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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이승만史(1) 부산정치파동③ 조각당의 組閣 드라마
김성수, 내각 과반수 장관 7명 요구...이승만 "거부"
인보길 / 뉴데일리 대표, 건국이념보급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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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19직후 60년대 초반 서울대 동숭동 캠퍼스 모습. 1975년 본관은 헐렸고 오른쪽 작은 건물 대학본부만 지금 남아있다. 뒷편 낙산 아래 이화장 조각당이 있다.(자료사진)
서울대 4.19 데모의 출발지 동숭동 마로니에 캠퍼스
'대학로’ 길바닥에 이름만 남은 서울대학교 동숭동 캠퍼스 옛터,
56년전 4.19 그날 아침 20살 대학생은 “부전선거 다시 하라” 플래카드를 들고
마로니에 광장을 뛰쳐나왔다. 경찰대와 밀고 밀리며 경무대 앞으로,
총탄에 쓰러진 친구를 따라 마로니에 광장으로 돌아와 밤새 울부짖던 그날,
내 청춘의 스트룸 운트 드랑(Strum und Drang) 격동의 세월은 지금도 피를 끓게 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선포후 일본이 지은 경성 제국대학 건물들은 허물어지고
서울대는 1975년 관악산 기슭에 한자리에 모여 현대식 캠퍼스로 거듭났다.
동숭동에 남은 것은 울창한 마로니에 몇 그루뿐,
박 대통령도 직접 나와 축사를 하던 졸업식이 거행된 넓은 운동장은
먹자골목으로 바뀌고 100여개 소극장 타운으로 변해 버렸다.
‘지금도 마로니에는 피고 있겠지...’
70년대 히트곡 박건의 ‘그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처럼
낭만도 사랑도 한잔 술에 다 마셔버린 듯 내 추억의 흔적은 마로니에뿐...
그 고색창연했던 문리대-법대 담장 너머 바로 뒷동네 낙산(駱山) 자락에
이화장(梨花莊)은 그때처럼 그 모습 그대로 숨어 있다.
이화장에 돌아 온 이승만...시민들의 눈물
그해 4.19 일주일 뒤 26일 하야(下野) 성명을 발표한 이승만이
사저(私邸) 이화장으로 돌아온 27일 우리들은 우르르 몰려갔다.
‘여생을 평안히’ ‘우리 대통령 만세’ ‘만수무강’ 저마다 손으로 쓴 벽보를 가져와
담벼락에 여기저기 붙이는 군중들을 보자 우리는 놀라 어리둥절해졌다.
그뿐인가, “나쁜 놈들, 자유당 놈들이 우리 대통령 다 망쳐놨다”며
분노의 눈물을 흘리는 시민들...데모했던 우리를 흘끔거리던 그 눈길,
충격 받은 우리 ‘혁명학생’들은 주춤주춤 구경만하다가 돌아서야 했다.
역사란 이런 것인가. 그 진실을 모르면 겪어보고 겪어봐야 알게 되다니 참 바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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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적 497호 이화장 본채, 바깥 벽에 이승만의 행적 사진들이 전시되어있다. 건국68년에도 건국대통령의 공식 기념관이 없는 대한민국, 이승만의 양자부부가 살고있는 주택이 기념관 구실을 하고있는 셈이다.(자료사진)
건국정부의 산실 '조각당'...파란만장 12년 드라마 시작
다시 4.19로부터 12년 전 1948년 건국현장으로 돌아가 보자.
헌법 공포(7.17) 사흘후 국회에서 이승만은 초대대통령에 선출되었다.
재적의원 198명의 무기명투표 결과는 이승만 180표, 김구 13표.
부통령은 이시영(李始榮)이 113표로 뽑혔다.
이승만은 서둘렀다. 이날부터 이화장 언덕위 조그만 별채를 ‘조각본부’로 정하고
‘건국정부’ 내각 인선작업에 들어갔다. 그래서 훗날 '조각당(組閣堂)'이다.
9월에 개막하는 유엔총회 전에 정부수립과 국가승인 준비를 끝내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유엔 관리하 총선과 건국’--이것은 해방3년간 이승만 자신이 목숨 걸고 이뤄낸 외교승리,
미국의 맹목적인 친소정책-하지 군정의 좌우합작 협박과 테러 위협을 물리치고
줄곧 주장해온 ‘남한 과도정부-자유기지론’ 즉 북한에 소련위성정권이 들어선 마당에
남한정부로써 미국과 유엔의 힘으로 남북통일을 추진한다는 1차 목표가 달성된 것이었다.
하루 빨리 건국협력자 유엔과 미국등 국제사회에 보란듯이
번듯한 대한민국을 만들어 “합격” 판정을 받아내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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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 대통령이 건국내각을 구성하는 작업을 벌였던 조각당.(자료사진)
이화장 조각당은 방 하나와 마루뿐인 정자 규모, 이화장 사람들은 분주했다.
새 나라 권력을 붙잡으러 찾아드는 사람들은 새벽부터 밤 늦게까지 붐볐다.
기자들은 “국무총리가 누구냐?”는 질문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다.
이승만은 “아직 정한 바 없으나 발표될 때에는 다 놀랄 것”이라며
내각은 정파 안배 같은 것보다 “내가 생각하는 바와 민의(民意)는 같은 것”이라 단언했다.
다 놀랄 인물? 이 한마디에 벌써 다 놀랐다. 정치판을 강타한 '폭탄선언'의 격랑.
연일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을 띄우던 동아일보 조선일보도 당황하였다.
‘의외의 인물’은 과연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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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7월24일 중앙청 광장에서 거행된 이승만 초대대통령 취임식. 중앙에 이승만, 오른쪽 끝에 신익희 국회의장.(자료사진)
부슬비가 뿌리는 7월24일 아침, 건국 대통령 취임식이 중앙청 광장에서 열렸다.
이승만은 헌법 54조에 따라 취임선서를 하고 서명하였다.
대한민국의 공식출범 행사는 일본이 망하고 해방 3주년 되는 8월15일로 잡았다.
해방의 기쁨과 건국의 감격을 한날 기념하자는 이 광복절 취지는 그러나 곧 왜곡되어갔다.
반(反)이승만 세력이 건국 68주년 오늘날까지 광복절은 해방만이라고 우기기 때문이다.
온갖 정파들이 들락거리는 이화장 조각당에서 낮밤으로 시달리는 74세 이승만은
총리 발표 전날 26일 올리버(미국인 고문 겸 비서)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쓴다.
“국무총리는 북쪽 출신이어야 하고, 부유층 출신은 안된다고 생각하오.
이 두 가지는 파리 유엔총회가 우리 정부를 승인할 때 유리한 자산이 될 것이오.
나는 김성수를 국무총리에 임명하고 싶은데 그 주위에 모여 있는 사람들이 문제요,
그들은 ‘도 아니면 모’(Run or Ruin) 식의 정략으로 뭉쳐있소.
국회는 의견들이 분분하니 누구를 지명해야 좋을지 잘 생각하라고 제안하였소.”
27일 아침, 대통령 이승만은 박수를 받으며 국회 본회의장에 입장하였다.
그동안 자신이 총리로 추천 받았고 언론이 거명하는 가장 인망 있는 사람들이
김성수, 신익희, 조소앙 세 사람이라고 서두를 꺼낸 이승만은
이 세 명을 총리로 임명하지 못하는 이유를 뜻 밖에 길게 말하였다.
한사람 한사람에 대하여 30분에 걸친 설명과 해명과 구상을 밝힌 이승만은
드디어 ‘의외의 인물’을 발표하였다.
“국회의원중에 이윤영(李允榮)의원을 국무총리로 임명합니다.”
경악과 충격...이윤영은 제헌국회 개원식때 이승만이 하나님에게 기도를 부탁한 목사.
이승만은 이윤영 임명 이유에 대하여 덧붙여 설명했다.
남북통일을 위하여 이북동포 힘을 얻고자 이북대표 한분을 총리로 임명한다는 것,
북한 조만식(曺晩植) 선생을 추대하려 했으나 생명의 위협을 염려하여 포기하고,
그 대신 조선민주당 조만식 아래 부당수인 이윤영 의원을 선택하였다는 것,
또한 한국의 오랜 악습인 지방색을 타파하는 데 적임이라는 것 등이었다.
이승만이 퇴장하자마자 국회는 즉각 무기명 투표에 들어갔다.
이심전심 토론 한마디 없는 국회, 이윤영 총리 임명안은 부결되었다.
다음 날 28일 이승만은 총리 부결에 대해 자신의 철학을 담은 담화를 발표하였다.
"민중이 바라는 바...내가 주장하는 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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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윤영 총리임명 부결후 이승만 대통령이 발표한 담화 기사. (동아일조, 1948.7.29일자 1면)
“.....이 임명안을 즉석에서 부결한 사실을 보면,
두 당(한민당과 한독당)이 각각 내응이 있어서
자기당 사람이 아니면 부결에 부치자고
약속이 있는 것이니,
만일 이런 사실이 있다면
내가 국무총리를 몇 번 고쳐서 임명하더라도
자기들의 내정한 사람이 아니고는
다 부결되고 말 것이니.....
다 아는 바와 같이 전 민족의 대다수가
현재 있는 정당으로 정권을 잡게 하는 것은
원치 않는 바인데,
그 중 한 정당이 유력한 분으로 정권을 잡게 하는 것은 정치계에서는 환영할는지 모르나
다대수 동포에게는 크게 낙망될 것이다.
독립촉성국민회 간부를 내가 몇 번 개조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모든 정당이 다 민족운동에 협의 진행하기를 목적하고 두 정당 간부 인물로 국민회 책임을
맡게 하였더니, 그 후 결과로는
각각 자기 정당을 중요시하므로
민족운동을 해갈 수 없게 되었다.
지금 국권 건설의 초대 정부에
이것을 또 만들어 놓고야
앞길을 어떻게 해 나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러므로 적어도 국무총리 책임을 두 정당 중에 유력한 인물로 임명하지 않는 것이
민중의 바라는 바이오, 또한 나의 뜻하는 것이므로
천사만려(千思萬慮)한 결과 이와 같이 한 것인데....(중략)....국회 안에서 어떤 인물을 지정해서
그 분만을 쓰기로 활동하는 인사가 있는 줄 우리가 아는 터이나,
이것이 민족이 원하는 것인가, 내가 주장하는 것이 민족이 원하는 것인가....”
허정 "김성수를 총리로, 내각은 한민당으로..." 추천
닷새 후 8월2일 제37차 국회본회의에 나온 이승만은
새로 임명한 이범석(李範奭)을 국무총리로 동의를 구하는 연설을 하였다.
투표결과 110표로 가결되었다.
이윤영 총리 부결후 며칠동안 이승만은 정당 각파와 접촉,
특히 한민당의 김성수를 몇 차례 불러 협조를 당부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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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승만보다 열여설살 아래인 김성수(왼쪽)는 유학기간등 이승만과 친숙하였고 해방후 건국운동을 적극 지원하였다. 사진은 해방후 다정하게 담소하는 모습.(자료사진)
이승만은 그때 허정(許政)과 김성수를 이화장으로 함께 오라고 불렀다.
허정의 회고에 따르면, 허정은 이승만에게 그날 이렇게 건의했다고 한다.
“초대 총리는 인촌(김성수)에게 맡기시고
중요한 몇자리는 한민당 인사를 기용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합니다.”
이승만 "인촌은 재무장관 맡아주시오"
이승만은 즉각 “인촌은 더 중요한 일을 맡아줘야 하오.
정부가 수립되면 미국의 원조를 많이 얻어 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인망 높은 사람이 재무장관에 앉아야 하오. 인촌이 그 사람이오.”
김성수에게 재무장관 취임을 종용하였다.
인촌은 자기 대신 다른 사람을 추천하며 그 자리에서 거절하였다.
"조봉암은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 농림부 장관..."
이범석 총리가 승인된 날 밤 늦게 조각당에서 발표한 각료 명단에
재무장관은 김도연(金度演), 농림부 장관은 조봉암(曺奉岩)이었다.
장면(張勉)은 문교부장관으로 내정했다가 대미외교용으로 돌리고,
유엔외교에 공을 세운 임영신(任永信)은 상공장관에,
내각제 헌법을 기초했던 유진오(兪鎭午)는 법체처장이 되었다.
“공산주의자 조봉암을 기용한 것은 농민을 장악하기 위해서다.”
이승만은 올리버에게 보낸 편지에서 실토하였다.
집권직후 농지 개혁부터 서둘러 완결하기 위해서는 그가 적임자라고,
농민 장악과 함께 국회내 지주계급의 반발을 견제하는 포석이란 것이다.
이 편지에서 이승만은 한민당에 대한 고민을 털어놓으면서
“김성수는 자기 추종자들 7명을 장관으로 임명해달라고 요구했소”라고 밝혔다.
이승만은 이미 한민당에 실망...배신감을 느꼈다
이승만이 한민당을 멀리하기 시작한 사연이 있다고 한다.
1년 전 미소(美蘇)공동위가 좌우합작을 위해 정파들 참여를 요구하였을 때
너도나도 몰려가는 판에 이승만은 한민당의 참여를 극구 말렸으나 듣지 않았다.
김성수와 장덕수는 “공산주의 지배를 받지않고 신탁통치를 반대할 수 있는 정부가 되기 위하여
미소공동위에 협조해야 한다”는 앞뒤 모순의 성명을 언론에 내고,
하지 미군사령관을 찾아가 요담을 나눈 뒤 참가결정을 공식 발표하였다.
이승만은 분노했다.
“도대체 내 말을 알아듣지 못하다니...왜놈이라도 알아들었을 텐데..."
그는 한민당 지도층에 대한 인식이 달라졌고 크게 실망하였다고 한다.
미국의 좌우합작정책을 밀어붙이는 하지 장군과 내내 싸워왔던 이승만으로서는
한순간에 등돌리는 한민당에 배신감과 함께 그 정체성에 대한 기대와 신뢰가 깨지면서
'반탁' 운운 핑계로 권력을 구하는 당파적 구태를 보자 체념하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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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년 8월5일 첫 국무회의를 마친 대한민국 초대 내각, 앞줄 왼쪽부터 전진한, 임영신, 안호상, 이인, 이범석, 이승만, 윤치영, 김도연, 조봉암, 장택상. 뒷줄 왼쪽부터 윤석구, 김동성, 민희식. 유진오.
대한민국 건국정부 명단 대통령 이승만(李承晩)
부통령 이시영(李始榮)
국무총리 이범석(李範奭, 민족청년단)
내무부 윤치영(尹致瑛, 한국민주당)
외무부 장택상(張澤相, 한국민주당)
재무부 김도연(金度演, 한국민주당)
법무부 이 인(李 仁, 한국민주당)
국방부 이범석 총리 겸임
문교부 안호상(安浩相, 민족청년단)
농림부 조봉암(曺奉岩, 전 조선공산당)
상공부 임영신(任永信, 여자국민당)
교통부 민희식(閔熙植, 미군정 운수부장)
체신부 윤석구(尹錫龜, 한국독립당)
사회부 전진한(錢鎭漢, 독촉국민회)
무임소 이청천(李靑天, 대동청년단)
무임소 이윤영(李允榮, 조선민주당)
총무처 김범연(金炳淵, 조선민주당)
공보처 김동성(金東成, 함동통신사 사장)
법제처 유진오(兪鎭午, 고려대 교수)
기획처 이순탁(李順鐸, 연희대 교수)
처장급을 제외한 장관이 13명, 국무총리 포함 14명의 조촐한 내각이다.
김성수는 이중에 '과반수' 7명의 입각을 요구했으나 그가 내민 명단에서 등용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한명 뿐이었다. 한민당 출신 3명의 장관은 이승만 사람들이다.
허정은 회고록에서 "대통령 중심제인 만큼 이승만 대통령의 의중의 인물을 중심으로
강력한 거국내각이 구성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생각했다"고 당시 심경을 밝혔지만,
뒷날 "한민당의 소외로 빚어진 사태는 현대사의 불행"이라며 안타까워 하였다.
한민당의 분노..."이제부터 시시비비로 '감시' 하겠다" 선언
그토록 기대했던 내각 명단을 본 정파들의 반발은 당연하게도 너무 컸다.
가장 크게 분개한 것은 말할 것도 없이 김성수와 한민당이었다.
김성수 국무총리는커녕 딱 한명의 장관 입각, 그것도 이승만의 선택일뿐.
해방후 창당때부터 품었던 ‘한민당 집권’의 꿈은 어이없이 무너져버리고 말았다.
대통령중심제 헌법을 받아들이면서 ‘이승만을 모신 동반정권'을 확신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배신이다" 물심양면으로 이승만을 지원했던 김성수는 그야말로 뿔이 났다.
한민당은 8월 6일 울분을 삭이며 토하는 담화를 발표하였다.
“.......본당으로서 이번 정부에 국무위원으로 입각한 사람은
재무장관 김도연 1인뿐이어서 관련은 극히 희박하다.
본당은 신정부에 대하여 시시비비주의로 임할 것은 물론이어니와.....
진정한 민주주의적 독립국가를 건설하도록 책선(責善)적 편달과 감시를
게을리 아니 할 것을 이에 언명하는 바이다.“
삼천만 경축잔치 8.15 건국선포식을 불과 열흘 앞두고 터져나온 결별 선언!
어찌 부산정치파동 뿐이랴. 돌아보면 4.19의 불씨는 이때부터 타기 시작했는지 모른다.
한 품은 한민당을 대변하던 김성수의 신문 동아일보 지면을 살펴 보자.