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김구 피살에 전국이 통곡...연말 되자 국회는 '임기연장' 개헌안 공식화
  • [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⑥ 국회 프락치...미군 철수...중국 공산화

    국회 진지 구축한 프락치들 맹활약...스탈린은 보고 받고 있었다

    인 보길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 조선일보 1949년 1월1일자 1면, 2단톱 신년사설 제목은 '평화적 통일의 길로'였다. ⓒ조선DB
    ▲ 조선일보 1949년 1월1일자 1면, 2단톱 신년사설 제목은 '평화적 통일의 길로'였다. ⓒ조선DB

    새해부터 ‘미군 철수-평화통일론’ 봇물...국회는 결의안 통과

새해가 밝았다. 새 나라 대한민국이 나라 되어 처음 맞이하는 새해는
1949년 기축(己丑)년 황소의 해, 정부출범 4개월반 동안 정신없이 바빴던 이승만 대통령은
“반세기 굴욕을 거울 삼아 국가수호 맹세하자”고 신년사를 발표하였다.
하지만 동아-조선등 언론과 정당들은 1월1일 신년사부터 너도나도 미군철수와 평화통일을 
부르짖고 있었다. 한민당 김성수도 “미군 총철퇴”를 주장하였고
국회에선 전남 진도출신 김병회 의원을 비롯한 71명의 긴급동의로
<남북 화평통일에 관한 결의안>을 제출한 것이었다.

답답하고 분통이 터진 이승만은 국회로 달려갔다.
“남한의 미군을 다 내보낸다면 어떻게 되는지 여러분 아십니까?
다만 얼마라도 미군이 있어야 소련 군사가 내려올 수 없을 것이요.
여기 있는 공산당은 우리가 다 조처할 수 있다지만,
소련은 여기 내려오면 절대로 안되는 것이요.
미군이 있어야 소련이 넘어 올수 없을 만한 것을 만들어놓자는 것입니다.”

이 연설 후 국회의 결의안은 부결되었지만
미국 정부의 미군 철수방침은 기정사실화 되어있음을 이승만도 벌써 잘 알고 있는 터.
건국전부터 알았고 건국후 미군의 일부는 반드시 붙잡아야 한다는 결심을 굳힌지 오래다.
문제는 국제정세도 모른 체 ‘국가자존심’ 운운하는 정치인들과
소련(북한)의 대남공세에 부화뇌동하는 정체불명의 국회의원들이었다.

▶ 한민당등 3당합당 ‘민국당’ 변신...김약수-조봉암등 좌파 연대 강화

제주도를 공산당 반란군이 쑥대밭을 만들어도, 여수-순천에서 군대가 반란을 일으켜도,
그 책임은 모두 이승만 정부가 져야 한다고 몰아붙이며
“총리 바꾸라. 장관들 바꾸라. 우리들을 영입하라”고 물고 늘어지던 정치판은
새해 들어 판도가 크게 바뀌고 있었다.
국회내 개헌의석을 확보하려는 한국 민주당(대표 김성수)는
지난해부터 세력규합을 서둘러 각당과 협상을 벌였다.
이승만의 일민주의(一民主義) 실현을 표방한 대한국민당의 신익희(申翼熙) 국회의장 세력과
손을 잡고, 지청천(池靑天)이 이끄는 대동청년단(大同靑年團)과 합당에 합의한 인촌(仁村)은
1949년 2월 민주국민당(民主國民黨:약칭 민국당)으로 통합 출범하여,
70석을 확보한 원내 제1당, 자칭 보수우익의 중심세력으로 변신하게 되었다. 

독자노선을 내세운 소장파와 무소속의 좌익세력도 이합집산하다가
 ‘동성회(同成會)’로 통합하면서 ‘민족의 자주와 자결’의 깃발을 꽂고
첫째 목표로 ‘남북한 외국군의 완전철수’를 내걸었다.
그 대표가 국회 프락치사건의 주역 김약수(金若水, 당시 57세)이다.
‘남북한 완전 철군’ 카드는 소련의 ‘남조선 무장해제’ 술책임은 말할 것도 없다.
당시 이러한 소련의 대남공작을 민국당 김성수등 정치지도자들이 아는지 모르는지.

  • 김약수(자료사진)
    ▲ 김약수(자료사진)
  • 일찍부터 레닌 물에서 놀던 청년 김약수는
    각종 좌익투쟁을 벌여 세 차례나 감옥살이를 했다,
    일본 경찰관 채용시험에 ‘김약수’ 이름이 출제될 만큼
    그의 좌익투쟁은 명성을 날렸다고 한다.
    박헌영과 조선공산당을 창당한 뒤 지하활동 하던 그는
    해방 후 여운형과 건국준비위원회의에 참여했다가
    돌연 한민당 창당작업에 들어가 조직부장까지 지냈으며,
    초대 국회의원에 당선되고 국회부의장에 선출되기에 이른다.

    한편 조선공산당의 후배 조봉암은 무소속회를 꾸리며 김약수를 회장으로 삼는다.
    좌익과 소장파의 총수가 된 김약수는 ‘민족자결의 원칙’을 강조하면서 줄기차게 소신을 밝힌다. “남북을 막론하고 외국군대는 완전 철수해야 하며 남북은 화평통일을 해야한다.”
    국가자존심을 내세우는 ‘평화통일안’은 그때나 지금이나 국민을 사로잡는 마약이다.

    ▶ 완전철군 반대 이승만 “1882년 조미(朝美)조약 지키라“...‘태평양 동맹’ 체결 요구

    정부수립 한달 후 9월 중순부터 은밀히 시작된 미군 철수로 7만명 병력은
    새해 1월엔 7천500명까지 줄어 있었다. 3월 백악관 NSC(국가안전보장회의)는
    “6월30일 철군 완료”방침을 확정, 트루먼 대통령이 승인하였다.
    특사 무초(John J. Muccio)는 미군 잔류를 요구하는 이승만을 만나
    철군의 불가피성을 설득하지만 ‘6.30 철군’ 목표를 6월30일까지도 알려주지 않는다.
  • 이승만은 북한의 남침을 막을 수 있을 정도의 병력과 총탄, 무기, 탱크등을 지원해주고
    군사력 양성에 필요한 적절한 규모의 미군 주둔을 끈질기게 요구하였다.
    미군부는 “탱크는 한국지형에 안맞는다”며 거부하였고 최소한의 무기는 수송해주겠다며
    차일피일 미루기만 하였다. 국회는 이승만을 돕기는커녕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중국 대륙은 급격히 공산군에 무너지고 유럽에선 4월에 북대서양조약기구(NATO)가
    탄생하였으니 “우리도 그와 같은 태평양동맹을 맺자”며 이승만은 미국에 간청하였다.

    그는 무초를 만날 때마다 “1882년에 맺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을 미국은 지켜야한다”고 강조했다. 이 조약은 이승만이 1905년 고종 특사로 미국에 갔을 때  루즈벨트(T. Roosevelt) 대통령을 만나 “조미수호조약의 제1조에 규정된 거중조정(good offices) 의무대로 조선의 독립을 도와달라”고 요구했던 것, 그로부터 19년뒤 알고보니 당시 이미 그 조약을 미국이 일방적으로 무시하고
    동경에서 ‘태프트-가쓰라 밀약’을 맺어 조선을 일본에 넘겨준 것이었다.
    이때부터 이승만은 독립운동기간 내내 “미국은 코리아를 배신한 국가”임을 강조하는 연설을
    미국 전역에서 계속하고 다녔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직전 1941년 여름 출간한 유명한 영문저서 <일본의 내막: Japan Inside Out>에서 ‘미국의 한국 배신’을 폭로하고 “미국은 일본을 멸망시켜 조선을 구할 의무가 있다”면서
    "맹목적인 평화주의자들은 간첩 오열과 같다. 하늘을 배신한 우상숭배 군국주의 일본이
    곧 미국을 공격할 테니 빨리 기독교 정신으로 무장하여 악을 치라”며 미국 여론에 호소하였다.
    노벨문학상 수상자 펄벅 여사는 “진실을 알려준 무서운 책”이라는 서평을 냈고,
    이 책을 출판한지 넉달 만에 일본은 하와이 진주만을 기습하였다.
     
  • 이승만의 책은 ‘놀라운 예언서’로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미국 군부는 이 책을 필독서로 지정하였고, 영국등 유럽 여러나라로 팔려 나갔다. 
    가나한 떠돌이 독립운동가 이승만은 이때 처음 몫돈을 만져봤다고 한다.

    무초 대사(1949년 4월 부임)는 애치슨 국무장관(1949년 1월 취임)에게 
    끈질긴 이승만의 요구사항들을 보고하였으나 협상은 지지부진이었다.
     5월8일 이승만은 마침내 특유의 직설적인 공개비판 특별성명을 발표한다.

    “.....미군정 3년동안에 미국이 공산당과 타협함으로써
    우리가 공산당을 비난하는 것조차 금지당했을 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렇게 생명까지 위협받게 만들어 놓은 것이다....
    우리나라를 반쪽으로 분열해 놓은채 공산당을 키워놓았으니
    미국은 우리 힘으로 해결하기엔 너무나 많은 문제를 남겨놓았다.
    미국은 공산당이 38선을 침범하여 우리를 공격한다면 
    우리를 원조하기 위하여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답변을 할 때까지
    잔류 주둔군을 철퇴하지도 못하며 철퇴하지도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당황한 미국은 “어떤 개별국가와도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한 역사가 없다”고
    이승만을 달래고 비난하면서 미군사고문단 500명 잔류등 4개항에 합의한다. 

    ▶국회 프락치사건...이승만 “국회에 공산당이 잠입해 있다” 선언

    중부전선을 지키던 육군 2개대대가 월북하고 해군 소해정 한척도 북으로 넘어갔다.
    이승만의 대대적인 숙군작업을 피해 도망치거나 전향하는 장병들이 늘어났지만,
    제주도 반란군은 ‘선전포고’로 맞서며 달려들었다.
    중국내전 모택동 군은 샹하이까지 함락시키고 있었다.
    이때 소련이 해방 이듬해 북한 단독정권 인민위원회 수립과 함께 결성한
    이른바 ‘민주주의민족전선(민민전)’의 대남공세가 지상과 지하에서 갈수록 강화되어
    시국은 어디서부터 손을 써야할지 혼미한 나날이 이어지고 있었다.

    건국직후부터 ‘미군철수’에 공동전선을 펴왔던 좌익세력과 중간파(김구의 한독당 등)는
    평화통일론자 김약수를 중심으로 연합하였으며, 1949년도 예산안을 통과시키면서
    느닷없이 “이승만 정부가 남북통일에 신념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내각불신임안을 냈다. 
    그것은 국정불신을 시비하여 개각론을 핑계삼아 미군철수를 압박하려는 정치공세였다.

    5월 중순, 미군 철수론자 이문원 의원(전북 익산)등 3명이 구속되었다.
    국회에 ‘진지’를 구축한 공산당을 제거하기 위해 검찰이 나선 것이다.
    그들의 혐의는 62명의 국회의원들이 연명으로 유엔 한국위원회에 제출한 ‘미군 철수 진언서’가
    남로당의 비밀지령 8개항에 따른 것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이란 것이었다.

    “공산당이 국회 안에 잠입했다”고 선언한 이승만은
    국회에 나가 다음과 같이 연설하였다.
  • 검정 두루막기 입은 70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검정 두루막기 입은 70대 이승만 대통령(자료사진)
  • “세계가 두 종류의 사상으로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두 진영이 대립하여
    피생아사(被生我死: 네가 살면 내가 죽는다)의 형세로 투쟁하고 있는 중입니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엇을 바라며 무엇을 믿든지 저희 나라도 저희 국가도 저희 생명도 다 바쳐
    공산화해서 남의 속국과 노예가 되기를 감심(甘心:달게 여김)하는 분자들이므로,
    우리는 나라와 가정과 또 우리 자유를 보장해서 다 같이 잘 살자는 목적으로
    우리의 목숨이라도 희생해서 민주주의를 세우기로 결심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민주주의를 유지할 수 있으면 우리가 자유로 살 수 있고
    우리 자손까지도 자유로 잘 살 수 있을 것이지마는 공산주의에 정복을 당한다면
    우리는 적어도 몇십년 동안은 이러한 희망조차 다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온 세계가 다 적색화할지라도 우리는 꿋꿋이 싸워서
    죽어도 자유민으로 죽고 살아도 자유민으로 살겠다는 결심뿐인 것을
    세계에 표명해야, 우리가 죽어도 산 백성일 것이요 살아도 영광스러운 생명이 될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믿는 바는 모든 세계가 다 남에게 속아서 공산주의의 압박을 감수할지라도
    모든 민주국들이 다 자유와 독립을 희생하고 공산화해서 살려고 아니할 것이므로
    언제든지 결국은 민주주의가 승리를 차지하고 말 것이니,
    이것을 알고 믿는 우리로서는 조금도 주저나 의뢰하지 말고
    공산분자들과 함께 섞여서 살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맹세해야 될 것입니다.”


    이 연설을 듣는 국회의원들이 이승만의 골수에 사무친 '반공과 자유'를 얼마나 이해하였을지
    아마도 다음해 6.25침략을 받고서야 알아 들었을까. 아니 그러지도 못하였다.

  • 국회 프락치사건 선고공판 보도. 조선일보 1950.3.15일자ⓒ조선DB
    ▲ 국회 프락치사건 선고공판 보도. 조선일보 1950.3.15일자ⓒ조선DB

    ▶ 월북하는 여성 공작원 음부에서 찾아낸 '국회공작 보고서'


  • 6월20일 국회가 끝나자 국회부의장 김약수를 포함한 의원 7명이 국가보안법 위반 등 혐의로
    추가 구속되고 도합 13명을 수사하여 다음해 판결이 내려졌다.
    최고 징역10년에서 3년까지 선고되었는데 부의장 김약수는 징역 8년.
    서울지방검찰청의 공식 발표에 의하면, 김약수 등은 박헌영의 지령으로 국회의원들을 포섭,
    남로당에 비밀 입당시키고 미군 철수등 소위 합법투쟁을 벌였으며, 증거물로는
    월북하려던 특수공작원 정모 여인의 음부에 숨긴 ‘박헌영에 보내는 국회공작보고서’를
    찾아내 압수하여 광범한 수사를 진행하였다고 한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쓴 6월28일자 편지에서 이 사건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국회안의 몇몇 친공분자들과 반미분자들은 공산당 조직 남로당과 한국독립당(김구)에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들은 정부를 약화시키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하겠다고 별러왔습니다....(중략)....이들의 체포가 대통령의 명령에 따른 것이라지만 의심할 수 없이 명백한 범죄의 증거가 드러났습니다.....최근에 박헌영의 비서가 어떤 여성과 38선을 넘다가 붙잡혔습니다....(중략)...
    신익희 의장은 어제 나더러 이들 공산주의자 의원들을 모두 제명할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이 프락치사건은 15회의 공판 끝에 1950년 3월14일 서울지방법원에서 피고인 모두에게
    유죄판결이 내려졌으나, 6.25남침으로 서용길 의원을 제외한 전원이 월북해 버렸다.

    하지만 이 사건은 당시는 물론 지금까지 ‘조작’이라는 주장이 계속 제기되어 왔다.
    특히 김대중-노무현 정권시절 ‘과거사 진상규명 명예회복’ 조사팀을 만들어
    옛날에 종결된 공산당 관련 사건들을 재조사 심의해야 한다며 ‘무죄’로 판결을 뒤엎은 사람들,
     그리고 친북-종북등 좌익들과 이에 동조하는 정치인 학자들까지 ‘날조’ 주장을 말한다.
    북한이 그간 남한 수사당국이 발표한 간첩사건들을 모조리 ‘고문조작’으로 일축해왔던 것은
    당연하다지만, 남한 좌파 운동권도 마찬가지 '연구'를 발표하곤 하였다.
    예컨대 박원순(현 서울시장)은 [역사비평] 1989년 가을호에서 “국회프락치사건은
    고문에 의해 날조된 것으로, 국회 소장파 의원들이 이승만 정권과 국회내 반대세력인 한민당의 합작에 의해 정치적으로 제거 당했다”는 주장을 내기도 했다.
  • 평양의 소련 군정 슈티코프가 쓴 일기장.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 평양의 소련 군정 슈티코프가 쓴 일기장. (국사편찬위원회 간행)
    ▶국회프락치는 평양의 소련 군정 작품...슈티코프의 비밀보고서 공개

  • 그러나 정작 결정적인 증거물은 소련 정부와 북한 당국에서 모두 공개하였다.
    평양의 소련군정이 ‘제주 4.3반란’등 수많은 폭동 투쟁을 벌이는 동시에
     ‘국회프락치’등 남한 전복 공작을 벌인 또 다른 <슈티코프의 비밀문서>가 발견된 것이다. 
    이는 1993년 김영삼정부 시절 소련이 한국에 제공한 한국전쟁관련 극비군사외교 문서들 속에
    포함되어 있던 것으로, 평양의 슈티코프가 줄창 스탈린에게 보낸 기밀보고서이다.
    슈티코프는 남한 혁명작업의 일환인 국회내 프락치의 성과도 일일이 기록하여 보고하고 있었던 것이다. 주요내용은 다음과 같다.
  • 모스크바 크렘린의 스탈린은 남한 적화공작을 일일히 보고받고 지시를 내렸다.(자료사진)
    ▲ 모스크바 크렘린의 스탈린은 남한 적화공작을 일일히 보고받고 지시를 내렸다.(자료사진)
    [북한 노동당은 남조선의 국회의원들 중 일부를 자신들 편으로 끌어들이는 사업을 조직하였음.
    노동당의 지령에 따라 이들 국회의원들은 국회안에서 남조선에서 시행되는 미국 정책 및 남조선 정부당국의 권위를 무너뜨리기 위해 여러 요구사항을 제기하고 있음. 남조선에서의 미군철수를 내용으로 하는 62명의 국회의원들이 작성한 청원서, 정부 불신임 결의 제의, 모든 장관들의 사임 요구등이 실행되었음. 이런 요구는 국회 다수의 지지를 얻었음. 또한 법률안 심의시 이들은 반민족 범죄를 폭로하고 법안을 수정하도록 노력하고 있음.]

    ▶김일성 직속 거물간첩 성시백...엄청난 자금에 ‘화려한 암약’

    <슈티코프의 기밀보고서> 말고도
    북한 정권이 뒤늦게 ‘로동신문’을 통하여 스스로 밝힌
    국회프락치사건의 증거 또한 상상을 뛰어넘는 엄청난 규모이다. 
    1997년 5월26일자 ‘로동신문’은 2개면 전면에 걸쳐
    <민족의 령수를 받들어 용감하게 싸운 통일혁명렬사 성시백 동지>의 남한 공작활동의 공적사항을 대대적으로 보도하면서,
    김구를 포섭 이용한 과정을 낱낱이 소개 하였다.

    북한이 왜 이런 비밀공작을 반세기나 늦게 공개하였는지 배경은 알려지지 않았으나
     ‘성시백(成始伯)동지’의 활약 내용은 무시무시한 것이다.
    국회프락치사건에 관한 대목만 요약 인용해 보자.
  • 거물 간첩 성시백의 공적사항을 2개면에 특집으로 공개한 북한 로동신문. 1997년 5월27일자 지면.(자료사진)
    ▲ 거물 간첩 성시백의 공적사항을 2개면에 특집으로 공개한 북한 로동신문. 1997년 5월27일자 지면.(자료사진)
    [성시백 동지는 괴뢰 국방부부터 사령부, 헌병대, 육군 정보국에 이르기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