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⑭ 미국의 총체적 협박...“내정간섭 말라” 외로운 투쟁

    펄펄 뛰는 美 "미군이 정부 장악, 이승만 구속” 비밀작업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비상계엄하의 전쟁수도 부산, 이승만은 지난 4~5월 전국 지방의회 선거를 앞두고
    자유분위기를 보장하기 위하여 해제하였던 전시 비상계엄령을 다시 내린 것이다. 
    하루 세끼 밥벌이에 바쁜 시민들이야 생활화된 계엄령인지라 새삼 불편할 것도 없는 전쟁국가,
    날벼락을 맞은 것은 국회와 국회의원들 뿐이다.
    아니 정작 직격탄을 맞은 곳은 송도에 있는 미국 대사관이었다.
     
    작년 봄부터 트루먼 정부가 한국전쟁 정책을 ‘휴전’으로 궤도수정하면서
    휴전을 반대하는 이승만 한국대통령에 대하여 본국 국무성의 지침에 따라
    1년 가까이 대책을 준비해 왔던 대사관은 비상계엄령과 국회의원 무더기 구속이라는
    돌발 사태를 당하자 ‘공등 탑이 무너지는’ 충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대사대리를 맡자마자 강타를 당한 라이트너는 계엄직전 본국에 가버린 무초 대사에게
    급전을 날린다. 무초한테 인계 받은 시나리오에는 ‘비상계엄령’은 없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같은 분단국 서독에서 근무하다가 전임된 라이트너는 그러나
    한국이나 아시아의 현지사정에는 깜깜한 유럽 우선주의 외교관,
    휴전을 성립시키려는 국무성의 인사배치를 엿보게 하는 라이트너 대사대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맞닥뜨리자 불끈 일어섰다.
  • 유엔 한국위원회가 이승만에게 강경성명 전달. 52.5.31일자 동아일보ⓒ동아DB
    ▲ 유엔 한국위원회가 이승만에게 강경성명 전달. 52.5.31일자 동아일보ⓒ동아DB

    ▶미국의 계엄해제 요구...이승만 “나보다 더 민주주의 근심하는 사람 없다”

그는 25일 계엄소리를 듣자 즉각 자리를 박차고 대사관을 나와 이승만에게 달려갔다.
뒷날 자신이 회고한 말처럼 ‘국무성 훈령을 받기도 전에’(even before I had instruction to do so) 대통령 관저의 문을 두드린 그는 이승만에게 인사도 하는둥 마는둥 계엄령 해제를 요구했다. 
“지금 우리는 자유와 민주주의를 지키려고 전쟁을 하는 마당”인데
대통령의 국회 압박은 ‘늙은 마녀 사냥’이라고 몰아붙였다. 
라이트너의 이 막말은 당시 미국이나 강대국의 한국 멸시를 보여준다. 
라이트너는 유엔 한국통일부흥위원단(언커크:UNCURK)을 만나
미국과 공동보조를 취할 것에 합의하고 참전국들 대표와도 같은 합의를 끌어내느라
분주하게 움직였다. 첫 작품은 유엔은 대표한 언커크의 압력이다.
  • 1951년 4월3일 미국 육-해군의 명예훈장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 왼쪽끝 프림솔 언커크 대표, 오른쪽 끝 무초 미국대사.(자료사진)
    ▲ 1951년 4월3일 미국 육-해군의 명예훈장을 받은 이승만 대통령 부부. 왼쪽끝 프림솔 언커크 대표, 오른쪽 끝 무초 미국대사.(자료사진)

    언커크는 28일 이승만을 직접 만나 계엄해제등 요구사항을 내놨으나 
  • 이승만은 “최소한 2주일내에는 계엄령을 해제 못한다”며 곧 회답을 주겠다고 이들을 보냈다. 
    언커크는 “우리는 유엔을 대표하여 헌법의 정치자유가 훼손되는 것을 원치않는다. 부산시의
    계엄령을 해제하고 구속중인 국회의원을 전원 석방하라”는 성명을 발표했다.

    나흘 뒤 발표한 이승만의 회답 요지는 다음과 같다.
    “나는 국회 내의 반대파를 대량 체포하여서까지 권력을 장악하려는 것이 아니다.
    단지 ‘평화협상’이라 속이며 적화통일을 획책하는 공산도당 반란을 진압하려는 것이다...
    (중략)....대한민국의 헌법을 침해한 것은 내가 아니요, 국회와 국회의원들이다.

    이 나라가 진실한 독립민주국가로 확립되는 것을 보려고 나보다 더 근심한 사람은 없다.
    이것은 내 평생을 통한 투쟁에 있어서 오로지 하나의 목적이다.
    나는 지금 유엔 여러분의 원조와 협조로써 수립되었고 방어되고 있는 대한민국에게
    광범한 민주적 기초를 수립해주려는 일에 나의 여생을 바치고 있는 것이다.“

  • ▲ "한국 민주국가 확립에 나보다 더 근심한 사람 없다" 이승만대통령, 유엔 한위의장에 답장. 52.6.4일자 조선일보1면ⓒ조선DB
    계엄 비방 ‘미국의 소리’ 방송 중단조치...대미투쟁 본격화

    이때 한-미간의 갈등을 상징하는 사건이 일어난다.
    중앙방송(현 KBS전신)에서 계엄선포를 뒤집는 방송이 터져나온 것,
    국회의원들을 구속하면서 ‘국제 공산당사건 비밀자금 연루자’라는 정부 발표를
    몇차례 방송하였는데 이를 비방하는 ‘미국의 소리’ 뉴스가 27일 국영방송에서 나오는게 아닌가. 정부는 즉각 유엔군사령부에 항의하고 유엔군사령부도 조사에 들어갔다. 
    알고보니 중앙방송국에 파견된 미군 하사가 제멋대로 아나운서에게 원고를 넘긴 것. 
    이승만은 주저없이 ‘미국의 소리’ 한국어 방송 중계를 중단해버렸다.
    정부 대변인은 “한국에 와 있는 유엔기관이 한국의 내정에 간섭하는 것은 월권이요,
    앞으로도 이런 행위를 계속하면 국외로 추방하는 것도 불가피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미국의 소리’ 방송에 이은 언커크의 계엄개입 성명을 내정간섭으로 겨냥한 이 강경 발표가
    이승만의 지침을 따랐음은 물론이다.
    ‘미국의 소리’ 방송중단 사건은 미국대사관이 펄펄 뛰고 한국정부가 완강히 버티는
    국가대 국가의 자존심 싸움으로 확대되었다.
     ‘원상회복이 안 되면 단교불사’까지 공갈하는 미국 측에 대하여
     이승만은 들은 척도 않고 무시하였고 정부도 보조를 같이 하였다. 
    보름쯤 지난 후 미국이 ‘한국대통령 교체’ 방침에 타협 신호를 보내오자 
    그때서야 이승만은 ‘반복불가’의 양해각서를 받고 ‘미국의 소리’ 방송을 열어 주었다.

  • '미국의 소리' 방송 사고에 미국측에서 '내정간섭' 사과문 전달. 52.5.31일자 조선일보ⓒ조선DB
    ▲ '미국의 소리' 방송 사고에 미국측에서 '내정간섭' 사과문 전달. 52.5.31일자 조선일보ⓒ조선DB

    밴플리트, 이승만을 ‘아버지처럼’...쿠데타 음모설 이종찬 총장 경질

    같은 날 27일 밴 플리트(Van Fleet) 8군사령관이 부산에 내려와 이승만을 찾았다. 
    강경파 외교관 라이트너를 동반한 밴플리트가 이승만에게
    “계엄선포에 사전협의가 없어 저도 실망했고 미국 정부도 실망했다”고 말했다.
    이승만은 계엄선포 이유를 반복 설명하면서 최소한 2주일은 걸릴 것이라도 말했다.
    “부산지역을 포함시킨 것은 모두에게 인기 없는 조치인줄 알지만 불가피했던 것이오.
    장군이 원한다면 빨리 해제해도 좋소” 이승만은 맞장구를 치기도 하였다.
    그러면서 이승만은 다음과 같이 국회를 비난하였다고 라이트너는 본국에 보고한다. 

    “일단의 깡패들이 우리의 적에게 매수 되어 국회를 장악한 다음
    자기들 대통령을 뽑겠다는 음모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나는 내가 대통령 이 되기 위해서 이 자들을 체포한다는 비난을 무릅쓰고라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결단을 내려야 했소. 이자들은 반역자들이오.
    한국의 장래가 걸려있는 중대 문제임을 장군도 아실 거요.
    저 몇몇 국회의원들이 아니라 내가 한국과 민주주의의 챔피언이란 사실을 기억해 두시오.”  
    '적과 내통한 국회'라고 말했지만 이승만의 내심은 '미국과 내통한 국회‘라는 말이다.  
    국회가 5월25일쯤 ’장면 대통령‘을 선출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보고 받은 이승만이
    선제공세로 비상계엄령을 내려 국회를 봉쇄한 것이다.

    “육군 참모총장을 갈아야겠소. 이종찬이 나를 반대하는 음모에 가담했다는 소문 알지요?”
    이승만은 밴플리트를 정면으로 쏘아보았다. 밴플리트가 모를 수 없는 쿠데타 음모.
    계엄령 선포전 원용덕의 2개중대로는 병력이 모자라 신태영 국방장관이 이종찬 총장에게
    2개대대를 보내라 지시하였으나 이종찬은 ‘군은 정치개입 안한다”는 명분으로 거부하였다.
    육군참모총장이 국군통수권자에게 누구를 믿고 정면 도전장을 내밀 수 있겠는가.

    벌써부터 경찰과 특무대를 통해서 이승만은 그 정보를 파악하고 있었다.
    '육본내 흥사단 인맥(평안도)이 평안도 출신 장면 측과 결탁, 미군과 손을 잡고 반역을 꾀한다'는 정보는 지난해 후반부터 들려오던 것, 밴플리트를 떠볼겸 견제할겸 던진 협상카드랄까.
    . 이승만을 아버지처럼 존경한다는 밴 플리트는 진퇴양난에 고심한다.
    한국국회와 미국대사관, 한국군내의 움직임을 알고 있는 미8군 사령관의 묘한 입장,
    전쟁은 유엔군에 맡겨놓고 제멋대로인 한국의 정치실상이 남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백선엽 장군이 어떨까요?” 잠시 이의를 제기하며 말을 돌리던 밴플리트는
    육군참모총장의 후임까지 천거하며 이승만 편에 서고 말았다. 
    그는 이승만을 ’장성보다 뛰어난 전략가‘로 평가하던 당시 미군장성들 가운데 하나다.
    특유의 환한 미소로 이승만은 밴플리트와 굳게 악수하였다.
    ‘미군이 이종찬을 앞세워 섣부른 짓을 하지 말라’는 자신의 경고가 이것으로 성공한 셈.
    역시 반공통일론의 동지이며 아들처럼 마음이 통하는 밴플리트 아니던가.
    이승만은 그러나 그 즉시 이종찬 참모총장을 바꾸지 않았고
    개헌파동이 끝난 다음달 7월22일에서야 백선엽 장군으로 교체한다.  
  • 현재 대학로 소재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주둔했던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부. 오른쪽 밴플리트 사령관, 왼쪽끝 백선엽 장군.(자료사진)
    ▲ 현재 대학로 소재 서울대 문리대 캠퍼스에 주둔했던 미8군 사령부를 방문한 이승만대통령 부부. 오른쪽 밴플리트 사령관, 왼쪽끝 백선엽 장군.(자료사진)
    이종찬의 쿠데타 음모=1952년 이종찬(李鍾贊:1916~1983, 창원 출생)의 쿠데타 음모설은
    그 윤곽이 무초와 라이트너의 회고담이나, 장면 총리 비서실장 선우종원의 회고록과, 
    월간 조선(1988년 6월호) 등에서 드러나 있으며, 한국전쟁과 한미관계를 분석한 연구자들의
    책과 논문에도 등장하고 있다. 라이트너 대리대사의 증언만 인용해보자.

    “어느 날 밤 늦게 한국 육군참모총장 지프가 대사관 구내 나의 관사로 찾아왔다.
    그는 다른 참모들의 의견도 같다면서 이승만과 내무장관(이범석), 계엄사령관(원용덕)을
    피 흘리지 않고 연금한 뒤에 구속의원들을 석방시켜 다음 대통령을 국회에서 선출할 수 있다고
    장담하였다. 그는 누가 대통령이 되든지 상관없고 정권에도 무관심하다고 강조하면서
    미국의 사전승인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나는 곧바로 워싱턴에 보고하였다.”

    월간조선은 ‘이승만 대통령 제거계획: 52년 6월초의 육본 심야회의’라는 제목으로
    이종찬등 군인들의 쿠데타 계획과 미국 정부의 이승만 제거 공작을 함께 특집으로 보도하였다.
    선우종원은 육본 작전교육국장 이용문(李龍文:1916~1953, 평양출생)이 찾아와
    이승만을 측츨할 쿠데타를 제의한 일이 있다고 회고록에 썼는데 계엄령선포 이전의 일이다. 그때 이용문은 ‘미8군의 양해도 받았고 이승만은 없애야한다’고 말했다는 주장도 있다. 
    육군내 평안도 흥사단 인맥의 중심인물이 이용문이오, 장면의 측근 선우종원도 평안도 출신.
    이들이 언제부터 미국 측과 어울렸는지는 시기를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지난 2월 한국을 다녀간 미국무성 극동담당 차관보 존슨(Alex Johnson)이 남긴 기록이
    어렴풋이나마 그간의 사정을 짐작하는데 참고가 될 듯 싶다.
    “휴전협상에 대한 이승만의 반대가 너무 교활하고 열광적이기 때문에
    그가 앞으로 무슨 짓을 할지 모르겠다. 한국 국회의 개헌안 처리를 비롯하여
    대통령 선출 문제 등을 다루는데 있어서 이승만은 정말로 ‘귀찮은 늙은이’다.”
    존슨은 이때 이미 미국의 성급한 군관들이 이승만을 제거하고 한국 정부를 인수하는 방안을
    고려하기에 이르렀다고 밝히고 있다. 
  •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과 동지들.(자료사진)
    ▲ 5.16쿠데타 당시 박정희 소장과 동지들.(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