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크에 정면 도전..."휴전 강요는 사형선고, 단독북진 통일" 절규"반공포로 한명도 못보낸다" 이승만, 원용덕에 석방명령서 즉석 작성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⑨ 반공포로 석방명령서

    인 보길 /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 포럼 대표

    스탈린, 졸도 5일만에 사망 "베리아가 죽였다" 미스터리
    스탈린이 갑자기 죽었다. 1953년 3월 5일, 6.25전쟁을 일으킨 침략의 원흉이 사라졌다.
    아이젠하워가 미국34대 대통령에 취임한지 한 달 반 만에 스탈린도 숨을 거둠으로써
    한국전쟁의 양대 교전국 수뇌가 거의 동시에 바뀐 것이다. 
    스탈린은 왜 죽었는가, 아직도 정확히 밝혀지지 않은 그 사인은 미스터리로 남아있다.
    모스크바의 추위를 피해 따뜻하고 아름다운 흑해(黑海) 연안 별장에서 보내던 74세 스탈린은
    그 주말(2월28일)에도 연회를 열었다. 말렌코프와 베리아, 불가닌, 흐루시초프가
    이 연회에 초대되어 만찬을 즐기면서 영화를 관람했고 다음날 새벽4시쯤 파티는 끝났다. 
    기분좋게 취한 스탈린은 웃으면서 흐루시초프의 배를 찌르며 헤어졌다고 한다;(흐루시초프 회고록). 경호원들에게 “부를 때까지 방해하지 말라”면서 자기 방으로 들어간 스탈린은 그러나
    이튿날 하루가 다 가도록 기척도 없었다. 안절부절하던 경호원들은 저녁나절 방에 불이 켜지자
    안도했지만 들어가 보고 싶어도 명령 없이는 들어갈 수가 없었다.
    마침 우편물이 오자 이를 핑계 삼아 용기를 내어 방문을 열었다.
    경호원은 기절할 뻔 했다. 스탈린이 방바닥에 쓰러져있고 의식은 있어도 말을 못하는 상태였다. 침대에서 굴러 떨어진 듯 깨어진 시계는 6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말렌코프와 베리아등 간부들이 연락을 받고 달려왔다.
  • ▲ 관속에 누운 스탈린.
    ▲ 관속에 누운 스탈린.

    이때부터 중환자 스탈린을 다루는 베리아의 언동에 온갖 의혹의 시선이 집중된다.
    비밀경찰등 공안기관을 한손에 쥔 베리아, 그의 권력이 너무 커져 당시 스탈린도 그를 제거하려는 계획을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었음이 뒤에 밝혀졌기 때문이다.
연회중에 베리아가 스탈린의 음식에 독을 탄게 아니냐는 추측이 정설처럼 퍼졌다.
연락을 받은 베리아는 경호원에게 “아무한테도 알리지 말라”며 의사도 부르지 않았다.
사흘후 3월3일 의사들은 스탈린의 사망이 시간문제라고 진단하였다. 말렌코프와 베리아는
긴급 정치국회의를 주도하고, 후임 수상에 말렌코프, 제1부수상에 베리아를 임명하기로 결정하였다. 베리아는 이때 내무부에 대한 통제권도 장악, 실제중의 실세로 자리잡았다.
그는 여러 정치국원들이 병상을 지키고 있는 자리에서도 스탈린에 대한 험담을 하기도 하였다.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본 외동딸 스베틀라나는 스탈린의 마지막 순간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얼굴이 변하고 입술이 검게 되더니 갑자기 눈을 떴다. 모든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무서운 눈길이었다. 아버지는 손을 들어올려 누군가를 가리키면서 저주하려는 듯 하는 순간  
숨이 끊어져 버렸다." 이때 베리아가 방을 뛰쳐나가면서 운전사를 불렀는데
그 목소리는 “환희에 차 있었으며 얼굴이 빛났다”고 흐루시초프는 증언한다.
잔혹한 크렘린궁의 권력투쟁 드라마, 흐루시초프는 3개월 뒤 베리아를 공개 숙청하고,
정권을 잡은 3년 뒤에는 스탈린 독재30년의 격하운동을 벌인다.
  • ▲ 학살자 트리오, 스탈린, 베리아, 마오쩌둥.
    ▲ 학살자 트리오, 스탈린, 베리아, 마오쩌둥.
    북한 묘향산 별장에서 김일성이 뇌출혈로 쓰러지자 의료진의 접근을 지연시켜 숨지게했던
    아들 김정일은 그 수법을 베리아한테 배웠던 것일까.
    3월9일 스탈린의 시체는 스탈린을 제거하려다 죽은 레닌 옆에 나란히 묻혀
    레닌묘는 레닌-스탈린 묘가 되었다.
  • 한민족의 철천지 원수 스탈린, 러일전쟁서 잃은 한반도를 공산화로 지배하려
    미군보다 먼저 점령하고 유엔의 남북한 총선을 거부하여 분단을 고착시키고
    김일성을 시켜 무력남침으로 삼천리 강토를 초토화시킨 최악의 범죄자 스탈린은
    소련인민 2천만명을 숙청-집단살해-굶겨 죽이고, 우리 한민족 수백만명을 희생시킨
    희대의 학살자이며, 죽어서도 한반도를 분단시킨 불구대천의 악마이다.
    그가 만든 분단체제는 그의 꼭두각시 김씨왕조의 핵으로 멸망을 재촉하고 있다. 

  • ▲ 학살자 트리오, 스탈린, 베리아, 마오쩌둥.


  • 소련의 휴전 호응 지시...김일성은 좋아서 "듣던중 반가운 뉴스"

    스탈린이 죽은 열흘 뒤 3월15일 클레믈린서 말렌크포는 신임수상 취임연설에서
    “소련은 미국과 제반문제에 관하여 평화적인 협의를 바란다”며 “평화협상으로 해결되지 못할
    문제는 없다”고 선언하였다. 부수상 베리아도 “모든 국가와 평화를 유지하기 바란다”고 했다. 
    한국전쟁의 휴전은 '내가 죽는 순간까지 반대한다'던 스탈린 말대로 '휴전 반대'는 끝났다.
    미국무성은 “말로는 믿지 못하겠으니 실천으로 보여달라고”고 응수하였고,
    아이젠하워는 19일 백악관 기자단 회견에서 “소련의 평화적 의도는 그들의 성실한 행동으로써
    판단될 것”이라며 “미국은 소련과의 모든 대화에 문호가 개방되어있다”고 화답하였다.

    모스크바 방송은 연일 ‘평화공존’을 떠들었고 모로토프 외무상은 영국와 프랑스에 대하여
    “북한에 억류된 외교관과 선교사들의 석방을 위해 도와줄 용의가 있음‘을 표시하였다.
    동시에 소련 각료회의는 이제까지 추구해온 스탈린 정책을 계속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고 선언,한국전쟁에 대하여 원칙을 바꾸는 새로운 정책을 채택하였고 이를 중공과 북한에 통고하였다.
    ”소련은 가능한한 조속한 전쟁종결을 원하며 이것은 소련과 중국 및 북한 인민들이 원하는
    바이므로 이에 부응하라“고 김일성에게 공식적으로 촉구하면서, 지난 2월 클라크 유엔사령관이 제의했던 상병(傷病)포로 교환 협상에 긍정적으로 임하라고 지시하였다.
    이 방침을 직접 설명하기 위해 3월29일 평양을 방문한 소련 특사 쿠즈네초프(Kuznetsov)는
    북한 김일성이 “듣던중 반가운 소식”이라며 “기다리고 기다리던 뉴스를 전해주어 기쁘다”고
    좋아서 어쩔줄 몰라 했다는 보고서를 모스크바에 보내고있다.
    중공도 소련의 변화에 대체로 환영하는 자세를 취하였으나 장기전을 원했던 마오쩌둥은
    “서울의 이승만이 휴전을 몹시 반대하고 있으니 걱정”이라며 판문점 협상문제를 우려하면서도
    저우언라이로 하여금 김일성과 펑더화이에게 상병포로 교환제의를 받아들인다는 회신을
    유엔측에 방송토록 지시하였다. 그리고 6개월넘게 휴회상태인 정전회담을 재개하자고
    3월31일 클라크에게 제안하였다.
  • ▲ '한미방위조약 체결이 선결' 휴전전에 맺어야...4단 박스기사가 보인다. ⓒ조선DB
    ▲ '한미방위조약 체결이 선결' 휴전전에 맺어야...4단 박스기사가 보인다. ⓒ조선DB
    상황 급변에 국가 비상...폭발한 휴전 반대 투쟁 

    물길을 막았던 스탈린이 빠지자 휴전협상은 봇물 터지 듯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공산측의 상병포로 교환 합의에 이어 “빠르면 5월중 휴전 성립”이란 풍설마저 나도는 분위기가
    되었다. 국내외 각국 여기저기서 ‘한국전쟁 조속종결’을 반기는 논평들이 나올 정도였다.
    유엔측 대표 해리슨은 반공포로 관리권을 중립국에 위임하는 인도(印度)의 절충안안에
    공산측이 긍정적태도를 보이자 남일에게 호의적인 서한을 보냈다. 
    판문점 회의는 그동안 입씨름을 거듭해왔던 모든 논쟁꺼리를 백지화, 원점으로 돌렸다. 
    영국의 처칠이 이때란 듯이 튀어나와 ‘한국 통일계획’을 논의한다는 ‘휴전후 정치회담’ 계획을
    미국과 공동안을 작성하자고 제안하였다.
    이승만은 즉각 반기를 높이 들었다.
    주미한국대사관을 통해 발표한 성명에서 이승만은 “경계선이 어디가 되든지 국토를 분할하는
    전쟁해결은 침략자에 대한 승리를 인전하는 것”이며 “한국인과 유엔 여러나라 국민을 살해한
    적을 용서하고 한국땅을 또 쪼개어 전쟁의 원점으로 돌아간다면 자식들을 바친 부모들에게
    뭐라고 할말이 있겠으며 이런 정치적 과오가 재차 전쟁을 부를 것”이라고 반발하였다.
    ★다급해진 이승만이 격분한 국민들을 진정시키며 일으킨 국민 총궐기 시위가 폭발하였다. 
    4월4일 국회는 유화적 휴전 반대 결의안을 채택하고 임병직 유엔대사와 양유찬 주미대사는
    미국에서 연일 ‘통일 없는 휴전 반대’를 외치는 연설을 이어나갔다. 
    4월15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소련에 대하여 ‘평화달성 5개조항’을 제안한 중대방솔을 하자
    대한민국 국회는 22일 ‘북진통일 국민운동 전개’를 결의하고 국회와 시민공동대회를 개최하기로 결정, 국회 문을 닫고 국회의원들이 직접 거리에 나와 총궐기 행진에 참여한다.
    4월24일 양유찬 주미대사는 미국 정부에 “분할휴전 결사반대, 단독 북진”을 통고한다.
    쌍방의 상병포로들은 하루 800명씩 교환, 유엔측에서 북한군 5,100명과 중공군 700명을 보내고 공산측에선 겨우 한국군450명 유엔군 150명만 보내왔다.
    ★5월1일 이승만은 경무대로 기자들을 불러 ‘불한군 포로 외국이송 반대’를 재천명한다.
    “귀국을 원치않는 중공군 포로들에 대해서는 상관치 않겠으나 북한 출신 포로만은
    한국 이외의 어떠한 제3국에도 이송하는 것을 절대 반대하는 바이다.”
    5월3일 이승만, C군단 창설식에서 “국토분할 휴전 절대 반대” 연설.
    5월8일 변영태 외무장관 “완충지대는 국경선 밖에 설치하라. 한국.영토내 설치는 절대 불가”
    5월11일 이승만 ‘현상 휴전은 20일도 지속 불가능, 단독으로 북진 결행하겠다’
    “한국의 2천만 국민은 북한땅에 중공군이 남아있는 채로 성립되는 어떠한 휴전도 거부한다.
    한국은 언제라도 필요하면 단독으로 전투를 계속할 것이다. 이러한 한국의 결정을 이미
    아이젠하워 미국대통령에게 정식으로 통보하였다. 나는 한국 통일을 전제로 하지 않는 어떠한
    휴전도 한국정부와 국민으로서 결코 수락할 수 없다는 것을 미국정부에 전달하였다.“
  • ▲ 준비상경계령을 선포, 이대통령 강경태도에 워싱턴 당황 등.ⓒ동아DB
    ▲ 준비상경계령을 선포, 이대통령 강경태도에 워싱턴 당황 등.ⓒ동아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