다. 이후 육군 축구단에서 군 복무를 마친 그는 1984년 럭키 금성으로 이적하면서 본격적인 프로무대에 나섰다.

    혜성처럼 나타난 그는 1985년 팀의 우승을 이끌면서 ‘레그 베스트 일레븐’에 선정되기도 했다. 1년 뒤인 1986년엔 팀의 주장을 맡았고, 이듬해 준우승을 이뤄내는 쾌거를 맛봤다.

    ▲ 든든한 조력자, 박항서 코치

    1988년 은퇴 선언을 한 그는 LG치타스의 트레이너로 선임됐다. 꾸준한 자기 개발과 최적화된 팀을 꾸려나가기 위해 부단이 노력하던 그는 1994년 FIFA 월드컵 미국에 출전하는 국가대표팀 트레이너로 활동하게 됐다. 당시 대표팀의 수장은 김호 감독이었다. 김 감독과 호흡을 맞추던 그는 월드컵 이후 수원 삼성 블루윙즈의 창단 감독을 맡은 그를 따라 코치로 합류해 2000년까지 활동을 이어갔다.

    2002년, 그는 국가대표팀 수석 코치로 발탁돼 거스 히딩크 감독을 보좌했다. 특히 그는 외국인이었던 히딩크 감독과 선수들과의 가교 역할을 수행하면서 대표팀의 융화를 이끌어냈다는 평을 받았다. 폴란드 전 당시 황선홍 선수가 첫 골을 넣고 박항서 코치에게 포옹하면서 히딩크 감독이 섭섭해 했다는 후문도 있다.

    ▲ 박항서 감독, 대표팀서 경질 되다

    승승장구하던 그의 축구 인생은 2002년 부산 아시안 게임 한국 대표팀을 맡으면서 헝클어졌다. 생애 처음으로 감독직을 맡게 된 그는 대한민국 안방에서 열린 게임임에도 불구하고 동메달을 땄다는 이유로 3개월 만에 경질되는 아픔을 맛봤다.

    그 후 박항서는 포항 스틸러스에서 코치를, 전남 드래곤즈에서 기술고문을 맡으며 조용히 칼날을 갈았다. 2005년 막 창단된 경남 FC의 초대 감독으로 취임했고, 뒤이어 전남FC 감독으로도 부임됐다. 하지만 그는 연달아 미비한 성과를 보이면서 결국 성적 부진의 책임을 지고 전남 드래곤즈 감독에서 사임했다. 사임 후엔 고향으로 돌아가 고등학생 유소년을 코칭하다가 창원시청 축구단 감독으로 취임했다.

    스타 플레이어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감독으로써 뛰어난 성과를 거두지도 못했던 그가 대한민국에 설 자리는 없었다. 성적 주의 풍토인 대한민국에선 협회 뿐만 아니라 구단도 그를 기다려주지 않았다.
  • ▲ 박항서 감독, 베트남을 만나다

    고향에서 조용히 살고 있던 그에게 손을 내민 곳은 다름 아닌 베트남이었다. 2017년 9월 베트남 축구 국가대표팀의 성인 및 U-23 감독으로 선임돼 10월에 취임됐다. 기자회견에서 그는 "나를 선택한 베트남 축구에게 내가 가진 축구 인생 모든 것을 쏟아 붓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베트남에서도 그의 감독 인생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부임 초반 베트남 일부 팬들은 '한국 프로 무대에서 밀려나 실업 리그 감독을 하던 축구인을 데려왔다'는 부정적 평가가 이어지면서 따가운 눈초리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가 베트남 팬들의 우려를 불식시키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치 않았다. 박항서 감독은 보란 듯이 베트남 U-23 대표팀을 이끌며 10년간 이겨보지 못했던 태국을 원정에서 격파하면서 가능성을 보여줬다.

    또 2018 AFC U-23 축구 선수권 대회 조별 리그에서 한국·호주·시리아와 같은 조에 편성되면서 "강호를 상대로 베트남이 승리를 거머쥐긴 힘들 것"이라는 주장이 팽배했다. 그러나 박항서 호는 한국과 경기에서 1:2을 기록하고, 우승 후보였던 호주를 1:0으로 이겼다. 시리아에게는 0:0으로 비기면서 조 2위로 통과했다.

    ▲ 박항서 감독, 드디어 빛을 보다

    1월 20일, 베트남 대표팀은 8강전에서 강호 이라크를 상대로 3:3 무승부 승부차기 끝에 5:3으로 동남아 첫 4강 진출 신화를 기록했다. 이 우승으로 베트남은 동남아 최초 AFC U-16, U-19, U-23 모두 4강에 오른 팀이 됐다. 

    박항서 호의 항해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카타르와의 준결승전도 2:2로 비긴 뒤 승부차기에서 4:3으로 승리를 거머쥐며 베트남 축구 역사 상 첫 AFC 주관 대회 결승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냈다. 승부차기에서 키커 응우옌쾅하이가 실축했으나, 골키퍼 부이티엔둥이 두번째, 다섯 번째 키커를 막아내면서 영웅이 됐다.

    우즈벡과의 결승전에서는 1:1로 연장전까지 끌고 갔지만 안드레이 시도로프가 골을 넣으면서 아쉽게 경기를 마쳤다.
  • ▲ 베트남에 불어닥친 '박항서 신드롬'

    우승에는 실패했으나 베트남은 '박항서 호'로 이미 뜨겁게 달궈져있었다. 붉은 물결과 함성으로 베트남을 뒤덮은 시민들은 "베트남 꼬렌(화이팅!)" "베트남 보딕(무적!)"을 외치며 길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마치 2002년 한일 월드컵때의 '붉은 악마'를 보는 듯 했다.

    대회기간 베트남의 거리응원 풍경은 45년 전 베트남 통일때와 흡사했다고 한다. 9천500만 명의 베트남이 이처럼 들썩거린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푹 베트남 총리는 결승전에 앞서 박 감독과 선수들에게 "이번 대회에서 거둔 승리는 베트남 국민의 강한 애국심과 자부심을 불러일으켰다"면서 치켜세웠다. 박항서 감독이 베트남 축구 사령탑을 맡은 지 3개월여 만에 이뤄낸 기적이었다.

  • 박항서 감독이 이끈 베트남 축구대표팀은 대대적인 국민들의 환영 속에 귀국했다. 전용기를 탑승하고 복귀한 베트남 대표팀은 북새통을 이룬 환영 인파를 뚫고 시내까지 2층짜리 버스를 타고 퍼레이드를 했다.

    연합뉴스에 따르면 카퍼레이드가 벌어진 30km의 도로변에는 수천 명의 시민으 나와 베트남 국기 '금성홍기'를 흔들며 대표팀을 환영했다. 간혹 태극기를 든 시민들도 보인 것으로 전해졌다.

    쩐 다이 꽝 베트남 주석국가는 대표팀에게 1급 노동훈장을 수여했다. 박감독과 미드필더 응우옌 꽝 하이, 골키퍼 부이 띠엔 중에게는 3급 노동훈장을 각각 제공했다.

    노동훈장은 노동, 창의력 또는 국가 건설에 탁월한 업적을 기록한 개인이나 집단에게 수여되는 베트남 최고 영예다.

    국가와 기업은 앞장서서 대표팀에게 포상을 약속했다. 결승전에 앞서 중국 현지 응원을 위해 왕복 전세기 2대를 동원했는데, 베트남 항공사에서 선수 1인당 가족과 친인척 2명까지 2박3일 여행경비를 전액 지원하기로 했다. 

    완성차 기업 THACO는 대표팀에게 10억동(약 4,680만 원)의 격려금과 박항서 감독에게 8억동(약 3744만원) 가량의 고급 차를 제공할 것을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 밖에도 베트남 정부와 수많은 기업들이 격려금을 대표팀에게 전달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