北 김정은에 대한 유화책이 우려스러운 이유

독재가 낳은 쌍생아, ‘대약진 운동’과 ‘고난의 행군’

양일국 칼럼 | 최종편집 2017.07.28 14:03:43
▲ 양일국(정치학 박사, 한국자유총연맹 대변인). ⓒ 양일국 박사 제공


불가(佛家)에서는 우리의 영혼이 몸을 바꿔가며 나고 죽는 것을 반복하는 ‘윤회(輪回)’의 질서에 따라 다음 생이 지옥일 수 있으니 선하게 살자고 가르친다.

세 가지 종류의 지옥을 의미하는 ‘삼악도(三惡道)’ 가운데 가장 고통스러운 형벌을 받는 곳이 아귀도(餓鬼道), 즉 굶주리는 고통을 주는 곳이라 한다.

오늘날 인권 논의가 지나치게 현학적으로 흘러가다 보니 대체 인권이 무엇이고, 그것에 대한 준수와 침해의 기준이 무엇인지 혼란스러울 때가 있지만 결국 기본적인 식량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는 일종의 아귀지옥과 다를 바 없으며, 그 원인이 천재지변이 아닌 인재(人災)라면 그 어떤 논리로도 정당화될 수 없을 것이다.

지난 100여년 사이 동아시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아사(餓死)한 전례가 있다. 그 중 90년대 북한의 ‘고난의 행군’, 그리고 그보다 앞선 1958년부터 1961년 사이 중국의 ‘대약진 운동’은 공산 독재체제에서 비롯된 비극이라는 점에서 닮은꼴이라 할 수 있다.

1974년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F. 하이에크(Friedrich August von Hayek, 1899-1992)는 불완전한 개인이 한 국가 전체를 좌우하게 되면, 필연적으로 나쁜 결과로 이어질 수밖에 없음을 지적했다.

여기서 불완전하다는 의미는 한 국가의 모든 문제를 다 관리할 수 있는 천재성을 가지지 못했다는 의미 외에도, 공익보다 사익을 먼저 추구하는 권력자의 한계를 포함한다고 할 수 있다.

1953년에 집권한 소련의 수장 흐루쇼프(Nikita S. Khrushchyov, 1894-1971)가 서방과의 화해를 골자로 하는 ‘평화공존론’을 들고 나오자,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은 이를 변절이라 비판했고 이로 인해 중국을 후원하던 소련과의 관계가 악화됐다. 이러한 위기상황에서 칠순 고령의 마오는 1958년부터 3년간 ‘대약진 운동’이라 불리는 그들만의 국가 발전계획을 강행하게 된다.

농민들을 집단농장에 묶어두고 개인적인 이동과 식사까지 금지하는 강도 높은 집단생활을 강요하는 한편 현실에 맞지 않는 무리한 공업화를 추진한 결과, 무려 3천에서 5천만명으로 추산되는 양민이 굶어 죽었다. 참고로 인류 역사상 최대 범죄로 손꼽히는 히틀러의 유태인 학살이 600만 명 수준이었다.

대약진 운동은 한마디로 지도자의 과욕과 무능, 그리고 이를 견제할 수 없는 독재가 빚은 참상이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로 ‘토법고로(土法高爐)’를 들 수 있다. 이는 농촌 한 가구마다 전통적 방식의 소규모 용광로를 두면 대규모 제철공장 없이도 필요한 철을 확보할 수 있다고 믿은 마오의 패착이었다.

숙련공도 아닌 평범한 농민들이 조악하게 만든 철제 농기구가 제 구실을 할리 없었고 이로 인해 식량 수급에 막대한 차질을 빚었다. 그러자 마오는 식량부족의 원인을 참새로 지목해 사냥하라고 명령했고 그 결과 천적인 병해충들이 번성해 식량사정이 더욱 나빠졌다.

일이 안되려다 보니 MIT와 칼텍에서 유학한 참모 첸쉐썬(錢學森, 1911-2009)도 비극에 한 몫을 거들었다.

그는 농민들이 통상 20cm 정도의 간격으로 벼를 심는 것에 착안해 벼를 더 빽빽이 심으면 더 많은 수확이 가능할 것이라고 마오에게 조언했고 이는 즉각 실행에 옮겨졌다. 농업에 문외한이었던 그들의 기대와는 달리 가뜩이나 어려운 식량사정이 더 악화되고 말았다.

무서운 공포정치 아래서 벼와 벼 사이가 가까워지면 서로 생장을 방해하고 병충해가 자라기 좋은 환경이 된다는 상식적인 이야기를 아무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대목에서 정부를 비판할 수 있는 언론의 자유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상기하게 된다.

북한의 ‘고난의 행군’ 역시 ① 대외적 고립으로 인한 빈곤 ② 지도자의 과욕과 무능 ③ 견제가 불가능한 독재체제의 삼박자가 맞아 떨어졌다는 점에서, 상기 대약진 운동과 다르지 않았다.

북한의 경제난은 1972년과 그 이듬해, 전 세계를 강타한 오일쇼크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북한 역시 외국 은행을 통해 대출을 받아 기술과 자본을 수입한 터라 외채상환을 해야 할 입장이었으나 김일성(1912-1994)이 이를 거부하면서 국제사회로부터 고립을 피할 수 없었다. 물론 이는 북한 주민이 아닌 김일성의 입장에서는 합리적인 선택이었을 수도 있다. 비슷한 시기 루마니아의 차오셰스쿠는 외채를 무리하게 상환하다가 1989년 독재의 종말을 맞았다는 데서 그렇다.

중국이 1978년부터 개혁개방에 접어들면서 북한에게 빌려간 돈을 갚으라고 요구하자 북한은 ‘주체 경제’라는 이름으로 그들만의 국가발전을 시도하다 실패를 거듭했다.

1980년대 북한 정권의 3대 패착으로 손꼽히는 ① 남포 서해갑문 부실공사(1981-1986) ② 평양 세계청년학생축전(1989) ③ 평안남도 순천 비료공장(1983)은 모두 정권의 무능과 과욕으로 인한 경제적 악수(惡手)였다.

순전히 대외 과시목적으로 개최한 ‘세계청년학생축전(1989)’에 당시 연간 무역액에 맞먹는 46억 달러를 낭비했는가 하면, 100억 달러를 투자한 순천 비료공장은 제대로 가동되지 못하고 고철로 방치되다 철거하는데만 20여년이 걸렸다.

1990년 소련의 패망 이후에도 북한 정권은 주민을 살리는 개혁개방을 선택하기보다 권력과 체제를 유지하기 위해 ‘고난의 행군’을 택했고, 이는 실로 참담한 결과로 이어졌다.

1994년 북한의 경제성장률은 –1.8%, 1995년에는 –4.8%를 기록했고, 1998년 1인당 GDP는 1990년 대비 3분의1 수준으로 급감했다.

통계청의 추정치에 따르면 1994년부터 10년간 48만2천명이 사망하고 12만8천명의 출생손실이 있었다고 밝히고 있지만, 과거 황장엽 선생은 사망자 규모를 300만명, 유엔사면위원회는 200만명으로 각각 추산한 바 있다. 집계 방식에 따른 오차를 감안하더라도 ‘대약진 운동’과 ‘고난의 행군’은 결코 독재와 인권이 양립할 수 없음을 명백히 실증하고 있다.

지난 7월5일 미국 틸러슨 장관은, 북한이 발사한 미사일은 대륙간탄도미사일(ICBM) 이라고 인정했다.

나날이 발전하는 미사일 기술에도 불구하고 세계식량정책연구소(IFPRI)의 ‘2016 굶주림지수’ 보고서에 따르면, 북한은 전체인구의 41.6%가 영양실조로, 1990년의 21%, 2010년의 32%에 비해 한층 더 악화된 것으로 조사됐다. 결국 독재자는 공익이나 인류사적 정의를 위해 자신의 권력을 양보하지 않는다는 교훈으로 귀결된다.

특히 1989년 루마니아의 차오셰스쿠, 1990년 동독의 호네커, 2011년 리비아의 카다피 등 쟁쟁한 선배 독재자들의 최후를 똑똑히 지켜본 김정은 정권의 권력 집착증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을 것이 확실시된다. 앞에서는 북한 인권을 말하면서 독재정권에 유화적인 이들이 많은 오늘의 시류를 걱정하는 이유다.

양일국 한국자유총연맹 대변인, 정치학 박사(국제정치학 전공).

※위 글은 필자가 월간 ‘자유마당’ 8월호에 올린 기고문을 수정한 것으로, 필자의 동의 아래 전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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