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머물기 싫다"는 장면에게 "전쟁 무서워서..." 수근수근
  • [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⑨ 임시수도 부산...피난국회 세비 인상...맥아더 해임

    “트루먼 그 사람 안돼”...이승만 ‘승리 아니면 죽음’ 선언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 임시수도 기념관. 일제때 지은 경남도지사 관사.(자료사진)
    ▲ 임시수도 기념관. 일제때 지은 경남도지사 관사.(자료사진)
1951년 1월, 새해를 맞은 전쟁은 3살 되는 신생국 대한민국을 바다로 밀어넣으려나.
경남 도지사 관사(현재 임시수도기념관)에 석달만에 다시 들어선 피난국가 대통령 이승만은
엄동의 강풍에 부서지는 부산 앞바다 사나운 물결을 바라보며 냉혹한 강대국들의 이기주의를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전술전략에 머리를 싸맨다.
약소국의 설움, 막강한 16개국의 전력을 갖고도 거의 점령한 북한 땅을 중공군에 넘겨주려는 듯 일방 후퇴하는 미국과 영국의 술수 앞에서 이대로 대한민국이 물러설 수는 없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서울을 되찾고 압록강을 되찾아 이번엔 반드시 남북통일을 이루고야 말리라.
밀어붙이자. 유엔군이 못 싸운다면 우리 국군이 싸워야지, 무기...무기를 달라.
하루를 꼬박 새운 이승만은 1월5일 부산 충무동시장 광장에서 “1백만 청년을 무장시켜라”  
국민총궐기대회를 열었다. 가계각층 시민들과 애국청년단체들이 총출동, 유엔총회와 맥아더 장군에게 보내는 멸공 선서문을 낭독하고 한국청년을 무장시킬 무기와 장비를 요청하는 메시지를
보내기로 결의하였다. 이와 벌도로 이승만은 동경의 맥아더와 트루먼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
“제발 한국군을 무장시켜 달라”고 호소하였다. 몇 번째 편지인지 모른다.
다음 주엔 “인해전술엔 인해전술로” 국민 모두 죽을 각오로 싸우자는 격문을 발표했다.
미국이 무기를 안주면 죽창이나 부엌칼이라도 들고 나서서 남들은 후퇴하더라도
우리가 중공 오랑캐를 무찌르자고 정신무장을 거듭거듭 강조하였다.
그 다음 주엔 경남중학교 운동장에서 ‘여성 총궐기대회’를 열어 피난 나온 여성단체들까지 참가, 결의문을 맥아더와 유엔에 보냈다.

▶ 거대한 빈민촌으로 변한 부산...전후방 전쟁에 ‘사면초가’

아름다운 남북 3천리 금수강산은 공산군과 유엔군의 포격전에 황무지로 변해간다. 
북한에서 피난 내려온 동포들만 5백만이 넘었다고 한다. 도시 55개중 52개가 파괴었다는
국방부장관의 보고, 그 도시들은 나날이 인구가 급증하고, 특히 부산 경남지역엔 한꺼번에 몰린 피난민 숫자가 200만이 넘는다고 보고한 양성봉 경남지사의 걱정이 태산 같다.
자고 나면 생기는 천막촌이 산을 덮어버린 부산, 한 천막에서 몇 가족이 사는지 실태조사는
엄두도 못내고, 물이 잘 안나오는 공동수도엔 식수 때문에 하루종일 아귀다툼이 벌어지고,
거리마다 걸인 아닌 걸인들이 넘쳐나는 피난 수도. 인구 40만의 부산항은 어느새 180만명의
거대한 빈민촌으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죽느냐 사느냐...끼니를 찾아 헤매는 국민들의 행렬이
전선의 전투보다 덜할 것도 없이 비참한 생존전쟁, 산간지역과 대도시에 출몰하는 공비들과
간첩을 잡아내는 후방전쟁, 사면초가에 허덕이는 대통령 이승만도 전선으로 시장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뛰어다닌다.
  • 지독히 검소한 주부 프란체스카 여사. 사진은 노년에 옷을 기워입는 모습.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서 평소 양말과 내의까지 몇번이고 기워주는 아내에게 불평하기도 했다.(자료사진)
    ▲ 지독히 검소한 주부 프란체스카 여사. 사진은 노년에 옷을 기워입는 모습. 이승만 대통령은 경무대서 평소 양말과 내의까지 몇번이고 기워주는 아내에게 불평하기도 했다.(자료사진)

  • ★프란체스카 여사는 손발이 자꾸 붓고 가렵고 아파온다. 결국 동상에 걸려버린 것이다.
    일제때 지은 관사는 지난 여름엔 그런대로 지냈지만 이번 겨울은 영하10도를 오르내리는 추위에 난로를 피울 엄두도 내지 못한다. 목욕탕도 없어 목욕이란 단어를 입밖에 내는 것조차 사치스러운 나날, 전기도 정전이 잦아 촛불이나 등불을 켜야 하고 낮에도 담요를 뒤집어 쓰고 대통령이 주는 수많은 자료와 외국에 보낼 편지들을 서둘러 타이핑해야 한다. 모두 시간이 급한 것들이다.
    이승만이 동상 치료법이라며 마늘껍질과 대를 삶을 물에 손발을 담그라 해서 따뜻한 물에 담갔다 꺼내면 그때 뿐이다. 남편 역시 집무실에서 담요를 칭칭 감고 앉아 일본과 미국에 보낼 극비 편지 초안들을 몇 개씩 만드는 걸 보는 프란체스카는 아무거나 잘 먹고 피로의 기색을 안보이는 76세 남편 건강이 놀랍고 그나마 다행스럽기 그지없다. 
    “우리는 죄인”이라며 “앙치질도 이틀에 한번”이라고 못 박는 이승만, 절약이라면 몸에 배인
    유럽 중산층 청교도출신 프란체스카, 독립운동 시절은 물론 전쟁중에도 고난을 견디고 이겨내는 두 사람의 부창부수(夫唱婦隨)는 찰떡궁합이라고나 해야 할까.

  • 부산 피난국회가 세비 인상안을 통과시킨 것을 비판한 기사. 51년 1월23일자 동아일보 2면.ⓒ동아DB
    ▲ 부산 피난국회가 세비 인상안을 통과시킨 것을 비판한 기사. 51년 1월23일자 동아일보 2면.ⓒ동아DB

  • ▶국회 ‘세비 인상’ 통과....‘그 입, 그 손으로?’ 언론도 들끓어

    미국과 영국 언론들이 툭하면 ‘유엔군은 명예로운 철수를 준비’한다는둥,
     ‘한국서 곧 축출될 것’이라는 둥 선동적인 왜곡 보도가 난무하는 중에,
    피난국회에서 엉뚱한 결의가 나와 부산은 온통 어이없다며 시끌시끌하다.
    국회의원들이 자신들의 세비(歲費)를 올리자는 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던 것이다.
    얼마나 놀랐던지 민국당의 동아일보마저 비난 기사를 크게 보도하였다.
    <전재민에 ‘잠자리’를 주라든 그 입과 그 손을 손수 들어 자신의 월수만 만장 가결하다니>
    질책하는 제목을 길게 붙인 기사요지는 다음과 같다.(동아일보 1951.23일자 2면 3단)

    “드디어 시국을 망각하였는가? 우리들의 대변자로 성스러운 의정단상에 서게 한 그대들 선량,
    적색 테러의 위협으로부터 그대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그대들이 권총을 차고 호신경관을 대동하는 것은 지금 호국을 위하여 모든 무기들을 일선장병에게 제공해야하는 때임에도 불구하고
    묵인하려고 하였고, 또 일선장병들이 다 해진 군복을 입고 악전고투하므로 비전투원들의 군복을 일선에 제공하자는 민성이 높은데도 국회의원 체면을 위하여 그대들이 군복착용에 매력을 느끼는 위선적 유행을 차라리 묵인하려고 했던 것이 선량한 민중의 구김살 없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대들에 대하여 이제 민중이 신뢰를 완전히 잃어버렸으니,
    하루 3홉의 쌀과 부식대 50원의 생활조차 보장되지 못하는 수백만의 전중난민들과
    허다한 시민들이 직장과 생계의 길을 상실한채 수난 가운데 있으며
    또 혹한의 일선에서 24시간 죽음을 넘어 악전고투 조국 수호의 혈전을 계속하고 있는
    장병의 보수가 2만원에 불과한 실정을 알고 있는 그대들이,
    제2국민병에게 밥과 옷과 잠잘 집을 제공하지 않았다고 정부를 통박하던 그 입으로,
    월수 22만5천원을 확보하려는 안을 거의 만장일치로 가결하였은 즉,
    민중은 실망이 지나쳐 분격하지 않을 수 없으니.....
    정부가 추가예산을 편성하려니와 도대체 재원은 무엇인가?....“

  •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에서 국민에게 발표한 격문. 부유층 태만성을 경고했다. 51년 1월10일자 동아일보 2면ⓒ동아DB
    ▲ 이승만 대통령이 부산에서 국민에게 발표한 격문. 부유층 태만성을 경고했다. 51년 1월10일자 동아일보 2면ⓒ동아DB


  • ▶“보이소, 피난 왔어예? 유람 왔어예?” 권력층-부유층 눈쌀

    국회의원들이 이럴진대 소위 권력층과 부유층의 안하무인 행태는 전쟁중에도 그랬던가.
    “보이소, 피난 왔어예? 유람 왔어예?”라는 신문제목처럼 전쟁은 남의 나라 일인 듯
    '사치와 방탕이 여전한 타락상'을 고발하는 기사들이 보기에도 민망할 지경이다. 
    특히 전란을 피하려 제주도로 일본으로 미국으로 가려는 여권 신청자가 줄을 서고 있다.
    개인적인 청탁과 압력에 시달리는 외무부에서는 공무 이외의 해외여행은 일체 접수조차 않는다 발표했지만, 그래서 ‘관용여권을 얻으려‘는 뒷돈의 액수만 올라가는 형편이었다.
    해외도피 엄금, 제주도 피난 금지’를 발표하자 제주도와 일본에 몰래 도피하려는
    밀항선 배값이 또 엄청나게 뛰었다는 기사가 나왔다.
    더구나 입영 나이 아들을 병역기피로 외국에 빼돌리려는 권력층과 부유층의 뇌물공세가
    심각하여, 재산을 빼돌리고 자녀를 빼돌리고 일단 미국에 나가면 온갖 구실로 귀국하지 않는
    사람들이 많다고 외무부 국장이 대통령에게 보고 하였다.
    급기야 이승만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국민에게 보내는 특별담화를 발표하였다.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우리 국민들도 인해전술로 적을 죽이자는 결의를 재삼 당부하면서
    이승만은 권력층과 부유층에게 힘주어 경고를 발하였다. 

    “소위 세력가와 재정가라는 사람들이 다 부산에 모여들어서 공산당의 선전에 파동되어
    공포심을 가지고 저의 생명과재산만 보호할 생각으로 피신할 자리만 찾고 있음으로
    국민분위기가 자연 공포심프로 돌아가고 있으니 그런 사람들은 일일이 조사해서
    어디로 몰아내든지 그렇지 않으면 그런 사람들도 생명과 재산을 내놓고 우리와 같이 싸워서
    적군을 소탕할 결심을 가리고 일어나야 될 것이니....(중략)...주먹밥 한덩어리라도
    싸우는 사람들을 먹이도록 해야 할 것이오 그렇지않고 피난이나 하고 선동이나 하는 자들은
    일일이 조사해서 특별한 조처를 해야할 것이다....국민들이 다 합해서 죽어도 같이 죽고
    살아도 같이 살자는 결심만 가지면.....(중략)....조국을 빼앗기는 날 재정가도 세력가도
    우리는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중국공산당의 노예가 되는 것이다.”

  • 이승만 대통령과 훗날 부통령이 된 장면.(자료사진)
    ▲ 이승만 대통령과 훗날 부통령이 된 장면.(자료사진)

  • ▶장면, 총리 취임거부 소동...미국은 “장면이 마음에 들었다“

    지난해 11월22일 국무총리로 임명된 장면 주미대사는 두 달 넘게 이승만의 속을 태우다가
    1월28일에야 서울에 도착하였다. 장면은 그러나 총리직을 수락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지난 번 임명 때도 그랬듯이 서울에 와서도 “나는 총리직을 수락할 수 없고
    워싱턴으로 돌아가겠다. 한국서보다 미국에서 좀더 나은 일을 할수 있으므로
    한국에 머물지 않겠다”고 말했다.
    경무대로 이승만을 만났을 때 대통령이 “먼길 오시느라 수고했다”고 하자
    그는 “저 아직 총리 수락하지 않았는데요”라고 대답하며 “며칠만 더 생각해봐야겠다”면서
    총리 축하 다과회를 하자는 이승만의 요청도 거절하였다.

    이승만이 장면 대사를 국무총리로 임명한 데는 한미간의 미묘한 사연이 있다.
    이 대통령이 6.25후 상당기간 장면의 외교능력에 의혹과 불만을 토로한 편지들이
    올리버 박사(이승만 고문)의 저서 [이승만의 대미투쟁]에 나와있다. 
    국군이 평양을 장악한 직후 10월25일자 장면 대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승만은 장대사를 길게 질책하고 있다. 올리버의 메모에 의하면 이승만의 지적은,
    소련이 주미 한국대사관의 비밀 편지내용을 폭로한답시고 거짓말을 유엔에서 선동하고 있고
    ‘대한민국을 반대하는 한국인들’이란 유령단체가 막대한 돈을 뿌리며 북한을 한국이 점령해선
    안된다고 선전로비를 하고 있는데, 주미 대사라는 사람(장면)은 ‘바쁘다’는 핑계로
    이를 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장면이 답장도 안한다며 “이 시국에 주미대사가 유엔에서 벌어지는 대한민국 공격 상황을 모른다는 것은 내가 뺨 맞은 듯 엄청나게 수치스러운 일”이라고
    이승만은 분통을 터트렸다. 

    몇 차례 더 편지를 보내던 이승만은 결국 오랫동안 미뤘던 판정을 내렸다.
    요컨대, 장면은 전쟁 중의 한국대표로서 적임자가 아니라는 결론으로 이런 편지를 썼다.
    “....대사가 인기가 있고 우방국의 신뢰를 얻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때에 따라서 외교관은 여러 나라에 자국의 입장을 납득시키기 위해
     자신의 인기를 희생시켜야 하는 경우도 있는 법이오...(중략)...
    무초 대사와 이곳의 미국인 친구들은 장면 대사가 한국에 꼭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소.
    그들은 현재로서 서울이 장 대사에게 가장 중요한 곳이라고 생각하고 있고
    나 역시 대사가 당장 한국으로 돌아오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오.”

    무초는 미국무성과 마찬가지로 장면을 좋아하였다.
    왜냐하면 장 대사가 미국 정책에 가능한 한 가깝게 맞추고자 노력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에
    미국은 장면이 이승만의 미국에 대한 요구를 최대한 줄이고 한국의 양보는 많이 받아낼
    역할을 수행할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가졌던 것이다.
    한편 이승만은 장면에게 반드시 공산당을 격퇴하여 남북을 통일시켜야 한다는 자신의 정책을
    미국 정부와 유엔에게 받아들이도록 의사전달을 충실히 해주기를 계속 독촉해왔다.
    한마디로 미국은 장면이 마음에 들었고 이승만은 배신감을 느꼈다는 말이다.
    마침내 이승만은 우유부단한 장면을 경질하면서 미국이 원하는대로 ‘실권 없는 총리’자리에
    앉혀주고 대미-유엔 외교를 강화하는 1석2조의 카드를 꺼낸 것이었다.

    올리버는 이승만의 장면 승진통고 편지가 사실은 ‘대사 소환’이란 말을 차마 못해서
    좋은 말로 에둘러 달래는 것이었다고 쓰고 있다.
    장면과 대미외교 로비를 장기간 함께 해왔던 올리버는 자기나름 개인적인 인물 평가를
    다음과 같이 술회하였다.
    “장 대사는 노력형이고 적을 만들거나 반감을 일으키지 않는 사람이다.
    결점을 말한다면 첫째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서 일하기가 힘들며
    이는 유엔 대표들 전원이 매우 예민하게 느꼈을 것이다.
    둘째 그는 미국 고문들에게 너무 의존하고 있으며 자신이 독립국가의 대변인이라는
    인식이 부족한 경향이 두드러진다.”

    장면을 전보를 쳐서 빨리 불러오라고 이승만을 재촉하던 무초는
    장 대사가 동경까지 와서 또 머물러있자 그를 독촉하여 겨우 서울에 와서 안도하였는데,
    다시 딴소리를 하는 장면의 모습에 조바심을 쳤다.
  • 장면 주미대사가 총리 수락을 미루는 미묘한 모습을 비판한 기사. 51년 2월2일자 동아일보 2면 ⓒ동아DB
    ▲ 장면 주미대사가 총리 수락을 미루는 미묘한 모습을 비판한 기사. 51년 2월2일자 동아일보 2면 ⓒ동아DB
  • 이미 작년에 장면 총리를 인준해 놓은 국회도 장면 때문에 어이없는 장면을 연출하였다.
    장면의 귀국보고를 듣기로 한 국회는 그의 직함을 ‘주미대사의 보고’로 할 것인지, ‘신임 국무총리의 보고’로 할 것인지 분명히 하자고 시비하는 웃지 못할 풍경이 벌어졌던 것이다. 
    언론도 마찬가지, 야당신문 동아일보조차 장면의 애매모호한 처신을 비꼬는 보도를 냈다.
    <수락? 거절? 쌍곡선에 선 장국무총리의 태도 미묘. 총리의 심중을 그 누가 알리요?>
    4단 제목으로 머리에 올린 기사는 실제로나 법이론으로 보나 ‘평지 파란’이라고 꼬집었다.

    이 기사가 보도된 날 신성모 국방이 말했다.
    입 가진 사람들이 모두 ‘장면은 전쟁이 무서워서 한국을 떠나려 한다’고 수근대는 여론을
    그도 이젠 알았을 테니 총리직을 곧 수락할 것이라고. 
    바로 그날 국무회의에서 장면은 어렵게도 ‘오케이’ 하였다고 한다.
    ‘전시 총리’로 임명된 지 73일만이다. 다음날 장면은 국무총리에 취임하였다.
    이와같은 장면의 묘한 행태는 다음해 개헌 파동 전후로 이러지고, 
    10년후 4.19를 거쳐 5.16때 ‘수도원 도피’에 이르기까지 계속 반복된다.

    ▶휴전추진 영국, 중공 편들기...모택동 ‘전쟁 장기화’전략 대박

    2월1일 유엔이 중공군(중국공산군)을 ‘침략자’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영국은 적극반대 하였다. 1월내내 ‘한국 휴전’을 들먹이며 유엔을 휴전분위기로 바꿔놓은
    영국의 반대를 설득하면서 미국은 몇가지 양보한 끝에 결의안 통과를 끌어냈다. 
    트루먼은 뒷날 회고록에 쓴대로 ‘한국전쟁의 목표는 38선 원상회복’이었으므로
    남한에 들어온 중공군만은 북쪽으로 밀어내야 하기 때문이다.
    입으로만 한국방위 운운하는 트루먼에게 반신반의하면서도 이승만은
    우선 유엔 결의에 힘을 얻어 “다시 북진이다. 국민총궐기”를 다짐하는 성명을 발표하고
    서울 재탈환이 임박했으니 곧 환도하겠다는 입장을 밝힌다.
    맥아더 역시 국무성의 무시와 냉대에 시달리면서도
     ‘만주 폭격’과 ‘승전’을 확인하는 성명서를 배포하였다.
    만주폭격 문제는 영국권의 반대와 트루먼의 손에 묶여있는 상황이다.
  • 모택동과 전사한 아들 모안영, 6.25에 통역으로 참전했다가 폭격에 죽었다.(자료사진)
    ▲ 모택동과 전사한 아들 모안영, 6.25에 통역으로 참전했다가 폭격에 죽었다.(자료사진)
    가장 신바람 난 것은 모택동이다.
    뜻밖의 ‘친구’가 반갑다. 맥아더의 전략과 군사기밀까지 알려주는 영국이 유엔서 이렇게 도와주니 여간 고마운 친구가 아니다.  맥아더의 원자탄 폭격도 포기시켜 주었고 조만간 휴전을 추진할
    모양인데, 휴전이든 침략자든 모태동의 노림수는 첫 방부터 대박이다.
    작년 6월에 북한군을 즉각 침략자로 규정했던 유엔이 이번에 중국을 침략자로 규정하는데
    어언 100일이 걸린 것, 신생 공산중국은 벌써 세계가 두려워하는 강대국 대접을 받은 셈이다. 
    참전때 스탈린이 약속한 각종지원은 지금부터 본격적으로 받아내야겠다고 쾌재를 부른다.

    ‘전쟁 장기화’ 태세를 재점검하는 모택동은 38선 돌파 후 머뭇거리는 팽덕회 사령관에게
    독전의 채찍을 휘두른다. “더 밀고 내려가라. 37도선까지, 대구까지, 부산까지...”
    인해전술 병사야 넘쳐나고 있으니 빨리 빨리 소모해야한다.
    1949년 12월과 1950년 1월에 김일성이 스탈린에게 남침전쟁을 허가해달라고 요청하고 있을 때 모택동은 소련이 참여하지 않아도 중국은 반드시 전쟁에 참여하겠다고 다짐한 바 있다.
    그가 계산한 ‘백익무해(百益無害)’ 한국전이야말로 산더미 같은 중국의 고민을 일거에 해소시켜줄 탈출구로서 그것은 전쟁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효과는 기하급수로 커질 것이다.
    첫째, 북한은 이미 중국 것, 소련이 만들어준 김일성 정권은 지금 중국 품에 들어왔다.
    중공군이 피를 많이 흘릴수록, 북한이 미군에 많이 얻어맞을수록 중국 의존성은 강해진다.
    둘째, 스탈린이 제공하는 군사-경제원조는 고스란히 중국의 기술향상, 산업발전의 영양제다.
    중공군이 불리할수록 소련은 신식 공군기등 현대무기를 대량으로 공급해주고 있다.
    셋째, 최강대국 미국과의 전쟁은 중국의 위상 급상승은 물론, 현대식 전투경험도 배우고 
    대만의 위상은 상대적으로 급전직하이므로 유엔 대표권도 저절로 굴러들어올 것이 틀림없다.
    넷째, 골치 아픈 토지개혁의 걸림돌 자본가 계급을 전쟁의 이름으로 단번에 처리하게 되었다.
    다섯째, 심각한 청년 실업자, 여성 지위 향상등 사회문제도 한국전쟁이 다 도와주고 있다.
    여섯째, 무기 없는 과잉병력을 대량 소비, 소련의 최신무기로 무장한 적정병력을 갖춘다.
    일곱째, .소련이 휴전에 나서면 강력 반대, 휴전을 담보로 새로운 장기원조를 듬뿍 받아낸다.
    ‘돈 안드는 전쟁’이 ‘떼돈 몰아주는 전쟁’으로, 중국은 사람과 미숫가루만 있으면 충분하다.
    모택동은 승패에 관계없이 국가문제 해결하기에 전쟁을 오래 오래 끌어나갔다. 
    전후 일부의 주장 ‘스탈린이 중국의 강국화를 견제하려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는 음모설은
    글쎄, 모스크바의 시각인지 더 연구해야 할 것 같다.

  • 중공군 사령부에서 김일성과 팽덕회 사령관.(자료사진)
    ▲ 중공군 사령부에서 김일성과 팽덕회 사령관.(자료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