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군 개입에 1.4후퇴...평양사과 함흥사과 놓고 눈물의 망년회
  • [연재] 이승만(1) 부산정치파동중공군 참전...트루먼의 굴복...1.4후퇴

     깨진 원자탄 밀약’...“평양사과 함흥사과눈물의 망년회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 보급회 회장

  • 서울 덕수궁 옆 정동제1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웠고 이승만은 20살때 처음 이 교회에 나가 기독교를 배웠으며 해방후 돌아와 명예장로가 되었다.(뉴데일리 DB)
    ▲ 서울 덕수궁 옆 정동제1감리교회.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웠고 이승만은 20살때 처음 이 교회에 나가 기독교를 배웠으며 해방후 돌아와 명예장로가 되었다.(뉴데일리 DB)

     얼어붙은 크리스마스 이브,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예배를 보러 정동교회에 나갔다.

    19501224일 오전 11, 북한이 침략한지 꼭 6개월 되는 날. 성탄절을 맞는 교회가
    아무런 장식도 없이 썰렁한 예배당엔 난로불도 피우지 못해 황량하기 그지없다.
    교인들은 다들 피난 떠난 듯, 고작 20명이 모인 중에서 평신도 한사람이 예배를 인도하였다.
    목사도 피난 간 와중에 대통령 부부가 참석하였으니 교인들이 얼마나 기뻐하는지,
    찬송가도 목이 메이고. 진행자가 마태복음 10장을 읽으니 따라 읽는 목소리들이 흐느낀다.

    <몸은 죽여도 영혼을 능히 죽이지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라>
    설교하는 신도도 울고 대통령 부부도 눈물을 훔쳤다.

    이승만은 34절에 눈을 박고 이를 악물었다.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이 구절은 이승만이 독립운동 내내 악마 일본을 치는 검을 갈고 닦는 인고의 세월동안
    날마다 가슴을 붙잡아주던 하나님의 칼날 같은 말씀, 참평화를 구하는 기독교 정신.

     벌떡 일어선 이승만은 교인들 앞에 나가 다짐하였다
    하나님이 우리를 지켜주시니 아무리 악독한 적이 쳐들어와도
    기어이 물리칠 수 있다는 믿음을 굳게 가지면 반드시 승리합니다.”

    과연 승리할 수 있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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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년전 1895년 스무살 때 처음 다녔던 정동교회,
    배재학당서 미국을 알고 미국을 공부하며 미국식 자유민주공화국을 꿈꾸던 사형수 감옥생활,
    하나님은 그의 기도를 마침내 들어주어 공산당을 물리치고 대한민국을 세워주셨는데
    이렇게 빨리 또 공산당의 시련으로 이 나라 이 백성을 버리시려 하는가.

  • 2인용 헬리콥터를 타고 워커 장군과 전선을 찾아간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2인용 헬리콥터를 타고 워커 장군과 전선을 찾아간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교회를 나와 신성모 국방장관의 지프를 탄 이승만 부부는 의정부 북방 전선으로 달렸다.
    바로 전날 23일 미8군사령관 워커 장군이 교통사고를 당해 숨진 곳을 지나갔다.
    하루 전 무공훈장을 받은 워커 장군의 아들은 급히 달려와 아버지 시신을 거두어야 했다.

    한국군 6사단에 들어섰다성탄 선물을 나누자 군인들은 위스키가 왔느냐고 술부터 찾았다

    젊은 장군 장도영(張都暎)족자를 만들겠으니 무언가 써주십시오요청하여
    이승만은 붓글씨를 써주고 장병들을 격려, 통일을 포기하지 말자며 포옹하였다.

    24사단을 찾아 처치 장군과 만나 미군들에게 성탄 카드와 선물을 전달한 이승만은
    소련은 한국을 얻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걸 것이니 내말 잘 들어 잘 싸워요 격려하였다.

    지프에 오른 이승만은 손을 비비며 프란체스카에게 말했다.
     “
    오늘 가장 추운 곳은 교회였어.” 

  •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 남쪽으로 넘어오는 평양 시민들.(자료사진)
    ▲ 폭파된 대동강 철교를 건너 남쪽으로 넘어오는 평양 시민들.(자료사진)

     싸우지도 않고 철수...트루먼이 통일전쟁을 가로막고 있다

    서울은 텅텅 비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한산한 거리엔 찬 바람이 더 춥기만 하다.
    압록강까지 진격한 국군은 중공군에 밀려 평양을 다시 빼앗기자 북한 동포들이 내려오고
    서울 시민들도 일찌감치 피난 길에 나섰으며 오늘도 한강 부교들을 건너느라 부산하다.

    강변에서 피난상황을 살펴보는 이승만은 억장이 무너지는 분노를 삭인다..
    중공군이 나타나자 싸워보지도 않고 작전상 후퇴라며 밀려 내려오는 유엔군,
    통일을 눈앞에 둔채 도망치라고 지시받은 듯 총을 거꾸로 메고 후퇴...후퇴를 거듭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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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에서는 멈출 줄 알았는데 날마다 전선 곳곳에서 무너지고 있지 않은가.
    '작전상 후퇴'라는 말은 속임수 아니냐, 미국은 역시 믿을 수 없는 나라인가.

  • 평양탈환 특보. 김일성의 도주 기사가 보인다. 1950.10.21 동아일보(동아DB)
    ▲ 평양탈환 특보. 김일성의 도주 기사가 보인다. 1950.10.21 동아일보(동아DB)

    .
    인천상륙작전 성공후 서울을 수복하고 북진할 때부터 미국이 수상하였다.
    이승만은 맥아더가 인천상륙을 준비할 때 벌써 국군에게 밀명을 내려 두었었다.
    38선은 공산당이 없애버렸으니 우리 국군이 먼저 올라가 돌파해야 한다.
    평양도 압록강 국경도 북한 땅은 우리 국토이므로 국군이 앞장서 확보할 것,
    북한 동포들은 공산당 피해자들이므로 절대로 마구 다루면 안된다는 것. 
    더불어 이승만은 통일을 대비하며 북한 5도 도지사들까지 미국 몰래 임명하였다.

    예상대로 유엔군은 38선을 넘으려 하지 않았다.
    한국파병 결의안은 침락자를 38선 이북으로 내쫒는 원상회복
    즉 유엔의 경찰임무’는 38선까지라는 주장으로 버티는 것이었다.

    이승만은 정일권 총장에게 호통을 쳤다.
     “
    자네들은 어느 나라 군대인가? 38선에 철조망이 쳐있다는 말이냐? 왜 내 말대로 안하느냐?”
    유엔군에 맡긴 전시작전권이란 걸림돌에 머뭇거리던 국군은 국군통수권자의 명령에 따라
    38선을 돌파하여 북으로 북으로 쳐올라갔다.

    트루먼은 뒷북치듯 유엔의 ‘38선 북진결의안을 통과시키고 맥아더는 북진을 명령하였다.
    원산도 함흥도 평양도 모두 한국군이 먼저 점령하는 대승에 통일은 시간문제가 되었다.

  • '39년만에 입북'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입성 뉴스. 1950.10.31 동아일보 2면(동아DB)
    ▲ '39년만에 입북' 이승만 대통령의 평양 입성 뉴스. 1950.10.31 동아일보 2면(동아DB)



    ★이승만의 평양 입성을 미국이 반대하였다.
    유엔전쟁으로 점령한 지역은 유엔지역이므로 한국은 손대지 말라는 것이었다.
     미국은 유엔이 북한을 관리할 것이라며 북한 신탁통치를 거론하였다.
    이승만이 임명한 도지사와 관리들의 북한행을 방해하고 북한내 활동을 막았다.
    북한담당 미군장교들을 미국서 데려와 북한 군정’을 시작한다고 서둘렀다.

    우리 땅은 우리가 통치한다이승만은 평양에 달려가 대규모 집회를 열었다.
    시청 발코니에 올라선 이승만은 운집한 군중들이 눈물을 흘리며 박수를 보내자 열변을 토했다. “우리는 한핏줄 모두 형제요. 공산당을 몰아내고 완전무결한 독립을 찾아야 하며
    죽을 수는 있어도 자유권을 포기할 수는 없다. 아무도 우리에게 이래라 저래라 간섭하지 못하며
    지금부터 여러분은 통일 대한민국 국민으로서 싸우지 말고 한마음 한뜻으로 뭉치고 또 뭉쳐서
    살아도 같이 살고 죽어도 같이 죽읍시다. 다시는 헤어지지 맙시다.
    북한 하늘을 찌르는 열망의 호소에 환호하는 시민들 속으로 뛰어든 이승만은
    김정렬 국방장관등 경호대의 만류도 뿌리치고 북한 동포들은 안고 안고 또 안았다.
      
    감격한 시민들은 우리 대통령 만세’ ‘대한민국 만세를 부르며 흩어질 줄 몰랐다.
    미군은 살인마로 세뇌당한 그들은 한국군이 북한을 맡아달라고 신신당부하였다.

    이승만은 미국 측에게 수없이 주장하고 호소하고 다짐하였다.
    해방후 3년간 남한을 공산당 천지로 망쳐 놓더니 북한까지 또 망치려느냐?
    한국 영토는 한국에게 맡겨라. 전쟁도 한국군에게 무기를 줘서 싸워야 승리한다.”
    그후 북한 동포들은 하루 빨리 대한민국으로 통일시켜 달라” 결의문들을 보내고,
    학생들은 “대한민국 교수와 교과서를 보내달라는 진정서를 계속 보내왔다.

  • '중공군 불법침범' 1950.11.6 동아일보ⓒ동아DB
    ▲ '중공군 불법침범' 1950.11.6 동아일보ⓒ동아DB



    ★맥아더의 만주 폭격작전 요청을 국무성과 백악관이 거부

    중공군의 진입을 확인한 116, 맥아더는 압록강 철교 3개를 폭파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B-29 폭격기 90대가 이륙직전에 한만국경 8내 폭격 중지워싱턴의 긴급정지령이 왔다.
    압록강 철교도 수풍댐 발전소도 다치지 말라. 꼭 폭격하겠으면 남쪽 절반만 하라, 등등
    8일의 압록강 상공 공중전도 마찬가지였다. 전투기 폭격기들은 빤히 내려다보이는 만주벌판을
    눈감고 돌아서야만 했다. 중국 건드리면 3차대전 일어난다는 막연한 정치적 이유였다.

    그뿐인가. 한국군이 너무 앞질러 간다며 압록강에 도달한 병력을 청천강까지 후퇴시켜
    유엔군과 발을 맞추도록 강요하였으므로 되돌아 후진해야 했던 국군 병력 손실이 속출하였다.
    맥아더는 분노하였다. “중국 참전을 막는 방법이 만주 폭격이오, 3차대전 막는 길이 만주폭격
    이라는 군사전략을 트루먼은 왜 모르는가"  싸우면 이겨야 한다. 2차대전의 영웅 맥아더는
    빤히 보이는 승리를 외면하는 백악관과 국무성의 행위는 '인류 반역'에 다름 아닌 것이며,
    이 기회에 중국공산당을 소멸시켜 아시아의 영구평화를 다지려는 목표는
    이승만 대통령과 완전일치된 세계관 역사관의 산물, 두 영웅의 꿈이었다.

    트루먼의 처지는 그러나 우왕좌왕이다. 전임 대통령 루즈벨트의 정책에 따라 친공유화책을
    쓰다가 중국 대륙을 빼앗겨 곤경에 빠졌던 그는 냉전국면의 반공전쟁에 선뜻 나서긴 하였지만,
    또 다시 맥아더의 앞서가는 전략에 끌려가다가 3차대전이라도 일어나면 싸울 힘이 없었다.
    더구나 워싱턴 정가엔 맥아더를 질시하는 사람들이 들끓어 반전무드가 고조되어 가고,
    영국 수상 애틀리는 초장부터 휴전하라고 압박하지 않는가.  

  • 사흘이 멀다하고 전선 장병들을 방문한 국군통수권자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사흘이 멀다하고 전선 장병들을 방문한 국군통수권자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중공군이 인해전술로 밀어닥치자 전세는 완전히 뒤집어졌다.
     갑자기 유엔군은 침략자를 물리치는 십자군이 아니라 새 침략자로부터 도망치기 바빴다.
    중공군을 피하라는 지시를 받은 듯, 막대한 군장비들을 다 놓아둔 채 후퇴하고,
    대포와 함포는 적군을 쏘는게 아니라 자기무기들을 폭파하기에 정신없을 지경이다.
    한국군이 그토록 간청하던 대포와 탱크와 포탄들이 중공군 손에 넘어가고
    한국군이 길을 열어 점령했던 북한 땅들은 고스란히 중공군에 다시 넘겨주었다..

    이승만은 미군에게 북한 동포들을 피난시켜 달라고 간청하였다.
    함경북도 도지사등이 이승만 대통령의 지시를 받고 미군과 협력하여 수행한
    '흥남 철수작전기록이 남아있다. 10여만명의 목숨은 미군의 즉흥적인 현장결정이 아니라
    이승만과 맥아더의 결재에 의하여 살아난 '자유의 엑소더스'였음을 알아야겠다..

  • 흥남부두에서 미군함을 타려 기다리는 피난민들.(자료사진)
    ▲ 흥남부두에서 미군함을 타려 기다리는 피난민들.(자료사진)

    이승만-맥아더의 비밀...‘원자탄 약속 허무하게 무너지다

    미국은 도대체 중공군의 참전을 몰랐던가? 몰랐다면 트루먼 정부는 당장 사퇴해야 마땅하다.
    알고도 모르는 체 전쟁을 피하려 도망친다면 이것은 또 한번 미국이 한민족을 배신하는
    강대국의 횡포, 이승만은 뼈에 사무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맥아더를 비난하는 보도들이 미국과 영국에서 나오기 시작하였다
    <맥아더의 오판으로 중공군이 들어왔다고, 중공군이 올 줄도 모르면서 압록강을 폭격했다고
    맥아더가 자기 공로만 세우려고 수많은 미국 청년들을 죽이고 있다고...>
    중공군의 대규모 참전 책임을 몽땅 맥아더에게 뒤집어씌우려는 기사들이다.

    중국의 참전은 지난 봄 410일 모스크바에서 6.25남침을 결정하던 순간에 확정된 것이다.

    소련이 공개한 소련의 한국전쟁 비밀문서들이 증언하는 바,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말했다.
    소련은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는다. 대신 아시아 전쟁 전문가 모택동 동무에게 맡기겠다.”
    중국을 통일한 모택동은 언제든 한반도 쟁탈 게임에 개입할 준비에 들어갔던 터였다.
    청일전쟁때 일본에게 빼앗긴 중국땅 조선8. 모택동은 참전을 반대하는 군부에게 선언하였다. 한반도는 소련보다 중국 품에 안겨있어야 한다. 역사를 모르는가.
    이번 참전은 천가지 이익은 있을지언정 한가지 해로움도 없을 터이니...
    중공군은 830일까지 한만국경 병력을 70만으로 늘렸으며 김일성이 요청한 병력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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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일 박헌영이 김일성의 구원요청 편지를 들고 오게 한 것은 형식을 취한 것 뿐,
    모택동은 내전때 투항한 장개석군대 200만명을 인해전술로 남한정복 전장에 쏟아 부었다.
    군대도 인구도 너무 많은 신생 공산국, 스탈린과 담판하여 군사원조와 경제 원조를 얻어야할 
    시기에 소련 대신 싸워주는 한반도 참전은 하늘이 내린 축복의 기회 그것이다.

  • 팔짱을 낀 이승만과 맥아더 장군.(자료사진)
    ▲ 팔짱을 낀 이승만과 맥아더 장군.(자료사진)

    이승만과 맥아더는 중공군 개입 훨씬 전인 10월 아무도 모르는 밀약을 맺었다.

    이 사실은 정일권의 회고록에도 보인다. 중공군이 압록강을 넘은 사실이 탐지되었을 때
    이승만은 당시 육군참모총장 정일권에게 두 통의 편지를 보여주었다고 한다.
    한 통은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필사본, 또 한통은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보낸 답장이다.
    이것은 맥아더가 웨이크 섬에서 트루먼을 만나기 이틀전(10월13일)에 두 사람이 주고받은
    비밀 약속의 역사적 기록물이다.

    이승만이 맥아더에게 보낸 편지 요지:

    북진이 순조롭게 진행됨에 따라 워싱턴과 영국 프랑스는 소련 및 중공의 군사개입을 겁내고 있는 경향이 두드러지는데, 본직(本職:이승만)은 소련은 몰라도 중공의 개입 가능성은 매우 크다고 봅니다. 이번에 트루먼 대통령을 만나더라도 이 가능성을 인정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귀하가 인정하면 북진을 방해하는 작전상 제한이 가중될 우려가 크기 때문입니다. 한국민은 거족적으로 북진통일만을 열망하고 있습니다. 게다가 귀하의 영매하신 지도가 아니고서는 이 열망 달성이 불가능하다는 점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이 간절한 바램을 살펴주시기 바랍니다.”

    맥아더가 이승만에게 보낸 답장 요지: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본직은 믿을만한 정보통의 보고를 받고 있습니다. 중공군은 반드시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그 가능성은 겉으로는 긍정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숨어서 압록강을 건너옵니다. 조금도 모르는 것으로 할 것입니다....(중략)....중공의 군사력을 때릴만한 기회는 지금 말고는 없습니다. 전략은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경우에 따라 거센 반대에 부딪힐 것입니다만, 불퇴전의 결의는 결코 변하지 않을 것입니다. 전에 말씀드린 것처럼 필요하다면 원자폭탄도 불사할 것입니다.”

    정일권은 다음해 1월초 후퇴 막바지에 만난 맥아더가 이렇게 말하였다고 회고록에 써놓았다.

    지금까지 만주폭격과 원폭 사용을 주장해왔지만 조금도 잘못은 아니다. 원폭이라 했지만 본보기로 허허벌판에 한 방 터뜨려 보자는 것이다. 난들 왜 가공할 피해와 그 죄악을 모르겠는가.
    다만 중공군에게 제동을 걸자는 것인데, 트루먼은 끝내 거부하기만 한다. 군사전략을 정치젓 잣대로만 재다니...지금도 늦지는 않았는데...제너럴 정, 원폭을 그토록 바라고 있는 이승만 대통령에게 말할 수 없이 미안하오. 그를 만날 때마다 원폭도 불사하겠다고 되풀이 했던 약속이 이처럼 허사가 될 줄은 몰랐다고 노인장에게 전해주시오...”

  • 포츠담에서 독일 처리를 위해 모인 영국 애틀리 수상(왼쪽부터) 트루먼 미국대통령, 스탈린 소련수상.(자료사진)
    ▲ 포츠담에서 독일 처리를 위해 모인 영국 애틀리 수상(왼쪽부터) 트루먼 미국대통령, 스탈린 소련수상.(자료사진)

    맥아더와 이승만의 원폭 불사밀약은 미-영 정상회담으로 물거품이 되었다.

    한국 파병 초기부터 영국은 미국에게 적당한 선에서 휴전을 주문하기 시작하였는데
    중공군이 쏟아져 들어오자 본격적인 휴전압력을 행사하며 트루먼의 목을 조이고 나왔다.
    이유는 소련이 미국을 한반도에 묶어놓고 유럽 침략을 강화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세계3차대전은 불가피 하다는 위협은 다름아닌 <유럽 우선주의>였다.

    124일 워싱턴으로 날아온 애틀리 수상과 트루먼은 회담 끝에 합의문을 발표한다.

    미국은 어떤 경우라도 원자폭탄을 사용하지 않으며 우방과 합의할때만 사용하겠다는 것,
    한국전쟁 문제에 관하여 모든 결정은 영국 및 영연방과 사전협의를 거친다는 약속이었다.
    불과 나흘전 1130일 기자들에게 필요한 단계에 중공군에게 원자폭탄을 사용하기 위한
    적극적인 고려를 하도록 명하였다. 그러면 3차대전을 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밝혔던
    트루먼이 금방 쉽게 말을 바꾼 까닭은 무엇인가

    맥아더는 한국을 떠난 뒤 어느 기자와 비밀인터뷰에서 솔직한 심정을 토로한다.

    국무성의 앵글로색슨(Anglo-Saxon)주의가 중국대륙을 넘겨주고 한국전쟁을 다 망쳤다.
      
    내가 워싱턴에 보내는 보고서나 메시지는 모조리 영국정부에 즉각 제시하였고,
    영국은 인도나 소련 대사관에 전해주었으며 중국도 48시간이내에 다 알게 되었다.
    그러니 모택동은 가만히 앉아서 니의 전술을 환히 보면서 그때그때 반격을 가해왔던 것이다.
    만주폭격 요청도 조지 마샬 국무장관이 독단적으로 취소해버렸으니...”

  • 전선의 장병들 위문길엔 프란체크사 여사도 나섰다.(자료사진)
    ▲ 전선의 장병들 위문길엔 프란체크사 여사도 나섰다.(자료사진)

    권총...천국행 티켓...원자탄...목숨을 내놓은 이승만 부부

    잠들기 전에 빼놓지 않는 이승만 대통령의 기도는 더욱 길어지고 간절해졌다.
    다시는 서울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죽어도 경무대서 죽겠습니다.
    주여, 이 나라와 백성을 구하여 주소서. 한국은 지금 독립전쟁을 하고 있사오니
    이 민족에게 완전한 독립과 남북통일의 축복을 반드시 내려주시기를 간구합니다."” 

    함께 기도하는 프란체스카는 늘 그랬듯이 그 권총을 떠올리며 각오를 다지곤 하였다고 한다.
    침실 머리맡에 숨겨둔 그 모젤 권총은 지난 8월 대구에서 무초대사에게 겨눴던 총이다.
     
    대구 방어선이 위태로워지자 무초는 제주도로 정부를 옮가자고 한참 설명할 때에
    이승만 대통령은 허리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아들었다.

    공산당이 나에게 덤비면 이총으로 적을 쏘아 죽이고 처를 쏘고 나를 쏠 것이오.
    나는 우리정부를 한반도 밖으로 한발도 옮길 생각이 없소결코 도망가지 않겠소.

    그날 밤 프란체스카는 이승만이 자신에게 권총을 쏘는 꿈을 꾸었다고 일기에 썼다..
    그리고 또 하나의 대비책을 강구하였다. 만약 권총 발사가 실패하였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
    죽어야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확실하게 죽어야 한다. 보다 완벽하게 죽을 수 있는
    그 무엇을 마련하여 이승만 대통령과 프란체스카는 항상 몸에 지니고 다녔다.
    즉사할 수 있는 극약 주머니. 
    그들은 그 것을 천국행 티켓이라 불렀다.

    원자탄...만주는 넓고 넓다는데 인적 없는 벌판에 한방만 터트린다면...
    맥아더와 이승만이 여러번 다짐하고 다짐했던 원자탄도 이젠 소용없게 되다니...
    하나님, 오직 하나님만이 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부디 도와 주소서
    프란체스카는 날마다 원자탄을 떠올리며 기도하였다. 

  •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록한 일기 '6.25와 이승만' 표지 (기파랑 발행)
    ▲ 이승만 대통령 부인 프란체스카 여사가 기록한 일기 '6.25와 이승만' 표지 (기파랑 발행)

     서울을 다시 내줘야 하다니...피난 권고...1.4 후퇴 

    1225일 크리스마스, 이승만 대통령은 전 국민에게 특별성명을 발표하였다.

    “....우리가 우리나라의 주인이오, 이 전쟁이 또한 우리의 전쟁이므로
    우리가 나라와 자유를 위해서 끝까지 굴하지 않고 싸워나가야만 한다.
    그래야 우리 손님들이 우리를 도와줄 수 있고 더욱 돕고자하는 마음이 울어 나온다.....
    우리가 다 일어나 국군과 방위대를 도와 맹렬히 싸우기만하면 중공군은 무찌를 수 있으니
    두려워할 것이 없다....지금 한가지 문제는 우리를 위해 온갖 힘을 다해서 싸우는
    유엔군과 미국인이 작전상 후퇴가 필요할 때 군사행동에 지장이 없도록
    국회의원들과 정부 일부가 부산으로 잠시 옮길 것을 요청해 왔다.
    국민 여러분도 소개시키는 것이 좋겠다고 하므로 권고하는 바이다...”

    이승만은 참고 참다가 어쩔수 없이 국민들에게 피난 가라는 성명을 내고 말았다.
    피난 갈 사람들은 다 빠져 나걌다. 국회의원들도 공무원들도 가족들과 함께 다 떠나갔다.
    8군 사령부는 벌써 대구로 옮겨 갔고 13일자로 서울 철수 명령을 내린 참이다.

    다 된 통일을 이렇게 던져버리다니...이대로 민족통일을 포기해야 할 것인가.
    이승만은 영국 수상이 맥아더를 파면시키라고 요구했다는 믿지 못할 보도에 몸서리를 쳤다.
    그동안 영국 기자들은 의식적으로 자극적인 질문만 던져 이승만과 맥아더를 비난하는 기사를
    만들어 대서특필하곤 하더니 연말회견을 또 요구한다. 강대국은 정말 다루기 힘든 맹수다.

    워커 장군의 후임 리지웨이 장군도 맏을 수 없다. 맥아더 견제용으로 탐탁치 않았지만,
    그가 경무대로 찾아와 저는 싸우러 왔습니다. 곧 북진하겠습니다다짐하는 말을 듣자 
    한 가닥 희망의 줄을 잡는 기분이 되었다. 다시 압록강 물을 마실 수 있겠는가.

    무초 대사와 조병옥 내무장관은 하루 바삐 정부를 부산으로 옮기자고 연일 재촉한다.
    나는 맨 마지막에 떠나야지. 내가 먼저 떠나면 유엔군이 금방 서울을 포기할 텐데...”

    1231밤 경무대 모임, 망년회가 아니라 피난을 준비하는 송년예배가 되었다.
    낮에 이승만 부부는 정동교회에 나갔으나 아무도 없어 미어지는 가슴을 부등켜안고
    십자가 앞에 무릎 꿇어 기도만하고 돌아왔었다.
    경무대 물건들은 이미 다 나눠주었다. 작년에 중공군이 들어와 경무대 창고에 넣어둔 양주들은
    그동안 미군과 국군 위문품으로 다 보냈고, 쌀도 남아있지 않다. “아까운 쌀은 태우지 말라
    이기붕 서울시장에게 지시, 피난 못가는 시민들에게 분배를 끝냈다.
    국군이 탈환한 도시에서 가져온 북한산 사과는 남아서 경무대 식구들에게 나눠주었다.
    이승만은 그동안 귀빈들에게 대접할때 이건 평양사과...이건 함흥사과” 하면서
    마치 통일후의 삼천리 강토를 그리는 듯 마냥
     자랑스러워했다고 한다.
    마지막 북한 사과를 깨무는 경무대 가족들은 ‘악몽의 해마지막 밤을 눈물로 삼켰다.

    1951년 새해 13일 아침 9시, 이승만 대통령 부부는 비행장에 나갔다.

    6개월만의 부산행, 지난 627일 밤엔 북한군에 쫓겨 허둥지둥 3등열차를 타고 수원으로 대전으로 내려갔지만, 석 달 만에 다시 찾은 서울을 또 떠나야 하다니. 이번엔 얼마 만에 다시 올 수 있을 것인지,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으로 군용기에 올라 탔다.
    다음날 중공군은 서울을 점령하였다. 그래서 1.4후퇴.
    이번에도 6월처럼 38선에서부터 서울 함락까지 사흘만이었다.
                                                                                                                                      <계속> 

  • 북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미해병1사단에 보급품을 낙하하는 수송기 낙하산들. 영하 27도 강추위에 이 사직은 찍는 순간 렌즈가 얼어붙었다.(미국립 자료보관청 제공)
    ▲ 북한 장진호 전투에서 중공군에 포위된 미해병1사단에 보급품을 낙하하는 수송기 낙하산들. 영하 27도 강추위에 이 사직은 찍는 순간 렌즈가 얼어붙었다.(미국립 자료보관청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