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아려 기는 문화 확산되면, 새 정부도 제왕적 대통령 덫에 걸린다"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 직후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장에 들어서며 한민구 국방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 뒷쪽은 김관진 안보실장이다. ⓒ뉴시스 사진DB
    ▲ 문재인 대통령이 지난 14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 직후 소집된 국가안전보장회의(NSC) 회의장에 들어서며 한민구 국방장관과 악수하고 있다. 대통령 뒷쪽은 김관진 안보실장이다. ⓒ뉴시스 사진DB

    국방부와 외교부 등 행정부처가 종래 사용하던 용어를 문재인정권 출범 이후로 새 정부의 정책 방향이라 추측되는 방향으로 미리부터 알아서 바꿔쓰고 있어 '촌탁(忖度)'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이처럼 위에서 뭐라 지시하기 전부터 아래에서 '알아서 기는' 문화가 만연하면 '통제받지 않는 절대권력'은 '절대부패'의 길로 내달릴 수밖에 없기 마련이라, 출범 일주일 째인 문재인정권에 벌써부터 '제왕적 대통령제'의 어두운 먹구름이 드리우고 있는 것 아니냐는 우려가 제기된다.

    국방부는 16일 새 정부 출범 이후 처음 소집된 국회 국방위 업무보고에서 북한의 핵·미사일 도발 시의 대응 방향과 관련한 설명을 대폭 '순화'했다.

    국방위 소속 무소속 이정현 의원은 "(이전 정권 때 보고서에 있던) '응징·보복 능력을 확보한다'는 대목을 쏙 뺐다"며 "'대북 심리전 방송을 통해 북한 도발에 대응하겠다'고 했는데, 오늘 보고서에는 쏙 빠졌다"고 지적했다.

    바뀐 것은 국방부 뿐만 아니다. 외교부 또한 북한의 미사일 발사 도발이 있었던 지난 14일 내놓은 성명에서 통상 '엄중한 위협'으로 표현하던 것을 '엄중한 도전'으로 바꿨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 의지" "강력한 징벌적 조치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는 경고성 표현은 사라지고, 대신 "일체의 도발을 중단하고 대화의 길로 나올 것"을 촉구하는 표현이 새로 들어갔다.

    문재인정권이 아직 외교·안보라인을 개편하지 못한 채 관련 인사를 놓고 장고 중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상부로부터 용어 '순화'에 대한 명시적 지시가 내려왔다고 보기는 어렵다는 게 정치권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장관이 지시했느냐"는 이정현 의원의 힐문에 한민구 국방장관은 "지시한 적이 없다"고 했는데, 이 말은 사실일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보다는 위에서 뭐라고 하기조차 전에 보고서나 성명을 작성하는 실무선에서 미리 헤아려 판단하는 '촌탁(忖度)' 행각이 발동된 게 아니냐는 분석이다.

    '촌탁'은 일본 아베 신조(安倍晋三) 내각총리대신의 배우자 아키에(昭惠) 여사가 명예교장으로 있는 모리토모학원(森友學園)이 오사카의 국유지를 감정가의 14%에 불과한 헐값으로 매입하는 스캔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일약 화제가 됐다.

    내외신 기자회견 과정에서 가고이케 야스노리(籠池泰典) 모리토모학원 이사장은 해당 국유지를 헐값으로 불하받은 배경에 대해 "총리가 지시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아랫사람들이 촌탁(忖度)했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이에 외신기자들을 위한 통역사가 '촌탁'에 대해 "번역 불가"를 선언하는 촌극이 일어났다.

    윗사람(이 경우에는 총리)이 일일이 지시하지 않아도, 재무성·국토교통성·오사카부의 실무 공무원들이 알아서 총리의 의중을 미리 헤아려 국유지를 헐값에 불하해주는 '촌탁' 문화를 영어로는 표현할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분석이다.

    본래 '촌탁'이라는 표현의 출전은 시경(詩經)이다. 시경 소아(小雅) 교언(巧言) 편에서 '교언(간신의 달콤한 말)을 달게 여기면 국왕을 병들게 하고 반란을 진전시킬 뿐'이라는 취지로 "남의 마음을 미리 알아서 헤아리니(촌탁, 他人有心予忖度之), 빠르고 교활한 토끼도 우직한 개를 만나 잡히고 만다(躍躍毚兎遇犬獲之)"는 말이 나온다.

    시경에서의 '촌탁'은 간신배의 교활한 마음을 미리 헤아려 깨달아 위정자가 부패하는 것을 막으라는 취지였는데, 우리나라와 일본에서는 완전히 정반대가 돼 '위정자의 마음을 지시하기도 전에 아랫사람이 미리 헤아려 조치하는 것'으로 뒤바뀌어버렸다. 이래서는 부패를 막기는 커녕 부패의 길을 열어젖히는 것이나 다름없다는 지적이다.

    문재인 대통령도 더불어민주당의 대선후보 시절이었던 지난달 19일 열린 TV토론에서는 "(북한이 우리의 주적이라는) 그런 규정은 대통령으로서 할 일은 아니다"라면서도 "국방부는 (북한을 주적이라) 할 일"이라고 말했다.

    정치권 관계자는 "대통령도 국방부는 북한을 주적이라 여겨야 한다고 했는데, 정작 국방부는 정권이 바뀌자마자 알아서 기면서 대응 방침에 관한 용어 사용부터 바꾸고 있다"며 "알아서 기는 '촌탁' 행각이 계속되면 새로 출범한 정부도 '제왕적 대통령'의 덫에 빠지면서 실패의 길로 들어서는 것을 피하지 못할 것"이라고 우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