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9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 공정식 해병대 6대 사령관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79회 '이승만 포럼'에 강연자로 참석한 공정식 해병대 제6대 사령관.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79회 '이승만 포럼'에 강연자로 참석한 공정식 해병대 제6대 사령관.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잘못된 친북(親北) 이념으로 나라가 혼란스럽지만 이승만 대통령은 바꿀 수도, 지울 수도 없는 영원한 대한민국의 건국대통령입니다."

    '해병대의 살아 있는 전설'이라고 불리는 공정식 제6대 해병대 사령관이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79회 '우남 이승만(李承晩) 포럼'에 참석했다.

    1925년 9월 3일 생으로 올해 만 92세를 맞은 공정식 전 사령관은 해병대 6대 사령관을 지냈으며 제7대 국회의원(민주공화당)을 역임했다.

    공정식 전 사령관은 이날 '해군·해병대의 아버지 이승만'을 주제로 강연을 진행했다.

    "우연하게도 이승만 대통령을 여러번 가까이서 뵐 기회가 많았고, 오늘날 회고해보면 건국대통령은 제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공정식 전 사령관이 입을 떼자 장내가 숙연해졌다.

    그는 "이승만 대통령은 건국대통령이자 해군·해병대의 아버지"라고 강조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국군 최초로 해군과 해병대를 창설하는 등 미래를 보는 혜안이 탁월했던 분입니다."

    공정식 전 사령관에 따르면, 우리 군(軍) 가운데 가장 먼저 창설된 곳은 1945년 11월 '해방병단' 이름으로 탄생한 해군이다. 이어 1946년 1월 '남조선국방경비대' 명칭의 국군이, 1949년 4월에는 해병대가, 같은해 10월 공군 순으로 창설됐다.

    이 중 한국전쟁 발발 1년 전 창설된 '해병대'는 여순반란사태를 계기로 탄생했다. 한국 해병대는 이후 미(美) 해병대와 연합해 한국전쟁사에서 가장 유명한 '인천상륙작전'을 성공시킨다.

    당시 해군 통영정 정장으로 있던 공정식 전 사령관은 여순반란 현장을 직접 체험한 후, 당시 손원일 해군참모총장에게 '해병대 창설'을 건의했고, 이승만 대통령은 이에 전폭적으로 공감한 것으로 알려졌다.

    공정식 전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한국전쟁 중 평균 1주일에 한 번 꼴로 전방 부대를 시찰할 정도로 해군·해병대 역할을 중요시 여겼다"며 "바람 앞 등불이던 한국의 절망을 희망으로 바꿔놓은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이승만 대통령은 말할 수 없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했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 성공에 이어 1951년 6월 강원도 양구군 도솔산 전투의 승리를 가져온 해병대에 이승만 대통령은 '무적해병' 휘호를 하사한다. 

  •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해병대에 써준 '무적해병' 휘호, 이때부터 한국 해병대는 무적해병' '귀신잡는 해병'이 되었다.
    ▲ 이승만 대통령이 한국 해병대에 써준 '무적해병' 휘호, 이때부터 한국 해병대는 무적해병' '귀신잡는 해병'이 되었다.

     ▶ "수도 서울 3번은 못뺏겨…서부전선에 한미해병대 배치하라"

    한국은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과 동시에 북한 인민군에 서울을 함락 당하고 수복 후 중공군 인해전술로 인한 1·4 후퇴로 인해 또 다시 서울을 빼앗기는 패전을 겪는다. 이후 이승만 대통령은 수도 서울 방어 임무를 한미(韓美) 해병대에게 맡기게 된다.

    이승만 대통령은 밴프리트 유엔군 사령관에게 한미 해병대를 서부전선으로 이동시킬 것을 지시했고, 공정식 전 사령관은 당시 해병 제1전투단 부단장으로 임진강~사천강 지역 방어를 지휘했다.

    1952년 3월 서부전선인 사천강 지역으로 이동한 해병대는 1953년 7월 정전협정이 맺어지기 전까지 꼬박 1년 4개월 10일을 사천강 고지에서 중공군과 전투를 벌였고, 5,500여명 병력으로 4만 2,000여명의 중공군을 물리치는 전과를 거둔다.

    해병대의 대승으로 인해 당시 중공군은 서울 재점령에 실패, 결국 중공군 지휘관이던 펑더화이 사령관은 마오쩌둥으로부터 숙청당한다.

    공정식 전 사령관은 "당시 우리는 서부전선 임진강 사천강에서 1959년 3월까지 무려 8년을 주둔했고, 이는 세계적으로 유례없는 최장기 동일지역 방어"라고 강조했다.

    한국 해병대는 창설 6년 만인 1955년 1월 미(美) 해병대와 동일한 규모인 1만 8,000여명의 병력으로 해병 제1상륙사단을 창설했다. 5,500여명 해병대가 병력규모 3배 이상인 완전편성 상륙사단으로 증강된 것이다.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79회 '이승만 포럼'에 강연자로 참석한 공정식 해병대 제6대 사령관.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19일 오후 서울 중구 프란치스코 교육회관에서 열린 제79회 '이승만 포럼'에 강연자로 참석한 공정식 해병대 제6대 사령관. ⓒ뉴데일리 공준표 기자

     

    ▶ 이승만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

    공정식 전 사령관은 "이승만 대통령은 늘 온화한 모습으로 해병대를 북돋워주신 분"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진해 해군사관학교 훈육관 시절 이승만 대통령을 처음 만났고, '몽금포 작전' 승리 직후 다시 인연을 맺게 됐다고 소개했다.

    1949년 8월 몽금포 작전은 대한민국 해군 함정과 미(美) 군사고문단장 전용보트 납북를 일삼는 북한 김일성 정권의 원점을 타격한 '대한민국 최초의 대북 응징 작전'으로 꼽힌다.

    당시 해군은 이승만 대통령의 승인 하에 북한 몽금포항에 함정 5척과 특공대 20명을 보내 북한 경비정 4척을 격침시키고 1척을 나포하는 전과를 올렸다. 해당 작전에 직접 참가한 공정식 전 사령관은 몽금포 작전 승리를 이룬 후 66년 만인 2015년 태극무공훈장을 수여 받았다.

    공정식 전 사령관은 "몽금포 작전 후 진해 통제부 작전과장으로 재직할 당시 진해별장에서 이승만 대통령을 몇 번 뵙게 됐다"며 이승만 대통령과의 특별한 인연을 강조하기도 했다.

    그는 "시간이 흘러 1951년 8월 17일 밴프리트 유엔사령관, 손원일 해군참모총장과 함께 강원도 홍천 부대를 시찰하던 이승만 대통령이 헬기편으로 일선 대대장의 생일축하 케이크를 준비해주셨는데 그 날을 평생 잊지 못한다"고 말했다.

     

  • 공정식 해병장교에게 생일 케이크를 직접 선물하는 이승만 대통령. 종 장군은 이 사진을 가보처럼 아낀다고 했다.
    ▲ 공정식 해병장교에게 생일 케이크를 직접 선물하는 이승만 대통령. 종 장군은 이 사진을 가보처럼 아낀다고 했다.

    ▶ 건국대통령과 우리의 자세

    공정식 전 사령관은 최근 정부와 집권여당에서 '1919년 건국'을 주장하고 나선 것에 대해 "느닷없는 발상이자 누적되는 적폐로, 참으로 비통한 심정"이라며 안타까워 했다.

    이어 "건국 논란 역시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로 오늘의 번영을 가져온 1948년 정부 수립을 깎아 내리려는 불순한 의도"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공정식 전 사령관은 "광복 70년이 넘도록 이념의 편견 속에 '출발부터 잘못된 대한민국'이라고 스스로를 비하시키는 친북(親北) 세력들은 행태는 도가 지나치다"라고 성토하기도 했다.

    끝으로 그는 "과거시험을 준비하던 사람이 어떻게 미국으로 건너가 6년 만에 박사학위를 받았는지, 3.1 운동 후 각종 단체로부터 최고위직에 어떻게 선임됐는지, 까닭을 파악하기 쉽진 않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강력한 리더십은 지금도 우리에게 많은 의미로 다가온다"며 다시 한번 건국대통령에 대한 올바른 평가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