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순실 이슈'에 매몰된 언론, 사실 확인 없이 '낚시성 오보' 남발
  • 누군가 우리 언론을 가리켜 '하이에나 언론'이라고 말한 것을 본 적이 있다. 사자가 먹다 남긴 죽은 고기에 수십 마리의 하이에나가 달려드는 것처럼, 우리 언론도 한 번 약점이 잡힌 대상을 집요하고 물고 늘어진다는 뜻에서 붙인 별명일 것이다.

    모든 언론이 하이에나 같진 않겠지만, 적어도 많은 언론사들이 하이에나와 다를 바 없는 행동을 보이고 있다. 상대방의 힘이 강할 때엔 슬슬 눈치를 보다가도 상대방이 발을 헛디뎌 넘어지기라도 하면 벌떼처럼 달려들어 숨통을 끊어놓는 언론사들이 어디 한 둘인가?

    최근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다루는 대다수의 국내 언론은 이같은 하이에나성 광기(狂氣)에 휩싸인 모습이다. 게이트 키핑은 사라진지 오래. 일단 '최순실 가계'와 관련된 새로운 내용이 불거지면 무조건 보도하고 보자는 식이다. 해당 사안을 다룬 방송 시청률과 조회수가 워낙 높다보니, 뉴스 벨류가 떨어지는 사안들도 '단독' 혹은 '속보'라는 타이틀로 신문·방송사 헤드라인을 장식하는 이변이 속출하고 있다.



  • 시시한 가십이 '특종'으로 둔갑


    YTN은 지난달 31일 오후 "검찰에 출두한 최순실이 저녁 메뉴로 곰탕을 시켜먹었다"는 내용을 버젓이 '뉴스속보'로 내보냈다. 붉은색 타이틀 박스에 입력된 기사 제목은 '최순실, 저녁 메뉴로 곰탕 거의 다비워'였다.

    ◆ [속보] "최순실, 곰탕 깨끗이 비워" = 같은 시각, 여타 방송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들은 검찰 분위기를 실시간으로 타전하며 "최순실이 주문한 메뉴가 곰탕이었고, 식사 후 잘먹었다는 인사까지 했다"는 시시콜콜한 내용을 비중있게 다루는 촌극을 연출했다.

    특히 포털사이트 검색 순위에 '곰탕'이 최상단을 차지하면서 각종 온라인매체들도 '최순실이 배달된 곰탕을 모두 비웠다'는 얘기에 근거도 없는 '암호설'을 덧붙인, 듣도 보도 못한 기사들을 양산하기 시작했다.

    어떤 매체는 "최순실이 알고보니 곰탕 마니아였다"며 "유럽 도피 때에도 '사골곰탕' 간편식 2개를 먹은 정황이 포착됐다"는 사실을 보도하기도 했다.

    ◆ "오늘의 특종! 악마는 프라다를 신는다?"
    = 이날 최순실이 검찰에 출두하는 과정에서 '구두 한 짝'이 벗겨진 것도 화제로 떠올랐다.

    최순실이 취재진과 시민들에게 밀려 청사 출입문 앞에 넘어지면서 신고 있던 '명품 구두'가 벗겨지자, 카메라 기자들이 일제히 셔터를 눌러댔다.

    이 사진은 곧장 포털사이트 뉴스면 메인을 장식했고, 실시간 인기 키워드까지 오르는 기염(?)을 토했다.

    일각에선 "길바닥에 덩그러니 놓인 신발 한 짝이 비선실세의 참담한 말로를 상징하는 것 같다"며 나름의 의미를 부여하기도 했지만, 정작 이 구두가 P사의 S제품이라는 사실이 알려진 뒤부턴 '모델명 3XXXXX'을 홍보하는 온라인 광고가 난무하는 등 엉뚱하게도 '노이즈 마케팅'에 이용되는 결과를 초래해 씁쓸함을 더했다.

    ◆ "대통령 옷값, 최순실이 지불" = 별 시덥지 않은 기사를 전면에 내세우기는 '1등 신문' 조선일보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일보는 지난달 26일 "TV조선 단독보도"라며 "박근혜 대통령 옷값이 최씨 지갑에서 나왔다"는 얘기를 대문짝만하게 보도했다.

    조선일보는 "최순실씨가 서울 강남 신사동의 '샘플실'에서 자신의 지갑을 꺼내, 오만 원짜리 지폐를 여러장 꺼내 탁자 위에 놓는 장면이 포착됐다"며 "이곳이 박 대통령의 의상만을 제작하고 수선하는 장소라는 점을 볼 때 (최씨가)박 대통령의 옷 제작비를 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해당 기사 어디에도 최순실이 건넨 돈의 '출처'와 '용처'가 무엇인지 나와 있지 않았지만, 조선일보는 '최순실이 대통령의 옷값까지 대신 지불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제기하며 "이 돈의 출처가 청와대 예산이든, 최씨 개인 지갑이든 그 파장은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는 사견을 달았다.

    ◆ "대통령과 최태민이 한 방에서‥"
    = 뉴스의 가치도 없을 뿐더러, 사실관계조차 확인되지 않은 사안을 놓고 "파장이 만만치 않을 것"이라는 아전인수격 전망을 내놓은 조선일보는 31일엔 (TV조선을 통해) "과거 박근혜 대통령과 최태민이 한 방에 들어가면 하루 종일 안 나왔다"는 전기영 목사(충남 서산 충성교회)의 황당무계한 주장을 그대로 전재하는 무리수까지 뒀다.

    최태민과 20여 년간 교류했다고 알려진 전 목사의 일방적인 주장 외엔 그 어떠한 근거나 목격자도 없는 내용이었지만, TV조선은 이를 전혀 가감하지 않고 내보내 '섣부른 루머'가 퍼져나갈 수 있는 빌미를 제공하고 말았다.



  • 끝없는 '오보' 퍼레이드..대체 언제까지?


    자극적인 '낚시성 보도'도 문제지만, 최근 들어 심각한 '오보'를 내보냈음에도 불구, 정정보도 등 아무런 후속 조치도 하지 않는 언론사들이 늘고 있어 문제의 심각성을 더하고 있다.

    ◆ "최순실 숨겨둔 아들, 청와대서 근무"
    = 지난달 29일 시사저널은 "최순실의 아들이 청와대에서 근무했다는 의혹이 새롭게 제기됐다"며 "최씨가 첫 번째 남편과의 결혼 생활 중 낳은 아들 김 모씨가 박근혜 정부 들어 청와대 총무 구매팀에서 최소 2014년 말까지 5급 행정관으로 근무했고, 현재는 그만둔 상태"라고 보도했다.

    시사저널은 보도의 신뢰도를 높이기 위해 청와대 내부 사정에 밝은 한 인사의 말을 인용, "현 정부 출범 후 청와대 총무구매팀에 최순실 씨와 전 남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근무했던 것으로 안다. 30대 중반으로 직급은 5급 행정관이었던 것으로 기억한다"고 전했다.

    또한 시사저널은 "최씨와 가깝게 지냈던 지인들을 통해서도 최씨가 정유라씨 이외에도 전남편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있다는 얘기를 접할 수 있었다"며 최씨의 지인이 '전남편한테 아들이 있다'고 말했다는 사실을 전하기도 했다.

    이후 조선일보와 한겨레 등 수많은 매체들이 해당 기사를 인용보도하면서 "최순실에게 숨겨진 아들이 있었다"는 루머는 삽시간에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그러나 검찰 조사 결과 이같은 루머는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최순실을 조사 중인 검찰 관계자는 "재적 등본 등 관련 서류를 모두 살펴봤지만 아들이 없는 것으로 확인됐다"며 "최씨 아들이 청와대에서 근무했다는 얘기도 사실이 아닌 것으로 간주된다"고 밝혔다.

    최순실도 검찰 진술 조사에서 "아들이 없다"고 진술한 것으로 전해졌다. 당사자가 사실 관계를 부인하고, 검찰에서조차 "사실이 아닌 것으로 확인됐다"는 소견을 밝혔음에도 불구, 아직까지 (일부 매체를 제외하곤)상당수의 매체들이 해당 기사를 내리지 않고 있는 모습이다.

    ◆ "대통령과 최순득은 성심여고 동기동창"
    = 조선일보는 지난달 31일 "최순실의 친언니 최순득이 박근혜 대통령과 성심여고 8회 동기동창 사이"라고 보도해 눈길을 끌었다.

    앞서 최순실을 '비선실세'로 지목했던 조선일보는 불과 며칠 만에 "동생인 최순실은 언니에 비하면 시키는대로 움직이는 '현장 반장'에 불과했다"며 "박근혜 정부의 숨어 있는 진짜 실세는 동기동창인 최순득"이라는 새로운 의혹을 제기했다.

    조선일보는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대표 시절인 2006년 괴한에게 습격당했을 때 최순득 씨 집에 일주일간 머물 정도로 두 사람이 돈독한 사이"라고 밝힌 뒤 "어느날 식사 도중 최순득씨가 'OO방송국 국장을 갈아치워야 한다' 'PD는 OO로 넣어야 된다'고 말하자 최순실씨가 밖으로 나가 (어딘가로 통화를 한 뒤)한참 뒤에 돌아오기도 했다"는 한 지인의 전언을 덧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것도 오보였다. 성심여고는 같은날 "성심여고 8회 졸업생(1970년도 졸업) 중에 최순득이라는 사람은 없었다"면서 "혹시 당사자가 개명을 했을지도 몰라 8회 졸업생 중 최씨 성을 가진 학생들을 전수 조사했으나 최순득으로 추정되는 사람은 없었다"고 밝혔다.

    성심여고 측은 "해당 보도로 인해 동창회 회원들로부터 엄청난 항의 전화를 받고 있다"면서 "조만간 오보를 낸 언론사를 상대로 정정보도를 요청할 방침"이라고 전했다.

    ◆ "최순실 입국때 검찰 수사관 있었다"
    = 경향신문이 지난달 30일 온라인판 기사를 통해 보도한 "최순실 검찰 동행 입국설"도 오보인 것으로 드러났다.

    경향신문은 인천공항 관계자의 말을 인용해 "최순실씨가 오전 7시37분 영국항공을 타고 인천공항에 도착하기 전부터 탑승동에 검찰 수사관 10~20명 가량이 나와 있었다"며 "최씨가 내린 뒤 검찰 직원 5~6명이 최씨를 데리고 나갔다"고 보도했다. 사실상 검찰이 최순실의 입국을 사전조율한 게 아니냐는 의혹을 제기한 것.

    그러나 검찰 관계자는 "최순실이 공항에 입국할 때 검찰 수사관이 미리 나와 동행했다는 기사는 검찰에 확인하지도 않고 내보낸 오보"라며 "사실 무근"이라고 밝혔다.

    ◆ "트럼프가 박근혜-최순실 조롱 연설" = YTN은 1일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인 도널드 트럼프가 지난달 29일 한 유세 현장에서 "여성 대통령의 끝을 보려면 한국의 여성 대통령을 보라"는 발언을 했다고 보도해 파문을 일으켰다.

    현재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대선 후보에게 밀리고 있는 트럼프 후보가 열세를 만회하기 위해 작금의 한국 상황에 빗댄 '여성 대통령 불가론'을 설파하고 나섰다는 것.

    공신력이 높은 YTN이 이같은 사실을 타전하자, A사 등 다수의 언론은 "도널드 트럼프가 '최순실 사태'를 거론하며 여성인 힐러리가 당선되면 안된다는 식의 논리를 폈다"고 재인용했다.

    그러나 확인 결과, 이같은 내용은 전혀 사실이 아니었다. 트럼프는 이날 어떤 유세 현장에서도 한국의 상황에 빗대 힐러리를 깎아내리는 발언을 한 사실이 없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오보의 '단초'는 한 국내 네티즌이 제공했다. 한 네티즌은 1일 오후 자신의 페이스북 페이지에 "그냥 별 생각없이 웃자로 만든 짤이었는데, 졸지에 야당 국회의원과 방송사를 낚아버렸다"고 실토했다. 결국 한 네티즌이 장난삼아 올린 페이스북 게시물을 YTN 취재진이 발견하고 해당 내용에 대한 아무런 검증절차도 없이 곧바로 기사화하면서 이런 '오보 사태'가 빚어진 것으로 밝혀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