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82회 우남 李承晩 포럼 - '워싱턴회의(1921-1922) 시기 이승만의 공공외교'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 82회 우남 이승만 포럼'에서 김정민 씨가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공공외교'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 82회 우남 이승만 포럼'에서 김정민 씨가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의 공공외교'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하고 있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1921~1922년 이승만은 'KOREA' 및 'COREA' 키워드로 미(美) 여론 동향을 파악하며 청원 외교를 시작했다. 이 시기 일(日) 언론에서는 이승만을 '독립운동의 수괴'라고 표현하며 그에 대한 반감을 드러냈다."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82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서 김정민 씨가 '워싱턴회의(1921-1922) 시기 이승만의 공공외교'를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연세대 정치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김정민 씨는 국가대표 축구선수 출신으로 현재 연세대 이승만 연구원에서 조교로 활동 중이다.

    김정민 씨는 "1921년~1922년은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의 전후처리 문제를 놓고 워싱턴에서 새로운 국제질서를 규정한 시기"라며 "평화체제 구축 흐름에서 약소국의 외교적 독립활동에 불을 지피기 위해 이승만 대통령은 美언론을 활용한 외교활동을 벌여나갔다"고 설명했다.


    조선의 양반으로 태어나 대한민국 국민으로 작고하기까지,
    ·현대 우리 민족의 망국과 건국을 관통하는 인물인 이승만.
    사장된 역사의 진실을 캐내고 밝히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그가 독립활동을 했느냐는 질문에 이 논문으로 답할 것이다.

     

    김정민 씨가 해당 포럼에서 발표한 '워싱턴회의(1921-1922) 시기 이승만의 공공외교' 논문은 이승만 대통령이 워싱턴외교에서 시작했던 신문 스크랩을 재조명한 세계 최초의 연구 사례다. 현재 연세대에 보관돼 있다.

    워싱턴회의에는 각국 언론 관계자 1,000여명이 참석했다. 약소국 대표단 36개국도 독립을 호소하며 집결했다. 그러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워싱턴회의에 공식 초청을 받지 못했다.

    임시 대통령이자 대표단장이었던 이승만은 공식적인 외교 루트가 막힌 상황을 타파하기 위해 미국 여론 동향을 파악하기 시작했다. 약 1년의 기간 동안 267개 이상의 미국 신문사에서 1,009개에 이르는 한국 관련 기사를 수집한 것이다.

    이승만은 저명한 신문수집 대행업체를 활용해 'KOREA' 및 'COREA' 키워드로 미국 내 한국에 대한 여론을 파악하는데 주력했다.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 82회 우남 이승만 포럼'이 열렸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제 82회 우남 이승만 포럼'이 열렸다.ⓒ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김정민 씨는 "이승만 문서(이승만 신문 스크랩)는 미국 내 보수·진보 언론을 포괄해 국제정세와 외교안보를 담고 있으며 국제정치인들의 인터뷰와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이는 청원외교의 대상이었던 각국 대표단의 정보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라고 덧붙였다.

    청원 외교란 미국 의회에 전보, 서한 등을 발송해 자국 독립에 유리한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외교활동이다. 공공 외교란 외국 국민들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통해 공감대를 확산하는 방식의 활동을 의미한다.

    김정민 씨는 "일본제국이 팽창하고 있던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지도를 수록한 점으로 미루어, 이 대통령이 미일 간의 지정학적 다툼에도 관심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고 강조했다.

    특히 여기서 눈에 띄는 것은 이 시기 미국 언론이 이승만의 사진 및 학력을 집중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당시 한국의 자치능력을 의심하던 국제사회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한국 자치의 당위성을 설명할 수 있게 하는 근거가 된다.

    비슷한 시기 일본의 주요 언론들은 이승만 대통령을 "한국 독립운동의 수괴"라고 표현하며 극한 반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김정민 씨는 "이같은 상황은 이승만 대통령이 명백한 외교독립 활동을 했다는 점을 방증한다"고 했다.

    공식적으로 초청받지 못했던 대표단의 자격 문제 및 식민지 처지의 한국의 외교활동에 미국 정부의 공식적 입장은 부정적이었다.

    미(美) 정치인들의 관심이 미미하자, 이승만 대통령은 미국 언론과 더불어 기독교 네트워크를 활용한다. 청원서와 언론인터뷰에서 한국기독교회의 참상을 폭로하고 일본제국의 부당함을 고발하면서 기독교적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미국 사회의 관심을 얻고 한국 독립을 강조한 것이다.

    결과적으로는 이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한국 독립 안건이 워싱턴회의에 상정되지 못했다. 치열한 세계 대결 구도와 미국 내 극단으로 갈라선 여론 탓이다. 워싱턴회의 종료 후 이승만 대통령은 "다시 모일지 아닐지는 모르나 이것이 끝이라고 생각한다면 실수다. 마땅히 조금씩이라도 준비해야 한다"며 지속적인 외교 노력을 호소한다.

    김정민 씨는 "간혹 무장투쟁이 아니라는 이유로 이승만의 외교활동을 폄하하는 세력이 있는데, 워싱턴회의 시기 '이승만 문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한 독립활동이었으며 이같은 형태의 외교 노력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역설했다.

    결과적으로 해당 안건을 회의에 올리는 데는 실패했지만 미국 신문의 국제적 영향력과 일본 사회의 반응을 고려했을 때 외교독립 성과는 결코 적지 않았다는 것이 김 씨의 설명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신문 스크랩, 이른바 '이승만 문서'는 현재 대한민국 국가지정기록물 제3호로 지정돼 있다. 연세대는 1921~1943년까지 이승만 대통령이 직접 제작한 스크랩 60권과 1948~1957년까지의 대통령 재임기 해외 공관 및 타인 제작 신문 스크랩 340권, 총 400권 분량의 방대한 자료 원본을 보유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