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읍면도 지방자치제 선거로 국민 조직화, 직선제 개헌 동력 삼아주권재민='민위방본' 민주공화국 기틀 굳건히..."내 소원 풀었다"
  • [연재] 이승만史(2) 한미동맹의 탄생  부산정치파동 다시 보기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이승만포럼 대표

    1952년은 임진(壬辰‘)년으로 임진왜란 360주년, 그래서일까, ‘부산정치파동’의 해가 되었다.
    누가 알았으랴. 이승만 자신도 직선제 개헌을 비상계엄령을 통해 강행하겠다는 결심을 연초부타 결심하였다는 기록은 찾아 볼 수 없다. 
    새해 첫날 신문들과 정치인들은 온통 “통일을 쟁취하는 해”를 만들자고 입을 모았다.
    동아일보는 ‘국력집결로 국토통일’이란 캐치프레이즈를 내걸었고, 
    조선일보는 ‘통일달성의 새해’를 신년사설로 써서 결의를 다질 정도였다.
    이승만 대통령은 ‘통일로 자유를 쟁취하자“는 연두사를 발표하였고
    신익희 국회의장도 ”사상전 강화에 전력을 다하자“고 말했다.
    지난해 시작된 휴전협상에서 유엔측과 공산측이 임시군사분계선을 정하긴 했어도
     한국정부와 국민들은 최종적인 휴전 경계선은 ‘압록강-두만강 국경’을 회복해야한다는 목표ㄹ르 향하며 전국적인 시위를 벌이고 있어 통일열망의 열기가 전국을 뒤덮고 있었다.
    그 정초에 이승만 대통령은 쓰디 쓴 패배를 맛본다.
    국회는 작년 11월 정부가 제출한 대통령 직선제와 양원제 개헌안 심의를 시작했지만
    찬성토론자는 국무총리 서리가 된 허정(許政)이 나서는 정도였다. 
    1월18일 국회부의장 조봉암(曺奉岩) 사회로 진행된 투표 결과는 참담한 것이었다.
    찬성 19표, 반대 143표, 기권1표, 대통령 직선제는 모두가 예상한대로 대패하였다.
    재적의원 200명중 19명, 내각제에 집착한 민국당과 좌파들은 똘똘 뭉쳐 반해표를 던졌다.
    국회의원들은 역시나 원내 간선제로 대통령과 권력을 나눠먹기가 훨씬 편한 사람들이다.
  • 1952년 통일과 자유 쟁취를 다짐한 대통령 연두사와 '통일 달성의 해'를 신년사설로 게재한 조선일보 신년호.ⓒ조선 DB
    ▲ 1952년 통일과 자유 쟁취를 다짐한 대통령 연두사와 '통일 달성의 해'를 신년사설로 게재한 조선일보 신년호.ⓒ조선 DB
    ▶ 개헌안 통과를 위해 몇차례 담화와 기자회견을 했던 이승만은 그러나 실망하지 않았다. 
    다만 작년에 “쌍놈당을 만들겠다”면서 노동자-농민들에 의한 신당 창당을 할 때
    지지세력이 원내-원외로 분열된 것과 원내 자유당이 이번에 제 역할은커녕 반대표가 많았다는 점에서 재정비의 필요성이 급해졌다. 원내 자유당엔 반대세력과 프락치들도 끼어들었던 것이다.
    “나는 원내도 원외도 아니다”라며 ‘국부’로서의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던 이승만은
    누가 반대하든 말든 개의치 않고 다시 새로운 카드를 꺼낸다. 
    <이승만 박사 대통령 출마 포기. 77회 생신 맞아 “일개 시민으로 여생 보내겠다”>
    조선일보 1면기사 제목이다. 2대 대통령 선거예정 두 달 앞서 나온 폭탄 발언의 골자는 이렇다. 

  • 1952년 77세 생일날 3월26일 이승만은 재출마를 포기하고 은퇴의사를 밝혔다.ⓒ조선DB
    ▲ 1952년 77세 생일날 3월26일 이승만은 재출마를 포기하고 은퇴의사를 밝혔다.ⓒ조선DB
    [부산26일발 AP 합동]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제77회탄생일에 제하여 젊은 사람들에게 활동분야를 제공하기 위하여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대통령은 6월로 임박한 차기대통령선거에 입후보할지 여부에 관해서는 결정적인 말은 하지 않았다. 
    이날 아침 이곳 임시중앙청에는 천명이상의 정부관리들이 대통령의 탄생을 축하하기위하여 참집하였다. 1948년 이 신생 공화국의 초대대통령에 취임한 이박사는 관리들에게 “나는 젊고 유능한 인사들에게 길을 터주기 위하여 은퇴하고 싶다”고 말하고 “내가 은퇴하면 일개평민으로서 나라를 위하여 일 하겠다”라고 부언하였다.
    그런데 이승만 대통령이 앞서 기자단에게는 재출마를 원하지 않는다고 말한바 있었으나
    이처럼 공개연설에서 은퇴를 원한다고 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정계 관측통들은 이 박사가 재출마 계획을 가지고 있으나 그 지지자들로 하여금 재출마하라는
    권고를 하게 하기 위하여 재선을 원하지 않는다고 암시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이대통령은 또한 이번 연설에서 유엔 사무총장 보좌관 앤드류 코디어 씨의 내한목적이 
    대통령에게 휴전을 반대하고 통일을 주장하는 연설을 하지 말 것을 권고하고 있다는 항간의 풍설을 부인하였다. 유엔의 일부 서방측 대표들은 이대통령의 선동적 성명이 휴전협상을 방해하고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고 한다.
  • 38선 휴전을 반대, 압록강 한만국경 진격을 다짐하는 국민대회 기사.ⓒ동아DB
    ▲ 38선 휴전을 반대, 압록강 한만국경 진격을 다짐하는 국민대회 기사.ⓒ동아DB
    [서울26일발 AFP 합동] 이승만 대통령은 26일 그의 77회탄생 축하식 석상에서 오는 6월 전개될 대통령 선거전에 재출마할 의사가 없다고 선언하였다. 이 보도는 임시수도 부산의 정계에서도 폭탄과도 같은 반향을 일으켰으며 이대통령에 반대하는 정당 및 그 구성인들 사이에 큰 혼란을 던져주었는데 그들은 광복 투사였던 이대통령이 이 달콤한 성명 배후에 어떠한 술책이 숨겨져 있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이대통령은 국회로부터는 호감을 사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일반민중과 군대의 지지를 받아
    약 2백만을 그 신임하에 넣어 자유당을 조직하는데 성공하였는데
    한국내에서 일반적인 지지를 받는 2개의 ‘반대’와 2개의 ‘찬성’ 표어를 기초로 약 3개월 전부터
    태동한 신자유당은 활발히 움직여 왔었다. 이 박사가 제창하는 2개의 ‘반대’란 ‘반공’과 ‘반일’이며 또 2개의 ‘찬성’이란 ‘국토통일’과 ‘자력에 의한 국토방위’이다.
    관측통들은 이박사의 사고방식을 다음과 같은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현재와 같은 국회가 존재하는 한 재선될 기회는 없다. 그러나 나에게는 당이 있다.
    국민 및 군부에는 나에게 투표할 사람들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따라서 만약 내가
    재선을 포기한다고 선언하더라도 지지운동이 일어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조선일보 52.3.28)

    이와같은 보도들은 이승만의 속내를 대체로 정확히 짚은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는 또 다시 직접 국민을 향해 다른 방식으로 자신의 ‘선택’을 물어 보고 지지를 호소한 것이다. 
    결과는 금방 나타났다. “멸공통일 누가 하나? 출마포기 철회하라”
    휴전빈대 시위대의 플래카드가 달라지고 늘어나면서 구호들의 효과는 대단히 뜨거웠다.
    “직선제는 전국민 의사이다” “기본권 약탈하는 국회의원 소환하자”
    “민의 무시 국회는 해산하라” “의회독재 음모하는 배신 국회를 타도하라”

    ▶ 간선제 헌법을 지키자며 호헌결의까지 했던 민국당 등은 직선제를 부결시킨 뒤,
     ‘관제데모’ 배후를 조사하자고 규탄하면서 궁핍한 피난살이에서도 정치자금을 긁어모아
     내각제 개헌준비를 서두른다. 그들의 고민은 “개헌부터 하느냐, 대통령 선거부터 하느냐”였다. 개헌안부터 통과시키면 새헌법에 따른 선거와 당 개편등 번거롭고 시일이 많이 소요되므로
    “현행 간선제에 따라 대통령 선거부터 하자”로 결말을 짓고나서 개헌안을 제출한 것이 4월17일, 세 번째 똑 같은 의원내각책임제 개헌안이다.
  • 1952년 4~5월 시읍면과 도의원을 선출한 지방자치제 선거 투표소.
    ▲ 1952년 4~5월 시읍면과 도의원을 선출한 지방자치제 선거 투표소.
▶ 이승만은 건국직후 49년에 제정했다가 전쟁 때문에 미뤄왔던 지방자치제 선거를 4월25일
전국에 단행한다. 시(市) 읍(邑) 면(面)까지 구석구석 실시한 투표결과는 자유당의 승리였다. 
정원387명에 무소속 40%, 자유당 31%, 민국당은 고작 16석을 얻어 참패를 기록했다.
5월 10일엔 정원 306명을 뽑는 도(道.)의원 선거도 실시, 이번엔 자유당이 무소속까지 누르고
압승을 거둔다. 자유당은 147명이고 민국당은 겨우 4명으로 시읍면 선거보다 더 적었다.
국회만 빼고 전국 국민들은 자유당 지지율이 갈수록 늘어나는 것을 확인한 이승만은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린다.
“주여, 제가 하고자 하는 간구를 받아주신 은혜 감사합니다. 
 이 나라와 국민들을 구해주시는 하나님 명령대로 시행하겠습니다. 
 혼자 방황하는 어린 양 저의 생명을 바치겠아오니 끝까지 인도하여 주실 줄 믿고, 
 공산군 사탄의 무리에 벌을 내리셔서 이 땅을 빨리 통일시켜 주의 나라로 만드소서.“

무초 대사 “다음 대통령은 장면”....민국당 ‘중대발표설‘에 대통령 선거 서둘러
 민의(民意)를 재확인한 이승만은 5월14일 직선제 개헌안을 다시 공고한다.
3월에 야당이 내놓은 내각제와 정부의 직선제가 정면대결 하는 개헌 전투가 되었다.
다급해진 것은 민국당이었다. 두 차례 선거에서 참패를 거듭하고 보니 대통령 선거를 서두르지
않으면 안될 뿐더러, 미국대사관과 접촉한 결과 선거는 빠를수록 좋다는 결론을 얻었다.
무초 대사가 장면을 만나 2대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을 배제하고 장면을 지원한다”는 극비정보에서 무초가 이승만에게 “그만 쉬시라”고 사퇴권고까지 했다는 비밀을 확인한 때문이다.
 그런데 무언가 곧 ‘중대발표’가 나온다는 소문이 나돌아 미국 대사관에 확인한 결과
‘계엄령을 선포할지 모른다’며 미확인정보라고 말했다. 지방자치 선거를 위하여 해제했던 비상계엄령을 다시 내린다면 6월의 국회 대통령 선거는 곤란해진. 6월까지 기다릴 여유가 없다.
개헌파들은 5월말로 선거를 앞당기자며 간선투표의 모의훈련에 들어갔다.
대통령은 누구고 총리는 누구냐, 민국당이 장면 대통령을 차지한다면 총리는 어느 당이냐. 
각파벌 대표들이 모여 막후협상 끝에 사전투표로 정하기로 했다.
제각각 대통령 후보와 총리 이름을 적어서 한데 모으고,. 오늘 못나온 멤버들에게 투표기회를
주기 위해 “날이 밝으면 한꺼번에 개표하도록 하자”고 투표지들을 보자기에 쌌다.
날이 밝기도 전에 날벼락이 떨어졌다. 
각자 숙소로 돌아가 잠이 들려던 국회의원 몇 명이 ‘특무대원’이라는 청년들에게 연행되었다.
비상계엄령이 26일 0시를 기해 선포된 것, 아침 8시 국회로 등원하는 의원들의 출근버스는  
“내려라. 못 내린다” 시비 끝에 통째로 크레인에 꿰들려 헌병대로 끌려갔다. 
  •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오른쪽)을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려고 공작했던 미국 대사 무초.
    ▲ 이승만을 제거하고 장면(오른쪽)을 2대 대통령으로 선출하려고 공작했던 미국 대사 무초.
    비상계엄 선포... 미국에 선전포고 한 것
    “2대 대통령 선거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직선제로 하자” 이승만의 개헌 목표다.
    개헌안을 내놓고서도 “간선제로 대통령 먼저 뽑고나서 내각제 표결은 나중에...” 라는 합의에 따라 질질 끌어오던 민국당은 미국대사의 ‘장면 대통령’ 말만 믿고 있다가 청천벽력을 맞았다.
    전략가 이승만의 전술적 승리, 그는 4월부터 법률적인 대비를 시작하였다.
    형식상 유엔군의 지휘를 받는 국군 동원을 생각했지만 이종찬(李鍾贊) 참모총장이 “군은 정치중립‘이라며 ’출동 거부‘ 반응을 보였는데 알고보니 이종찬은 이미 ’이승만 제거 쿠데타‘ 계획을 미국대사와 은밀히 협의하는 처지였음이 드러났다.
    이승만 대통령은 계엄사령관을 이원화 시켰다. 육군참모총장 이종찬을 계엄사령관으로 하면서
    부산 영남지역만 따로 원용덕(元容德) 소장을 임명하여 비상계엄령을 내렸다. 
    원용덕은 ”무장공비와 패잔병 빨치산이 많아 계엄령이 너무 늦었다“고 했다.
    약소국 대통령의 비애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일방적 휴전협상. 내정간섭, 군부의 친미파 발호, 대통령선거까지 개입하는 미국의 횡포,
    갈수록 ‘친미 매국체제’로 구조화 되어가는 나라를 두고 볼 수가 없었던 대통령 이승만은
    겸사겸사 다목적 수술용 큰 칼을 빼들었던 것이다. 미국에 대한 선전포고였다.
    부산정치파동은 그래서 미국과 국회가 한패가 되고 이승만과 국민이 한편이 되어 싸움을 벌인 
    일종의 ‘한미전쟁’이요, 이승만 입장에선 또 하나의 '독립 투쟁'인 셈이다..
    이승만이 보기에 미국 대사를 상전처럼 섬기는 야당의 행태는 중국을 업고 당쟁을 벌이던
    양반계급이나 친러파로 친일파로 나라를 팔아먹던 ‘매수된 꼭두각시’들과 다를 바 없었다.

    결론적으로 이승만이 이겼다.
    불퇴전의 신념으로 맞서는 이승만을 제거하려 ‘유엔군 계엄령’까지 준비했던 미국도
    “이승만을 대신할 인물 빈곤”이라는 현실에 고민하다가 작전을 포기하였고,
    독재타도 캠페인을 부추기던 부산의 미대사관은 민국당과 흥사단 등을 달래야 하는 
    180도 반대입장으로 바뀌어야 했다. 7월4일 미국 독립기념일 파티가 마지막 고비,
    귓속말로 형세를 타진하는 민국당 사무총장 조병옥에게 무초 대사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승만이 장택상 총리를 시켜 미리 준비해 둔 ‘발췌개헌 조항’ 심의를 마친 국회는
    늦은 밤 기립 표결로 새헌법을 통과켰다. 40일간의 개헌전쟁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이 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 편에서 보다 자세한 상황을 설명하였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한 일정표로 대신함.) 
  • 전국 지역대표 주민들이 부산 피란국회 앞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 전국 지역대표 주민들이 부산 피란국회 앞에서 직선제 개헌을 요구하는 시위를 벌이고 있다.
    <부산 정치파동 40일 개요>
    *5.25: 부산, 경남, 전남북에 비상계엄령 선포. 
    *5.26: 국회 버스 연행, 국회의원들 12명 체포 조사.
    *5.27: 미국측, 이승만에게 계엄 해제 및 의원 석방 요구
    *5.28: 미국정부, 이승만 연금 또는 암살, 유엔군 계엄령 검토.
    *5.29: 부통령 김성수 사퇴. 미군 병원선 입원. 장면도 미군병원 입원.
    *5.30: 국회, 구속의원 석방 결의안 통과. 의원들 망명 소문 파다
    *6.2 클라크 사령관, 이승만 제거에 소극적. 외교적 해결 촉구.
    *6.4: 트루먼, 백악관 합동회의에서 이승만 제거계획 일단 포기.
    *6.9: 국회의원들 조사결과 발표. 국가보안법과 형법 위반
         “일본공산당과 남로당등 적으로부터 비밀자금 받았다“
    *6.11: 지방의회대표 등 1,500명 국회의사당 포위, 직선제 개헌 압박 강화.
    *6.12: 무초 대사, 이승만에게 이범석등 강경파 교체 요구
    *6.19: 국회, 국제공산당 관련 내용 진상조사 결의안 채택.
    *6.18: 미 대사관, 이승만 제거 다시 요청...클라크등 군부와 갈등
    *6.20: 국제구락부서 ‘반독재 호헌 구국대회’ 비밀집회, 청년단체가 습격 해산
    *6.23 국회, 내각제-직선제 두 개헌안을 동시에 상정
    *6.25: 6.25행사장서 이승만 암살 미수, 범인 국회의원 김시현 체포
    *6.27  이승만, 언론 보도 검열 폐지 지시. 
    *6.27: 국회에 두 개헌안 절충 ‘발췌개헌안’ 등장 심의
    *7.1: 새 임시국회 개회. 구속의원들 석방시켜 본회의 정족수 충원.
    *7.4: 국회, ‘발췌 개헌 조항’ 기립 표결로 가결 통과.
    *8.5: 새 헌법에 의한 최초의 대통령 직접선거 시행, 이승만 당선.
  •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악수하는 밴플리트.8군사령관과 클라크 유엔사령관(이승만 왼쪽)
    ▲ 이승만 대통령을 방문 악수하는 밴플리트.8군사령관과 클라크 유엔사령관(이승만 왼쪽)
    미국의 이승만 제거 작전:
    조속한 휴전을 추진하는 미국은 “이승만의 휴전반대운동이 교활하고 필사적이어서 무슨 짓을 
    할지 모른다”고 결론짓고 개성협상 시작전 1952년 2월부터 ‘유엔군에 의한 이승만 제거’ 작전을 계획한다. 5월 25일 이승만이 계엄을 선포하자 “하늘이 준 기회”라며 국무성이 앞장서 국방성과 유엔사령부에 작전계획 수립을 독촉한다.
     .“밴플리트가 이승만을 지지하는 언동을 삼갈 것” “이승만을 설득-국외추방-세계여행”
     “협력을 거부하면 이승만을 예비구속 연금.” “유엔군이 계엄령을 선포, 부산을 장악한다.”
     “언커크가 한국정치세력 분규 조정을 맡는다” “미국은 경찰권을 인수, 과도정부를 세운다” 
    갖가지 검토작업 가운데 부산의 미국 대사관측이 가장 강경하여 ‘이승만의 영구제거’를 건의,
    암살까지도 포함되었다. 작전 당사자 클라크 유엔사령관은 그러나 가장 소극적이어서 군사개입은 전쟁상황을 망친다며 강공책을 반대, 외교적으로 풀라는 입장을 고수하였고,
    8군사령관 밴플리트 역시 “전쟁을 대신 지도할 인물이 없다”며 가세하였다.
     ‘절망에 가까운 희망’을 가지고 국무성이 이승만을 설득, 협박, 압력을 가하였으나 요지부동,
    이승만은 미국의 약점을 찌르면서 전국 국민대표들을 동원하여 ‘직선제 개헌’ 과 ‘국회의원 소환’등 국회 압박을 더욱 강화하였다. 미국은 작전을 포기하고 직선제개헌을 묵인하기로 결정,
    그러나 이듬해 이승만의 반공포로석방 때 이 작전을 다시 가동시킨다.

    국제구락부 사건: 민국당이 6월20일 부산 남포동 국제구락부에서 흥사단과 함께 개최한
    비밀정치집회 ‘반독재 호헌 구국 선언대회’로 약 70명 참석, 선언문을 읽기도 전에 데모대’의 습격을 받아 난장판으로 끝난다. 선언문은 김성수가 작성, 장면이 읽기로 했으나 두 사람은 모두 미국 병원에 은신하여 나오지 않았다. 이승만 고발장 같은 선언문 내용은 ‘헌법을 유린하는 반역적이고 망국적인 독재자를 타도하자’는 것, 요컨대 간선제 헌법을 사수하여 이승만을 낙선시키고 정권을 장악하자는 결의대회였다. 이 사건으로 민국당은 국민들로부터 더 외면을 당하게 된다.
  • 부산정치파동때 계엄해제등을 요구하며 내정간섭하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 이승만이 보낸 답신내용. "민주국가 확립에 나보다 더 근심한 사람 없다"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1952.6.4.ⓒ조선DB
    ▲ 부산정치파동때 계엄해제등을 요구하며 내정간섭하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에 이승만이 보낸 답신내용. "민주국가 확립에 나보다 더 근심한 사람 없다"는 제목이 눈길을 끈다. 1952.6.4.ⓒ조선DB
     ‘부산정치파동’관련 이승만 대통령의 주요 어록(語錄)
    【 민주국가 시민의 가장 신성한 (선거)권리를 소수(국회의원)만이 행사해서 민국의 토대를 위태롭게 하며 유권자의 권리를 빼앗게 되는 것이므로 국회의원들이 민의가 어떤가를 알아서 즉시 파기 번안해서 교정할 줄로 나는 믿는다. 그러지 않으면 모든 유권자들이 투표해서 자기들의 대표를 소환하는 결정을 해서 국회에 알려야 할 것이다.】 (2.15. 국민 담화)

    【 내가 대통령 자리에 있는 동안 이것(직선제)을 실현해야겠다는 책임감으로 추진하겠댜.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모르고 국회의원들이 자기권리만 주장한다.】
    (국회 특별조사단의 12개항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 대통령이 위법하거나 민의에 반할때는 국회에서 탄핵조건을 정하여 탈선을 막았으나 국회가
    탈선하는 경우에는 어찌 방비해야한다는 조항을 아직 못정했으니 이런 조건을 명문으로 헌법에 올려서 민의에 반항하는 의원을 소환할 수 있게 하고...】 (3.6. 국민 담화) 

    나는 앞으로 기껏 몇해 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오. 나는 조국을 위해 못다 한 일들이 있기는 하나 그 목표들을 이룰 수 있는 시간이 없다는 것을 알지못할 만큼 어리석지는 않소. 국민 복리에 관심이 없는 이들은 자기 욕망을 위해서 권력을 추구하고 있는데 그것을 막기 위해 나는 모든 노력을 기울일 것이오. 이 문제가 분명하게 되기 전에는 대통령 자리를 떠나지 않겠소....국민의 뜻에 따르는 단 하나의 길은 국회를 양원제로 하고 대통령을 직선제로 하는 것뿐이며 이 목표만은 대통령직을 떠나기전에 반드시 이루고 말 것이오...】 (5.23. 무초대사를 면담한 자리에서 / 계엄령 선포 이틀전)

    【 국회가 그 자격을 거의 상실하고 있다. 국민들은 국회가 국민의 의견에 반한 대통령을 선거할 수 없도록 국회를 해체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국회의원을 매수할 목적으로 방대한 적색자금이 침투한 명확한 증거가 있다. 체포된 국회의원 9명의 범죄사실에 관한 증거를 보유하고 있다. 국회를 해체시킬 길은 지방의회내의 국민대표들이 그들의 국회의원들을 불신임하는 밥법이다. 국민들은 국회의원들이 대통령 선거를 행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있으며 국민의 의사는 존중되어야 한다.】 (52.5.29)

    대한민국의 헌법을 침해한 것은 내가 아니고 국회다. 이 나라가 진실한 독립 민주국가로 확립하는 것을 보려고 나보다 더 근심한 사람은 없다. 이것(직선제 개헌)은 내 평생을 통한 투쟁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의 목적이다. 나는 여러분의 원조와 협조로써 수립되었고 또 현재 방위되고 있는 대한민국에 광범한 민주적 기초를 수립하는 데 여생을 바치고 있다.】 (6.4. 유엔 한국통일부흥위단에 보내는 서한)

    우리 반대분자들은 언제나 허위선전으로 정부를 곤란하게 만드는 것이 유일한 수단인데
    근래에는 더욱 맹렬히 모든 낭설을 조작하여 민심을 위협하는 가운데 가장 심한 것은
    아무 아무개가 정권을 잡으면 미국에서 원조가 많이 오고 그렇지 않으면 안온다는 등
    또는 무초 대사의 말에 한국에 정치파동을 식히지 못하면 원조를 안준다는 등등
    이런 선전을 하고 다니는 사람은 우방의 후의를 왜곡해서 자기 정치에 이용하려는 것이니 주의해서 들을 지어다. 우리나라를 도와주는 나라가 있어서 우리더러 자기들이 수백억 달라로 도울것이니 자기들 하라는 대로 복종하라든지 말 안들으면 주는것도 안주겠다 한다면
    우리 한국인으로서는 공산당이나 그와같이 압제하는 자에게는 모든 국민이 굶어죽을지언정 우리의 독립주권을 양보하지 않겠다고 작정할 줄 믿는다.】 (6.4 국민에게 보내는 성명)

  • 최초로 직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성명. 52.8.11ⓒ조선DB
    ▲ 최초로 직선 대통령이 된 이승만의 성명. 52.8.11ⓒ조선D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