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토와 코펜하겐을 거치면서 파국으로 치닫던 온실가스 국제공조반기문이 1년만에 미국·중국과 55개 국을 설득해 '기적'을 만들어냈다
  • 《반기문을 바로 본다》
    ① 반기문 10년의 업적, 국내외 평가는 극과 극… 왜?
    ② 반기문, 기후변화에 맞서 인류저항군을 이끌다
    ③ 반기문, 인도주의의 등불 든 10년의 임기
    ④ '기름장어' 비판에도… 반기문, 더 안전해진 세계
    ⑤ 시대를 넘어 세계를 조망한 반기문의 '넓은 눈'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사진)은 취임 이전부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문제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지명자 시절부터 이 문제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회담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일관해왔다. ⓒ칸(프랑스)=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사진)은 취임 이전부터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문제가 중요함을 인식하고, 지명자 시절부터 이 문제로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회담하는 등 적극적인 노력으로 일관해왔다. ⓒ칸(프랑스)=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MBC 인기예능 〈무한도전〉은 지난 2010년 12월 18일 〈나비효과〉 특집을 방송했다.

    아랫집 '몰디브 리조트'에 입실한 유재석·하하·노홍철이 에어컨을 틀면, 박명수·정준하·정형돈이 체크인한 윗집 '북극 얼음 호텔'에 연결된 실외기가 훈풍을 뿜어내면서 북극의 얼음이 녹고, 이 물이 배수관을 통해 다시 아랫집으로 쏟아지면서 몰디브가 물에 잠긴다는 설정이다.

    최초에 서로 "네 탓"이라며 고성이 오가던 상황은 물바다가 심각해지자 일변했다. 아랫집과 윗집은 핫라인을 통해 일시적으로 에어컨을 끄는 등 신사협정을 시도해봤지만 소용 없었다. 결국 몰디브는 완전히 물에 잠기고, 북극 얼음 호텔도 다 녹아서 무너져버렸다.

    유재석 등은 세트장 밖으로 탈출했지만, 실제에서는 인류가 지구 밖으로 탈출할 수는 없다. 〈무한도전〉은 "인류는 전환점을 넘겼지만, 아직 돌아오지 못할 지점을 넘어서지는 않았다"는 제임스 핸슨 NASA 수석기후학자의 말을 자막으로 삽입했다.

    이후 〈무한도전〉은 올해 다시 '북극곰의 눈물'을 다뤘지만, 시청자들은 이를 흥미로운 예능이나 다큐멘터리 이상으로 바라보지는 않은 듯하다.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이 10년의 임기를 마무리하고 있는 이 때에, 세계적으로 극찬의 대상이 되고 있는 '기후변화 대처' 업적에 대한 국내의 반응이 심드렁한 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기후변화는 핵전쟁·운석충돌보다도 현실성이 높은 인류 멸망 시나리오의 하나로, 지금 이 순간에도 전쟁보다 많은 인명 피해를 세계 곳곳에서 야기하고 있다.

    2003년 유럽에서 7만여 명의 목숨을 앗아갔던 이상 고온은 지난해 인도아 대륙을 강타했다. 인도에서 2500여 명이 일시에 일사병과 탈수증으로 숨졌고, 이웃나라인 파키스탄에서도 1300여 명이 사망했다.

    남의 일이 아니다. 우리나라도 기후변화로 여름 무더위가 맹렬해지면서 최근 10년간 폭염 사망자가 2000명을 돌파했다.

    우리나라에서는 퇴치된 것으로 여겨지던 열대성 법정전염병인 말라리아는 1994년 5명 발병을 시작으로, 2007년에는 2227명이 걸리는 등 걷잡을 수 없이 번지기 시작했다. 정부가 총력 대응했지만 지난해에서 699명이 발병해 그 기세는 수그러들지 않고 풍토병으로 토착화할 조짐마저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인류의 존속 자체를 위협하는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인류저항군'의 수장으로, 가장 혁혁한 전과를 올렸던 반기문 총장의 지난 10년간의 활약상은 의외로 국내에서 조명받지 못하고 있다. 설령 이를 접하더라도 무슨 의미인지 파악하지 못하거나, 그 중요성을 간과하기 일쑤다.

    반기문 총장이 유엔사무총장으로 취임했을 무렵, 인류는 기후변화와의 싸움에서 패색이 짙었다.

    1997년 12월 인류는 일본 교토에서 열린 제3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서 '교토 의정서'를 채택했다. '55-55'로 불리는 발효 조건은, 55개국이 비준하고 주요 선진국의 온실가스 배출 점유율이 55%에 달해야 발효되게끔 규정돼 있었다.

    그런데 2001년 미국이 탈퇴해 교토 의정서는 발효되기조차 전에 빈사상태에 빠졌다. 러시아를 끌여들여 2005년 2월 겨우 발효시켰으나, 세계 최대의 온실가스 배출국인 미국이 탈퇴한 상황에서는 의미가 없었다.

    반기문 총장은 유엔사무총장 지명자 신분이던 2006년 10월부터 조지 W 부시 미 대통령과 이 문제를 놓고 회담을 벌였다. 예나 지금이나 온실가스 감축에 회의적인 공화당 대통령을 상대로 반기문 총장은 설득에 총력을 기울였다.

    총장 취임 직후인 2007년 3월, 반기문 총장은 유엔총회에 견학을 와 기후변화 토론 컨퍼런스를 벌이던 국제학교 학생들에게 미래 세대를 위한 약속을 했다. 미래세대를 위해 인류가 "돌아오지 못할 지점"을 넘기지 않도록 하겠다는, 자신의 임기를 기후변화와의 전선(戰線)에서 승기를 잡는데 바치겠다는 엄숙한 선서와도 같았다.

    당시 60대였던 반기문 총장은 10대의 학생들에게 "우리 세대가 자라날 때는 냉전이 핵전쟁이 되면서 '핵겨울'이 도래하는 게 가장 큰 위협이고 걱정이었다"며 "지금은 기후변화가 전쟁보다도 심각한 위협"이라고 진단했다.

    그러면서 "유감스럽지만 우리 세대는 하나 뿐인 지구를 보살피는데 소홀했다"며 "지구온난화를 막기 위한 확실한 방안을 세워, 미래 세대에게 그 책임이 전가되지 않도록 하겠다"고 다짐했다.

  •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사진)은 유엔을 이끌어 기후변화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미국·중국과 세계 55개 국 이상을 설득하며 중요한 국제공조의 전기를 마련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칸(프랑스)=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 반기문 유엔사무총장(사진)은 유엔을 이끌어 기후변화와의 싸움에 전력을 기울였고, 마침내 미국·중국과 세계 55개 국 이상을 설득하며 중요한 국제공조의 전기를 마련해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칸(프랑스)=뉴데일리 정상윤 기자

    반기문 총장 임기 3년차이던 2009년, 인류는 덴마크 코펜하겐에서 제15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를 앞두고 있었다.

    협상의 진척을 우려하던 반기문 총장은 북극의 빙하가 녹아 무너지고 있는 현장을 직접 살핀 뒤, 고위급 회의에서 "우리는 가속페달을 밟으며 나락을 향해가고 있다"며 "금세기 말까지 해수면은 0.5m에서 2m까지 상승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는 2007년 유엔이 추정했던 해수면 상승 예상치(0.18m~0.59m)를 훨씬 뛰어넘는 수치였다. 당시 추정치에는 북극·그린란드의 빙하 녹는 속도가 가파르게 될 위험성을 미처 감안하지 못했었다.

    반기문 총장의 경고에도 불구하고 15차 총회는 파국을 맞이했다. 각국은 남탓으로 일관한 끝에 형식적인 합의문조차 채택하지 못하고 총회를 결렬시켰다.

    임기 후반기에 접어든 반기문 총장은 팔을 걷어부쳤다. 반기문 총장은 지난해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제21차 유엔기후변화협약 당사국총회에 주목했다. 교토 의정서가 채택된 3차 총회로부터 벌써 차수가 18차나 갱신됐다. 자신의 임기 중에 마지막으로 열릴 것이 분명한 이 총회에서 유의미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 기후변화와의 싸움은 인류의 패망으로 끝날 가능성이 높았다.

    반기문 총장은 파리 협정에 195개 국이 가담하도록 설득했다. 이 중 반기문 총장이 2015년 한 해에만 협정에 가담하도록 영향력을 행사한 나라는 무려 55개 국에 달했다.

    단순히 협정국 숫자만 늘린 것이 아니라, 세계에서 가장 많은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미국과 중국이 앞장서서 감축을 이끌게끔 하는데에도 세심한 배려를 했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에 대한 십수 차례의 설득과 회담을 통해, 반기문 총장은 미국이 2025년까지 2005년 대비 무려 26~28%의 온실가스를 감축하도록 이끌어냈다.

    이러한 성과에 우선 놀란 것은 15차 총회가 엉망이 되는 것을 주최국으로서 목도했던 덴마크였다.

    입 피터슨 덴마크 유엔대사는 지난 9월 개막한 제71회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자청했다. 피터슨 대사는 연설에서 "반기문 총장은 전지구적인 도전인 기후변화와 관련해 중요한 결정을 이끌어냈다"며 "교토, 코펜하겐을 거쳐 파리로 가는 여정 끝에 기후변화에 대응하기 위한 글로벌 협약을 이끌어냈다"고, 반기문 총장이 이끌어낸 '기적'에 경의를 표했다.

    세계적인 권위의 전문지 〈포린 폴리시〉는 더 나아가 반기문 총장을 올해의 세계 100대 사상가로 선정하기까지 했다. 〈포린 폴리시〉는 "지구온난화 대응에서는 시간이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며 "교토 의정서가 발효되기까지는 8년이 걸렸지만, 반기문 총장이 파리 협정을 이끌어내는데에는 채 1년이 걸리지 않았다"고 격찬했다.

    인류의 생존과 존속을 거침없이 위협하던 기후변화에 맞선 인류저항군의 수장 반기문 총장의 호쾌한 일격에 대해, 세계 각국 주요 인사는 극찬을 아끼지 않고 있다.

    빌 드 블라시오 뉴욕시장은 "반기문 총장은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에 대처할 수 있도록 글로벌 협력체제를 강화해냈다"고 평가했다. '전 세계 모든 국가가 직면한 가장 큰 위협'이란 말할 것도 없이 기후변화를 가리킨다.

    1981년, 1986년, 1990년 세 차례에 걸쳐 노르웨이의 수상을 지낸 명재상이자, 1998년부터 2003년까지는 세계보건기구(WHO)의 사무총장을 지낸 '국제인'이며 '세계시민' 그로 할렘 브룬틀란 전 노르웨이 총리는 반기문 총장이 이뤄낸 업적의 중요성을 간결하게 평가했다.

    브룬틀란 전 총리는 "반기문 총장은 기후변화의 중요성을 우선적으로 인식했다"며 "체계적으로 접근한 결과, 전 세계를 설득할 수 있었고 목표를 달성했다"고 높이 평가했다.

    이색적인 점은 노르웨이의 노동당 내각을 세 차례 조각(組閣)했던 브룬틀란 전 총리는 좌파(左派) 정치인으로 분류된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서 반기문 총장을 격찬했던 빌 드 블라시오 시장도 미국 민주당 당적의 정치인이다.

    해외에서는 이념적 좌우에 관계없이 반기문 총장이 기후변화와의 싸움에서 이뤄낸 기적적인 전과에 대해 경이롭게 평가한다. 환경 문제에 민감한 좌파가 오히려 더욱 이를 부각시키는 면이 강하다.

    정치권 관계자는 "정작 국내에서는 목전으로 다가온 대선을 염두에 둔 탓인지, 당리당략에 매몰된 편견에 사로잡혀 반기문 총장의 성과를 깎아내리기에 급급해 씁쓸하다"며 "기후변화와의 전선(戰線)에서는 그 어느 나라도 혼자서만 이탈할 수 없으며, 그것은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라고 꼬집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