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을 외치는 그들은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된다"
  •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본지 인보길 회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본지 인보길 회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2016년 10월 말 '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 이후 시작된 촛불시위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횟수로는 13번째를 맞았다. '촛불시위'는 일부 언론들의 미화성 보도를 등에 업고, 전 국민의 목소리로 둔갑했다. 그 분위기는 지금도 여전하다.

    이들의 일방적 주장만 보도되면서 '촛불시위'에 반발하는 사람들이 하나둘씩 거리로 나섰다. 이들은 한 손에는 태극기를 쥐고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무효를 외쳤다. 때문에 '태극기 집회'라고 불렸다. 언론들도 '촛불시위'와 이들의 집회를 비교하기 시작했다.

    '보수 세력이 돈 주고 동원한 집회', '노인들만 있는 집회'라는 폄하도 난무했다. 하지만 20~30대 젊은 층의 '태극기 집회' 참석율이 점차 높아지면서 이러한 조롱은 사라졌다.

    지난 7일 '태극기 집회' 참가자 수는 경찰 추산 3만 7,000명으로, 같은 날 '촛불시위' 참가자 2만 4,000명을 뛰어넘었다. 이는 '태극기 집회'에 대한 재평가는 물론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정의를 되새기게 하는 계기가 됐다.

    지금의 '태극기 집회'가 있기까지 구심(求心)적 역할을 한 인물이 있다. 김영삼 정부 당시 국방부 장관과 국가안전기획부장을 지낸 권영해 前장관이다.

    권영해 前장관은 24일 '뉴데일리'와 만나 작금의 정세 진단과 현직에 있을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사실들을 풀어놨다.

  •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본지 인보길 회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본지 인보길 회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태극기 집회'의 원동력은 '애국심'

    권영해 前장관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다. 그는 '태극기 집회'를 시작하게 된 계기를 하나님의 소명이라고 말했다.

    1937년 경북 경주에서 태어난 권영해 前장관은 경주고를 졸업한 뒤 육군사관학교 15기로 입학했다. 이후 제6사단장, 올림픽 지원사령관을 역임하고 1988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군 안팎에서는 그가 '하나회' 출신이 아니어서 진급에서 불이익을 받았다는 평가도 많았다.

    권영해 前장관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인 것은 가족 내력이라고 한다. 부친은 일제 때 대구사범학교를 졸업한 뒤 교편을 잡으셨다고 한다. 일제치하에서 교편을 잡으면 '친일파'로 생각되기도 했는데 권영해 前장관의 부친은 독실한 기독교 신자여서 오히려 일제로부터 불이익을 받아 시골로 좌천되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가풍 덕분인지 권영해 前장관은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강조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내 나이(만 79세)를 봐라. 공직을 바라는 것은 단 한 번도 생각한 적이 없다"면서 "다만 평생 대한민국을 위해 살아왔고, 또 마지막에 이 몸을 불사를 수 있는 그때가 하나님의 소명이 끝나는 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2016년 말 최순실 사태를 기점으로) 국내 정세를 보니, '이대로 있다가는 나라가 망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면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를 생각했다. 이에 국방장관과 안기부장 때 경험을 바탕으로 작은 불씨(태극기)를 들고 나선 것"이라고 설명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태극기 집회' 시작 당시 지금처럼 사람들이 많이 모일 것이라고는 예상 못했다고 털어놨다. 신앙심과 관망하고 있을 수만은 없다는 의지만을 갖고 나섰던, 작은 움직임이 기적을 만들었다고 그는 풀이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탄핵을 반대하면서도 그 뜻을 밝히지 않는, 이른바 '샤이(shy) 촛불 반대파'의 결집에 주목했다.

    그는 "'수구 꼴통'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눈치만 보며 숨죽여왔던 사람들이 있다"면서 "이들은 어디 가서 하소연 할 때도 없었고, 자신의 생각을 당당하게 밝히지 못했다. 그러다 마침 누군가가 소리를 지르니까 '나 같은 생각을 가진 사람도 있구나'라며 집회를 찾은 것 같다"고 평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이들을 '애국자'로 부르면서 "(태극기 집회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든 것은 애국자들이 그만큼 많기 때문으로, 특히 애국가를 목청껏 부를 수 있는 환경이 조성돼 있기 때문인 것 같다"면서 "이러한 변화가 지속되면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민주주의 국가가 될 것이고,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본다"고 강조했다.

  • 지난 24일 서울 시청광장 태극기 텐트 촌을 찾은 권영해 前장관이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뉴데일리 기자
    ▲ 지난 24일 서울 시청광장 태극기 텐트 촌을 찾은 권영해 前장관이 이곳을 지키는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정상윤 뉴데일리 기자


    "애국운동을 본격화 했는데, 위기를 극복하고 대한민국 지키기를 어떻게 해야 하는 지에 대해서 총괄적으로 한 말씀 해달라"는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의 물음에 그는 이렇게 답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저는 대한민국을 지킨다는 일념으로 일생을 국방에 헌신하고 살았다. 선조들이 지켜준 나라를 발전시키는데 기여했다면, 내 삶이라는 것은 의미가 있는 것"이라면서 "때문에 대한민국이 위태롭다고 가만히 앉아만 있으면 안 된다"고 강조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그는 "2016년 12월 24일 덕수궁 앞 집회 때 오후 1시부터 9시까지 연단 위에 서 있었다"면서 "당시 (오랜 집회에 지쳤을 것으로 예상된) 참석자들에게 집회가 종료됐음을 알렸으나, 그들은 '대한민국'을 외치면서 현장을 떠나지 않았다. 감정이 벅차올라 나 역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말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그러던 와중 비치돼 있던 모금함에 한 참가자가 꼬깃꼬깃한 1,000원짜리 지폐를 넣고 갔다. 나는 그 손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잡아줬다. 그런데 매끈매끈한 손이 아닌 추위에 꽁꽁 언 거친 손이었다"면서 "갑자기 눈물이 났다. 흐르는 눈물을 (참가자들에게) 안보이려고 위를 봤는데, 프라자 호텔 건물 위, 휘황찬란한 불빛이 보이더라. 그때 '내가 이 사람들을 위해 남아있는 모든 목숨이 끝날 때까지 전심전력을 다해야 겠다'는 결단을 내렸다"고 밝혔다.

    권영해 前장관은 '태극기 집회'가 주목받자 이를 이용하려는 일부 세력이 있다고 경고하기도 했다. 그는 "(태극기 집회에) 애국자들이 다 모이니까, 무임승차해서 뭘 해보겠다고 덤벼드는 개인과 집단이 종종 있다. 행패를 부리는 사람들도 있다"면서 "어찌됐건 자고 있는 사람보다 늦게나마 잠에서 깬 사람들이 낫다고 보기 때문에 나는 그 사람들을 비난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집회 성격과는 다른 딴 짓을 하려 한다면 이는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자신의 투철한 애국심과 거대한 규모의 집회를 만든 추진력은 국방장관, 국가안전기획부장 경력에서 나왔다고 밝혔다. 

  •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열린 9차 '태극기 집회' 자료사진.ⓒ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 지난 14일 서울 종로구 혜화역 인근에서 열린 9차 '태극기 집회' 자료사진.ⓒ뉴데일리 이기륭 기자

    ◆"군 시절 비용 최소화도 애국의 일부"

    권영해 前장관은 '88서울 올림픽' 때 올림픽 지원 사령관을 맡았다. 그는 당시 일들을 설명하면서 "애국심은 작은 데서부터 시작된다"고 지적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사람들은 88서울 올림픽 때 육해공군 병력 1만 3,000명이 지원됐다는 사실을 잘 모를 것"이라면서 "이는 수많은 인력 수요가 있는데 민간자원봉사로만은 해결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권영해 前장관에 따르면, 당시 정부는 88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펼쳤다고 한다. 이 가운데 하나가 올림픽 지원사령부였다. 여기에는 의무지원, 통역, 기수단을 비롯한 의장대 등 다양한 병과의 병력들을 전군에서 차출했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육군 중장 진급을 앞두고, 다른 사람들은 군단장 등의 지휘관 자리를 노릴 때 자신은 올림픽 지원사령관이 '평생에 한 번 해볼까 말까한 일'이라고 생각해 흔쾌히 맡았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올림픽 지원에 동원되는 차량도 군에서 모두 해결했다"면서 "이 모든 것을 국가예산으로 충당했는데, 만약 민간 분야에서 필요한 품목을 확보했다면 올림픽에는 엄청난 비용을 쓸 수밖에 없다. 때문에 난 항상 '우리는 올림픽을 치르고 해산될 부대다, 국방예산을 최소화 할 수 있는 방향으로 일하자'고 부하들에게 강조했다"고 밝혔다.

    권영해 前장관은 올림픽 지원 사령부에서 쓰는 비용을 일단 줄이자고 마음먹고 유연성을 발휘했다고 한다. 그는 "당시 필요한 장비를 모두 새것으로 산다고 하니 아찔했다"면서 "이에 당장 육군본부로 가서 올림픽 지원 사령부가 끝나고 나면 장비들도 다 처분해야 한다, 그러면 다 낭비 아니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군 수뇌부에 "내년에 육군 또는 해군, 공군에 사야할 것을 미리 예산으로 사자. 그러면 재활용하면 되니 이중으로 비용이 안들 것"이라고 건의했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이때 혈세낭비를 줄이고자 집기 구입부터 중고로 했다고 한다. 이를 위해 주말이면 사복으로 갈아입고 부하들과 서울 사당동의 중고가구거리를 헤매고 다니기도 했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이 이처럼 애정을 쏟던 올림픽 지원사령부를 떠나게 된 계기는 전혀 엉뚱한 일 때문이었다고 한다. 1988년 6월 한·미 안보회의를 앞두고 한국 대표단 가운데 국방부 차관보급 자리가 공석이 됐다. 민태우 장군이 갑자기 충청북도 지사로 발령 났던 것이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한미 안보회의에 우리 측 파트너가 리처드 아미티지인가 그랬다"고 회상했다. 그랬다. 조지 W.부시 정부에서 美국무부 부장관을 지낸, 그 '아미티지'였다.

    당시 국방부는 빈 차관보 자리에 권영해 前장관이 제 격이라고 봤다고 한다. 하지만 장성급 인사라는 것이 그렇게 쉽게 할 수 있는 게 아니어서 박희도 당시 육군참모총장도 난감해 했다고 한다. 특히 올림픽 지원사령부의 역할이 문제였다.

    이에 권영해 前장관은 박희도 총장을 만나 "맡고 있는 올림픽 지원 사령관은 후임자가 오더라도 문제가 없는 상태이며, 갖춰진 틀에 맞게 임무만 지시하면 되는 상황"이라고 보고하고 "허락해주시면 새로운 자리에서 해보고 싶다"고 답했다고 한다. 그렇게 1988년 6월 한미 안보회의는 성공적으로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권영해 前장관은 이후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이 됐다. 그는 1988년 6월 육군 소장으로 전역했다. 정년이 2년 남은 상태인데다 당시 '하나회' 소속이 아니면 3성 장군 이상 진급이 불가능에 가까웠던 현실 때문이었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이 맡았던 국방부 기획관리실장은 대부분 육군 장성들이 차지했다. 이 때문에 해군과 공군으로부터는 '육방부'라는 비아냥도 많았다고 한다. 이에 대해 그는 "기획관리실장은 모든 것을 공평하게 다뤄야하는 자리이고, 또 해군, 공군의 불만도 간간히 들려왔다. 저는 국방을 위한 마지막 헌신이라고 생각하고 1988년 6월말 전역을 했다"고 설명했다.

    국방부에서도 이러한 권영해 前장관을 잊지 않았다. 권영해 前장관은 1990년 제25대 국방부 차관에 임명된다. 당시 국방부 역사 40년 동안 기획관리실장을 지낸 사람이 차관으로 임명된 것은 권영해 前장관이 처음이었다고 한다.

  •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본지 인보길 회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24일 서울 정동제일교회서 본지 인보길 회장과 대담을 나누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YS 시절, 국방부 차관에서 장관으로

    1993년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뒤 권영해 당시 국방차관은 국방부 장관에 임명된다. 인보길 뉴데일리 회장은 "국방장관에 임명된 후 '김영삼 대통령과 원래 관계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식의 보도가 있었다"면서 "관련해 이야기 할 게 있을 것 같다"고 지적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장관이 되고 나니까 별별 억측들이 난무했다"면서 당시 제기된 의혹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특히 당시 한 월간지가 "권영해와 김영삼은 교계 친구"라는 내용으로 보도한 것을 떠올렸다.

    권영해 前장관은 이 월간지의 보도를 '악랄한 엉터리'라면서 "김영삼 대통령과 나는 등산을 해본적도 없고 민주화 운동을 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해당 언론사는 아무리 퍼즐을 맞춰 봐도 맞는 게 없자, 내가 교회에 다닌다는 것을 걸고 넘어졌다"고 주장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보도는 국방장관은 기독교 장로이고, 또 부인은 김영삼 대통령이 다니던 충현교회로 예배를 드리러 다녔다"면서 "때문에 부인의 후광으로 장관이 됐다는 내용이었다"고 말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간 적도 없는 충현교회를 들먹이는 보도를 보고 '언론이라는 게 이렇구나'라는 생각을 했다"면서 "요새 나오는 태블릿 PC 보도와 같은 것을 그때 경험을 했다"고 덧붙였다.

    권영해 前장관은 1993년 '군부대 불상훼손 사건'에 대해서도 한 마디 했다. 당시 경기도 부평에 있던 육군 포병대대에서 불상 훼손사건이 발생했다. 그러자 정치권 등에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기독교 신자라는 점을 부각시키며 "타 종교 활동을 고의로 위축시켰다"는 주장이 나돌았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불상 훼손사건이 발생한 대대의) 전임 대대장이 불교신자였다. 그는 보급창고를 개조해 불당으로 만들었다. 반면 공교롭게도 신임 대대장은 기독교 신자였다. (신임 대대장은) 보급창고를 불당으로 만든 점을 지적하며 주임상사에게 원상복구를 지시했다"며 "그런데 해당 부사관이 불상을 마대자루에 넣어서 뒷동산에 버렸다. 당시 국회 국방위원회 원로였던 권익현 의원은 내게 '대통령도 장로, 장관도 장로이니 그렇게 되겠지'라며 뭐라고 하셨다"며 난감했던 상황을 설명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저는 '대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내가 어떻게 알겠냐'라는 생각도 들었지만 그래도 장관이니 내 책임이라고 여겼다"면서 "다만 '대통령, 국방부 장관이 교회 장로라고 해서 신앙생활도 드러내 놓고 못하는 이런 분위기가 과연 민주주의냐'라는 생각도 들었다"고 털어놨다.

    그는 또한 "한국에서 정치에 발을 담그면 신앙생활을 제대로 하기 어렵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며 웃었다. 실제 권영해 前장관이 재직하던 시절 김영삼 대통령이 군 교회에서 예배를 보다 여러 이유로 청와대로 목사를 초청해 예배를 보자 정치권과 언론 등이 강하게 비난한 적이 있었다.

     

  •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있는 故황장엽 前노동당 비서(왼쪽).ⓒ뉴데일리 DB
    ▲ 대한민국 만세를 외치고 있는 故황장엽 前노동당 비서(왼쪽).ⓒ뉴데일리 DB

    ◆ 황장엽 망명 성사시킨 안기부장

    권영해 前장관은 1994년 12월 제21대 국가안전기획부 부장에 임명됐다. 그가 부장을 맡았을 때 서울 남산과 동대문구 이문동 일대에 있던 안기부는 내곡동 신청사로 이전했다. 또한 안기부 내부에서도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었다.

    권영해 前장관이 안기부장으로 재임할 때 가장 큰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故황장엽 前노동당 비서의 귀순이었다. 이는 그가 안기부장 3년차일 때 이뤄졌다.

    권영해 前장관은 황장엽 망명 당시를 회상했다. 그는 "황장엽 씨가 러시아 세미나에서 발표를 했는데 북한 체제에 대한 비판이 조금 섞여있다는 해외 담당 부서의 보고를 받았다"면서 "당시에는 김일성 집권 시절 전폭적인 신뢰를 받던 황장엽 씨가 김정일 시대가 되면서 소외되니까 그런 것 아닌가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그런데 황장엽 씨가 일본에서 열린 세미나에서도 북한 체제를 비판하는 내용의 발표를 했다는 보고를 들었다"면서 "이에 황장엽 씨의 본심을 확인할 필요가 있겠다는 판단을 했다"고 밝혔다. 황장엽 씨가 "내가 말한 것의 근본은 인본주의인데 주체사상은 그게 아니다"라며 비판하는 목소리를 냈다는 것이다.

    권영해 前장관은 "정보요원을 통해 황장엽 씨와 선이 닿는 제3자를 확보했다. 그를 통해 확인한 결과 황장엽 씨가 김정일에 대해서 상당한 불만을 가지고 있다는 판단을 내릴 수 있었다"면서 "그러면 '그 체제 속에 계속 있을 것인지, 아니면 벗어날 것인지' 의자를 타진해 보라는 명령을 내렸다"고 밝혔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황장엽 씨는 '언젠가는 다른 명분으로 좌천될 것'이라고 육감적으로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면서 "그는 1997년에 필리핀을 거쳐서 왔는데 망명 의사 타진이 본격적으로 진행된 것은 1996년부터, 정확하게 말하면 1995년 말부터"라고 설명했다.

    "황장엽 씨에게 망명 의사를 타진을 한 사람이 북한 내 인물이었느냐"는 인보길 회장의 질문에 권영해 前장관은 "아니다. 중국에 와 있던 북한 사람, 김덕홍 씨가 그 역할을 했다"며 "김덕홍 씨는 당시 '조간무역' 책임자로 있어 우리 정보요원들과도 접촉이 가능했던 것"이라고 밝혔다.

    권영해 前장관은 황장엽 씨 망명 당시 경유지로 가장 좋은 제3국이 일본이었다고 밝혔다. 그는 "일본 총리하고 이야기가 다 됐었는데 이때도 한 월간지 기자가 특종이랍시고 보도할 준비를 하면서 보안이 깨졌다. (황장엽 씨 망명 공작을) 완전히 망칠뻔 했다"고 비판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물론 황장엽 씨가 묶던 호텔 내외부에 경호요원들이 깔려있어서 (망명 공작이) 어려웠던 점도 있었다"고 부연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결국 당초계획이 무산돼 '플랜 B(대체계획)'로 넘어갔다"면서 "황장엽 씨가 중국 베이징에 갈 때를 노렸다"고 밝혔다. "북한 쪽에서는 '중국은 우리 지역이다' 싶어 그랬는지 몰라도 경비가 허술했다. 때문에 황장엽 씨가 중국 호텔에서 나와서 택시를 타고 바로 한국 영사관으로 간 것"이라는 게 권영해 前장관의 설명이었다.

    "당시 김정일이 황장엽 씨 망명 낌새를 알아챌 만 했는데 왜 제거를 안했는지 궁금하다"는 인보길 회장의 질문에 권영해 前장관은 "아마 어떤 첩보는 들었겠지만, 가능성만을 염두에 두고 요주의 인물로만 여겼기 때문인 것 같다"고 답했다.

    권영해 前장관에 따르면 당시 북한은 중국에게 "포를 쏘겠다"는 등의 협박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국 측이 물밑 작업을 벌여 황장엽 씨 망명이 가능했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당시 후진타오 中국가 부주석이 김영삼 대통령하고 개인적으로 상당히 친분이 있었다"면서 "저는 저 나름대로 공안, 중국 정보기관, 후진타오 당시 中공산당 부주석과 인연이 있었다. 돌이켜 보면 중국이 남북 사이에서 어려운 결정을 한 것"이라고 평했다.

    이때 중국은 "황장엽 씨를 한국으로 바로 보낼 수는 없고 제3국으로 보내겠다"는 입장을 밝혔다고 한다. 권영해 前장관은 "제3국을 선택하는데 고민을 많이 했다"면서 "처음에는 호주를 목표로 작전을 추진했으나 거절당했다"면서 "미얀마를 생각하기도 했으나, 결국 필리핀을 선택하게 됐다"고 설명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필리핀 이야기를 하면서 외교 성과라는 것이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고 강조했다. 그는 "1993년 라모스 필리핀 대통령이 당선되고 나서 첫 번째 국빈 방문국으로 한국을 택했다"면서 "그는 중대장으로 6.25 전쟁에도 참전하는 등 한국과 인연이 많다"고 설명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라모스 대통령이 한국을 국빈방문을 한다고 하자 당시 정치권이나 외교부는 부정적이었다. 그러나 저는 김영삼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6.25 당시 필리핀이 참전국이었다는 점 등을 이유로 들어 국빈방문이 반드시 이뤄져야 한다고 강조했다"고 말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그러자 김영삼 대통령께서 '대부분 국빈 방문이 이뤄지면 저개발 국가를 대상으로 지원대책 같은 것을 발표하는데 우리는 무엇을 해야하나'고 물으셨고, 이에 필리핀이 한국으로부터 군사장비를 지원받고 싶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는 "당시 한국군에는 'M113'이라는 미국산 장갑차가 있었는데 단종되는 바람에 한국만 부속품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이를 지원하자고 건의했더니 O.K. 사인을 받을 수 있었다"고 밝혔다.

    당시 군수장비를 외국에 지원하기 위해서는 가격을 측정한 뒤 재무부(현 기획재정부)의 동의를 받아야 했다고 한다. 때문에 당시 정부는 M113 장갑차를 모두 100달러로 계산해 필리핀에 줬다고 한다. 라모스 대통령은 지금도 권영해 前장관을 만나면 "100 달러"를 외친다고.

    이 인연 덕분에 권영해 前장관은 황장엽 씨의 망명 경유지로 필리핀을 선택했다고 한다.

    그는 "아무리 검토 해봐도 라모스 대통령 밖에 안 떠올랐다"면서 "라모스 대통령에게 '황장엽 씨를 보낸다고 했을 때 받아주겠냐'고 물었더니 '한국이 어렵다는데 해줘야지'라는 답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후 당시 외교안보 수석이었던 반기문 前유엔 사무총장이 필리핀을 찾아 황장엽 씨 망명에 관한 김영삼 대통령의 친서를 라모스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필리핀을 경유해 황장엽 씨 망명공작을 성사시킨 뒤 권영해 前장관은 다시 필리핀 정부에 '보답'을 했다고 한다. 다름 아닌 통합사관학교 생도들을 위해 에어컨이 달린 버스 8대, 필리핀 정부가 소유한 골프장 수리비 등을 지원했다고 한다. 여기에 든 비용은 대략 50만 달러였다고.

    권영해 前장관은 "(황장엽 망명공작에서 보듯이) 평상시에 관계를 유지해 왔던 것이 얼마나 도움이 되는지 이때 뼈저리게 느꼈다"면서 "세상에 우연한 만남과 헛된 발걸음은 없다. 대한민국은 하나님이 돕고 계신다"고 말했다.

  • 대담 중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대담 중 권영해 前국방장관(왼쪽)이 눈물을 흘리고 있는 모습.ⓒ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DJ정권 그리고 할복

    권영해 前장관의 인생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선 후 바뀌었다. 그는 안기부장 당시 공직선거법을 위반했다는 혐의로 옥살이를 하게 된다. 몇 년 뒤 모두 혐의가 없음이 밝혀진 '오익제 천도교 교령 월북공작 사건'과 '북풍 사건'을 명령, 대선에 개입하려 했다는 혐의를 뒤집어 쓴 것이다.

    권영해 前장관은 "1997년 대선 당시 북한 측은 중국에 '선거공작팀'을 보내 DJ캠프 측 관계자와 계속 접촉했다"고 주장했다. 이 사실은 당시 안기부 협조자가 계속 파악해 알려왔는데, 그가 제3국에서 기자회견을 했음에도 한국 언론에는 단 한 줄의 기사도 실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 이후 대선은 잘 알려진 것처럼 김대중 대통령의 승리였다.

    권영해 前장관은 "1998년 2월 25일 김대중 대통령이 취임하고 다른 각료들은 다 바뀌었는데, 나만 3월 초까지 안기부장으로 남아있었다"면서 "내가 외국으로 도망갈까 봐 붙잡아 뒀던 것 같다"고 주장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이후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입건됐다. 당시 대선을 앞두고 시중에는 '또 색깔론이냐'면서 보수 세력들은 원래 저렇게 한다는 여론이 조성돼 있었다"고 밝혔다. 이때 권영해 前장관은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 할복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하게 된다.

    권영해 前장관은 "이미 죄인이라고 규정해 놓고, 여론 몰의로 형량까지 정하는 판에 (희망이 없었다). 결국 어떤 진술을 하던 간에 검찰이 끌고 가는 방향으로 가게 되는 것"이라며 "기독교 장로로서 자살은 하나님에 대한 용납할 수 없는 죄지만 국가 안보와 관련된 조직을 보호하는 것도 내가 해야 할 도리다, 천국에 못가는 한이 있더라도 이 땅에서의 책임을 다해야겠다는 다짐을 했었다"고 털어놨다.

    권영해 前장관은 "육군 사관학교에서 제일 처음 배우는 것이 '지휘관의 책임'이다. 그 부대가 성공해서 명예를 얻게 된 공도 지휘관 덕분, 실패도 지휘관 잘못이라는 것이다. 새로운 정권이 들어설 때 다음에 진행될 일이 뻔히 보이는데, 이것을 막지 못했던 내가 죽음으로서 속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권영해 前장관은 "국가가 필요로 해서 만든 정보기관이 공작을 펼친 것, 그 결과를 두고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 처벌하는 게 말이 되느냐"며 "차라리 정보기관을 없애라"고 울분을 토하기도 했다.

    그는 DJ정권 당시 겪은 고초를 설명하다 결국 가족에 대한 미안함으로 눈물을 흘렸다.

    권영해 前장관은 "31살에 결혼을 했는데 당시 집사람에게 '그런 경우는 없기를 바라지만 가족과 국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할 때가 되면 난 어쩔 수 없이 국가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면서 "이에 집사람이 '당신의 뜻이 그렇다면 감히 군인의 아내가 된 사람이 누가 그걸 거부할 수 있겠습니까'고 답했었다. 때문에 내가 죽더라도 우리 가족은 그때 당시 내가 했던 이야기를 기억할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연설 중인 권영해 前장관. ⓒ정상윤 뉴데일리 기자
    ▲ 태극기 집회에 참석해 연설 중인 권영해 前장관. ⓒ정상윤 뉴데일리 기자

    권영해 前장관은 서울 서초동 대검찰청에서 수사를 받다 할복한 뒤 인근 강남성모병원에서 8시간에 걸친 수술을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때 검찰은 가족들의 면회도 금지했다고 한다. 나중에 꽃동네의 오웅진 신부가 주선해 가족들과 만날 수 있었다고.

    이후 검찰은 권영해 前장관에게 징역 12년을 구형했다. 1998년 9월 1심에서는 징역 5년을 선고 받았다. 검찰은 그 사이 국가보안법상 특수직무유기 등의 혐의를 보태 4차례 더 기소했다. 하지만 권영해 前장관은 2003년 대법원 판결에서 무죄 선고를 확정받았다.

    ◆ 권영해 前장관 "총풍 여론몰이와 '최순실 특검'의 공통점"

    권영해 前장관은 현재 한국을 뒤흔들고 있는 '최순실 특검'의 모습이 과거 자신이 겪었던 '정보기관에 대한 여론몰이 재판'과 비슷하다고 평가했다.

    권영해 前장관은 "탄핵 정국이 시작됐을 때 저는 '이 모든 것이 최순실의 국정농단'이라고 주장하는 특검이 잘못됐고, 북한의 대남공작이 이렇게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구나 하고 봤다"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죽은 김일성·김정일이 내린 지령을 듣는 '망령들의 잔치'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권영해 前장관은 "죽은 김일성, 김정일이 생전에 대남공작에 대한 교시를 내렸는데, 이를 충실히 따르는 망령들이 활보하고 있다"면서 "정치권, 문화·예술까지 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최근 논란이 되는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관련해서도 권영해 前장관은 "김일성·김정일은 대남공작을 할 때 '춥고 배고픈 문화·예술인들의 창작물을 사주고 후원하라'고 했는데 그 결과 종북세력이 만든 영화와 책이 흥행에 성공하고 베스트셀러가 된 것"이라고 주장하며 "이를 그대로 방치, 시행되고 있는 것을 '표현의 자유' 때문에 정부가 막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이를 지원하는게 말이 되느냐"고 반문했다.

    독실한 기독교 신자에 군 장성, 정보기관 수장을 지낸 권영해 前장관은 현재 '촛불시위'에 대항해 열리는 '태극기 집회'를 애국심의 발로에서 나온 시민들의 행동이라고 평가했다. '태극기 집회'를 이끌어 가는 사람 가운데 그와 같은 사람들이 많다는 점을 떠올려 보면, 앞으로 집회 양상은 '태극기 집회'가 '촛불시위'를 압도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